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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름 새벽, 일어난다. 옆지기를 깨운다. 출근한다. 일한다. 퇴근한다. 퇴근했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청소하고 빨래하며 집을 정리한다. 정리가 대강 끝날 때 즈음이면 대략 자정. 침대에 몸을 누인다. 잠이 든다. 어스름 새벽, 일어난다. 옆지기를 깨운다….

반복되는 일상, 하루하루 똑같은 일과에 어느새 아랫배가 처지고, 턱살이 늘어지기 시작한다. 다행히도 이 쳇바퀴 같은 일상 속에서도 힘을 북돋아 주는 옆지기가 있어 행복하다. 하지만 찍어내듯 똑같은 하루를 보내고 잠자리에 들기 전, 멍하니 앉아 하루를 정리하다 보면 마음속에 한 줄기 문장이 고개를 불쑥 내민다.

'쉼표가 필요해, 휴식이 필요해.'

위에 그려놓은 무료한 풍경은 내 이야기다. 하지만, 비단 이것이 나만의 이야기일 뿐일까. 일상의 반복에서 오는 권태, 그 속에서 작은 쉼표 하나를 꿈꾸는 건 사치스러운 낭만이 아니다. 지당한 욕구다. 왜냐고? 그만큼 당신과 나는 무척 열심히 살고 있으니까.

책 <일상의 쉼표, 라오스>(밥북) 표지.
 책 <일상의 쉼표, 라오스>(밥북) 표지.
ⓒ 김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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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텔레비전을 켜고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한다. 예능에 드라마 그리고 여행 프로그램을 시청하면서 보고 들을 수는 없으나 직접 만져볼 수 없는 것에 하루하루 쌓이는 피로를 잊는다.

하지만, 이 '약발'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드라마 <미생>의 장그래를 보면서 '내게도 저런 때가 있었어'라고 생각하다가도, 이내 '나는 장그래 만큼 치열하게 살고 있는가, 좀 더 열심히 일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고민에 다다른다. 또 장그래의 상사 오 차장을 보면서 상사의 본보기를 나름대로 정의하지만, 내 주변에 오 차장이 없다는 냉정한 현실에 좌절하기도 한다. 어디 그뿐인가. 청년과 누나 그리고 할배들을 동원한 <꽃보다 OO> 시리즈를 보면서 눈 호강은 하지만, 통장 잔액이 발목을 잡는다.

그러던 와중에 한 권의 책을 꺼내 들었다. <오마이뉴스> 박정호 기자가 쓴 <일상의 쉼표, 라오스>(밥북). 이 책을 택한 이유는 거창하지 않았다. 그저 내 일상에도 쉼표가 필요했고, 이 책의 제목과 내용이 내 욕구를 가장 직관적으로 반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상의 쉼표, 라오스>는 글쓴이가 15일 동안 라오스의 여러 도시를 여행하면서 남긴 기록이다. 글쓴이는 지구상에서 가장 느긋한 수도라는 비엔티안에서 여행을 시작해 '청춘들의 놀이터' 방비엥, '불교 사원의 도시' 루앙프라방, '여행자들의 쉼터' 빡세, '지상낙원' 돈뎃(돈콘) 그리고 참파삭(왓푸)에 발자국을 남겼다. 다소 생소한 곳이라 지도를 열어 보니 라오스 종단하는 코스다.

라오스의 매력, 여기에 다 담겨 있었네

루앙프라방 푸씨산에서 촬영한 해넘이.
 루앙프라방 푸씨산에서 촬영한 해넘이.
ⓒ 박정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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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는 글쓴이가 휴가를 내고 여행을 출발하는 그 순간, 인천공항 비행기 안에서부터 시작된다. 짐을 꾸려 여행을 떠나기 직전의 설렘을 들뜬 어조로 전달한다. 그리고 "비행기 난다"라고 말하는 옆자리 승객의 말을 전하며 라오스에서의 쉼표로 읽는 이를 안내한다. 11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도착한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안, 한국의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에 글쓴이가 얼마나 휴식을 원했는지 알 수 있다.

"고요하고 포근했다. 택시 창문 너머 어둠 속 비엔티안은 시골 같았다. 흥겨운 마음에 노래라도 부르고 싶었지만, 기사 아저씨가 놀랄까봐 관두었다."(본문 중에서)

글쓴이는 비엔티안의 개선문 파툭싸이부터 탁발 행렬, 루앙프라방 푸씨산 해넘이 풍경, 돈뎃 인근에 있는 폭포 콘파펭 등 라오스의 명소를 하나하나 소개한다. 하지만 이런 명소는 여타 여행 관련 서적에도 찾을 수 있는 정보다.

내 눈길을 사로잡은 건 글쓴이가 마주한 소소한 풍경들이었다. 도심을 달리는 툭툭, 길거리에서 만난 고양이와 길거리 음식들, 루앙프라방에서 본 사방치기 하는 아이들, 돈뎃의 학교에서 공부하는 아이들 그리고 글쓴이가 방비엥이라는 곳에서 만난 한 여학생이었다.

글쓴이가 방비엥에서 만난 여학생들. 핑크빛 우산을 든 여학생이 인상 깊다. 저런 게 행복이구나 생각한다.
 글쓴이가 방비엥에서 만난 여학생들. 핑크빛 우산을 든 여학생이 인상 깊다. 저런 게 행복이구나 생각한다.
ⓒ 박정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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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치를 감상하며 걸어가 보니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우리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웃느라 자전거 페달을 밟는 건 뒷전이다. 모두 밝은 표정이다. 친구들과 집에 가는 길은 언제나 즐거우니까. 한 여학생은 뜨거운 햇살을 막으려고 그랬는지 오른손으로 핑크색 우산을 받쳐 든 채 왼손으로만 자전거 핸들을 잡고 달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자전거도 핑크색이다. 멋쟁이다."(본문 중에서)

돌이켜 보니 친구들과 웃으며 집에 갔던 기억이 까마득하다. 우리는 파란 하늘을 보면서 걷기보다는 잿빛 아스팔트를 보면서 걷는 게 익숙하고, 순간을 즐기기보다는 무표정으로 가득 찬 만원 버스에 몸을 싣고 다니는 게 자연스러워진 건 아닐까.

글쓴이가 방비엥에서 마주친 한 여학생 무리와 비교해 보니 지금 우리 삶은 꽤나 피곤해 보인다. 글쓴이는 이를 두고 "(그들에게는) 평범한 일상일 텐데, 왜 그렇게 행복해 보이는지…"라며 부러워한다. 이 책에는 한국에서는 느낄 수 없는 라오스만의 여유와 매력 그리고 소소함이 담겨 있다.

"일상에서 벗어나야 나에 대해 생각할 수 있어"

책 <인생의 쉼표, 라오스> 중 한 장면. 글쓴이가 점프대에 올라 물로 도약하고 있다.
 책 <인생의 쉼표, 라오스> 중 한 장면. 글쓴이가 점프대에 올라 물로 도약하고 있다.
ⓒ 박정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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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일상의 쉼표, 라오스>가 읽는 이에게 제목 그대로 '쉼표'로 다가오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글쓴이가 단순히 여행에 관한 정보만 나열돼 있는 형식을 취하지 않고, 글쓴이의 동선, 시선, 대화를 그대로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몰입도가 높다.

"1시간 40분 동안 노동과 유람을 하다가 점프대가 설치된 강가에 배를 세웠다. 미남(현지 가이드의 별명)이 이곳에서 쉬다 가자면서 내리란다. 배 위에서는 몰랐는데 땅에 두 발을 디디자 허리와 팔이 비명을 지른다. … 방비엥까지 왔는데 할 수 있는 건 다해야지! 마음을 먹고 점프대까지 성큼성큼 올라갔다. 하지만, 발이 잘 안 떨어진다. 그냥 뛰면 되겠지! 몸을 던지자 환희가 찾아왔다. 이 바람, 이 자유! 하지만 자유는 오래가지 않았다."(본문 중에서)

마치 읽는 이가 라오스에서 글쓴이와 동행하는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여행지에 도착해서 방을 구하고, 목적지를 향해 떠나고, 어디서 어떤 식사를 하고, 누구와 어떤 대화를 나누고…. 이런 형식으로 라오스를 한 장 한 장 다채롭게 옮겨 놨다. 글쓴이는 세세한 설명에 그 상황을 담은 사진까지 적재적소에 덧붙여 놨다.

글쓴이는 루앙프라방에서 경건한 탁발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오기도 했다.
 글쓴이는 루앙프라방에서 경건한 탁발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오기도 했다.
ⓒ 박정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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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여행기 속에 '사람 사는 이야기'가 스며있기 때문이다. 글쓴이의 여정에는 수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비엔티안에서 우연히 만나 여행을 함께한 은행원 대봉씨, 비행기에서 만나 인연을 만든 프랑스 여행 고수 니콜 할머니, 매사에 까칠해 보이지만 '나중에 소주 한잔 하자'는 다정다감 안젤라…. 특히 글쓴이와 니콜 할머니와의 대화는 왜 우리 일상에 쉼표가 필요한지 알려준다.

"여행을 하면 일상을 벗어나 나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어. 일상에 묻혀 우리가 보지 않았던, 보기 두려워했던 것을 직시할 수 있거든. 가족들하고도 여행을 가지만, 진짜 여행은 이렇게 혼자 다니는 거야. 그래서 정호도 만나서 이렇게 얘기를 나눌 수 있잖아."(본문 중에서)

글쓴이는 이렇게 여행 도중 만난 사람들의 사는 이야기까지 들려준다. 글쓴이는 궁극적으로 다른 여행자들의 이야기를 혹은 그들과 함께 겪은 경험을 들려주면서 넌지시 독자에게 귀엣말을 해주는 듯하다.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리지만 말고, 여유를 찾으면 다른 세상이 보일 것이라고.

비엔티안의 길거리 음식들.
 비엔티안의 길거리 음식들.
ⓒ 박정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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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 하루를 사는 당신에게 '잠깐 멈춤'의 중요함을 알려주는 책 <일상의 쉼표, 라오스>. 글쓴이가 15일간의 여정을 마치고 라오스를 떠나는 걸 아쉬워할 때 독일 청년 우베가 한 말이 인상 깊다.

"언제든지 다시 떠나면 되잖아. 일상으로 돌아가야 다시 여행을 시작할 수 있는 거야."(본문 중에서)

문득 고향집 창고 어딘가에 구겨져 있는 여행 가방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당신과 나, 잠시 반복의 굴레를 잠시 멈추고 어디로든 떠나보는 건 어떨까.


일상의 쉼표, 라오스 - 박정호 기자의 라오스 종단 여행수첩

박정호 지음, 밥북(2014)


태그:#라오스, #일상의 쉼표 라오스, #박정호, #밥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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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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