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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한파'는 어느덧 고유명사가 됐다. 실제 떠올려보면 수능 날에 딱히 추웠다는 기억이 없는데, 수능 철만 되면 뉴스에서는 '어김없이' 한파가 찾아왔다고 설레발을 친다. 기상청에 따르면, 올해 '수능 한파'는 16년만이다. 수험생의 잔뜩 움츠린 몸은 '수능' 때문이지, '한파' 때문은 아니다.

수능 당일, 시험 감독관을 맡은 광주광역시 한 학교로 향했다. 뉴스 탓인지 낯선 시험장으로 들어서는 아이들의 모습은 마치 오뚝이 같다. 두꺼운 다운 파카에 목도리까지 칭칭 감은 채 몸집만 한 가방을 메고 뒤뚱거리며 걸어온다. 듣자니까 해도 뜨지 않은 새벽녘에 핫팩 손에 쥐고 일찌감치 시험장에 도착한 아이도 있단다. 그들에게 수능은 당일 기온이야 어떻든 혹한의 한겨울 날 고통스런 기억일 수밖에 없다.  

과거와는 달리 교문이 비교적 조용했다. 예년 같으면 학교마다 전날 밤부터 후배들이 진을 치고 선배 수험생들에게 따끈한 차를 대접하며 교가를 불러주기도 하고, 왈가닥 학교의 경우에는 아예 징에다 꽹과리까지 동원해서 떠들썩한 난장을 만들곤 했다. 수시모집이 보편화되면서 수능의 비중이 전에 비해 많이 약화된 탓이라는 해석이 뒤따른다.

그럼에도 수능은 여전히 '대박'이라는 말에 자연스럽게 호응하며, 이 '한 방'으로 인생 역전이 가능하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고 있다. "수능은 이 땅의 모든 학생들이 누구나 거쳐야하는 '관례(冠禮)'이며, 적어도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로또'다." 수시모집을 '가진 자들만을 위한 꽃놀이패'라며 극도로 불신하는 한 동료교사의 '수능 예찬론'이다.

1교시 시작 20여 분 전, 바쁘다 바빠...

201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진 지난 13일 오전 경남 함양군 함양제일고등학교 정문에서 한 수험생이 후배들의 응원을 받고 있다.
 201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진 지난 13일 오전 경남 함양군 함양제일고등학교 정문에서 한 수험생이 후배들의 응원을 받고 있다.
ⓒ 함양군청 김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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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교시가 시작되기 전 20여 분은 감독관도 수험생도 정말 바쁜 시간이다. 수험생이 차분히 자리에 앉아 긴장을 풀도록 해야 할 그때, 온갖 '엄포'가 장내 방송과 감독관의 입을 통해 반복적으로 쏟아진다. 소지해서는 안 될 물품과 허용되는 것을 공지하고, 스마트폰 등 전자기기를 수거하고 관리본부로 인계하는 일 등을 마쳐야 한다. 모두 부정행위를 예방하기 위한 조치들이다.

답안지에 감독관 날인을 하기 전, 응시원서의 사진과 실제 얼굴을 대조하는 일도 빼놓을 수 없다. 대리시험을 막기 위한 것이다. 아무리 감독관과 수험생의 관계라지만, 초면에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건 서로 참 민망한 일이다. 문제는 보고 또 봐도 본인 확인이 쉽지 않다는 데에 있다. 해마다 느끼는 거지만, 여학생의 얼굴은 사진과 동일한 경우가 거의 없다.

본인 확인과 날인은 제1감독관의 업무지만, 결국 제2감독관으로 함께한 여선생님께 도움을 청한다. 여자의 얼굴은 여자가 훨씬 더 잘 알아볼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시험 시작을 알리는 본령이 울리고도, 한참이나 걸려 본인확인을 마친 여선생님은 돌아와 이렇게 말했다.

"저도 잘 못 알아보겠어요." 

여학생의 경우, 사진은 대부분 안경을 벗었지만, 내가 감독한 교실의 경우 28명 중 여섯 명 빼고는 모두 안경을 쓰고 있었다. 설령 본인 확인 때 안경을 벗긴다 해도, 알아보기는 쉽지 않다. 거의 대부분 응시원서 증명사진을 '뽀샵(포토샵)' 처리했기 때문이다.  

하여 제안해본다. 적어도 수능 응시원서 작성용 사진을 찍을 때만큼은 '뽀샵'을 금지하도록 명문화했으면 싶다.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도록 과도하게 손을 댄 사진은 이미 '사진'이 아닐뿐더러, 자칫 악용될 소지마저 있다.

결국 그들은 1교시를 끝으로 수능을 접었다

수험생들은 종료 10분 전을 알리는 방송이 나와도, 시험지를 막 받은 때처럼 모두가 진지하다. 대개 이때쯤이면 수험표 뒷면에 가채점을 위한 답을 적곤 하는데, 그렇게 하는 수험생이 한 명도 안 보였다. 이윽고 종료령이 울렸고, 손에서 펜을 놓는 소리와 함께 곳곳에서 '아~'라는 외마디 탄식이 흘렀다. 단박에 1교시 국어 시험이 만만치 않았음을 직감했다. 이들은 모두 문과 학생들로, '국어 B' 시험을 치렀다.

수거된 답안지와 시험지를 거듭 헤아리고 있는데, 두 아이가 교실 앞으로 나오더니 주섬주섬 짐을 싸기 시작했다. 한 아이는 무덤덤한 표정이었지만, 다른 한 아이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답안지와 시험지를 챙겨 교실을 나오려는데 등 뒤로 그의 짧은 한 마디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3년을 바쳤는데, 1교시 국어에서 이럴 줄은…."

결국 그들은 1교시를 끝으로 수능을 접었다. 물론, 내년 수능을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다. 한 감독관은 자기 교실에서도 짐을 싼 수험생이 한 명 있었다며, 그들과 같은 수능 중도 포기 수험생이 전국에 족히 수천은 될 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의 선택을 이해하기란 어려웠다. 본인에게만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았을 텐데, 성급하고 즉흥적인 철없는 판단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수긍이 가는 면도 있다. 선선히 재수, 삼수를 마다않는 그들에게 수능이란 1~2년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는, '일생 일대 최대의 사건'으로 여겨질 테니. '수능의, 수능에 의한, 수능을 위한' 학창시절을 보냈고, 오롯이 3년을 '바쳤다'고 말하는 그들 앞에서, 수능이 별 것 아니라는 '진실'을 들려준다한들 귀에 들어올 리 있겠는가. 적어도 지금 그들에게 수능은 삶 전부와도 같다. 

어느덧 2교시가 끝나고 점심시간이다. 삼삼오오 모여 함께 도시락을 먹는 아이들의 얼굴이 밝다. 다들 수학 시험은 비교적 쉬웠던 모양이다. 감독관 십 수 년 동안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수험생들의 표정만 봐도 시험의 난이도를 대충 파악할 수 있고, 다음 날 신문기사의 내용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도 있다. 1교시의 '고비'를 넘기지 못한 두 아이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기실 1교시 시험의 난이도는 정말 중요하다. 그렇잖아도 잔뜩 긴장해 있는데, 첫 장의 첫 문제부터 막히면 순간 머리가 하얘지기 일쑤다. 적잖은 수험생들이, 설령 '실력'이 아닌 '실수'로 등급이 갈린다 해도, 1교시만큼은 쉬웠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이유다. 수험생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수능 대박'의 꿈은 사실상 1교시에 결판난다. 

'영어 삼매경'에 빠진 수험생들, 하지만 불안했다

수험생들은 종료 10분 전을 알리는 방송이 나와도, 시험지를 막 받은 때처럼 모두가 진지하다.
 수험생들은 종료 10분 전을 알리는 방송이 나와도, 시험지를 막 받은 때처럼 모두가 진지하다.
ⓒ s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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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은 후 치르게 되는 3교시 영어 시험은 어쩌면 집중력과의 싸움이다. 포만감에 순간 나른해지기 십상인 탓이다. 3교시는 '하품 한 번에 오답 하나'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더욱이 본령이 울리지 않고, 곧장 20분간의 듣기평가가 시작되니 감독관과 수험생 모두 바짝 긴장해야 한다. 적어도 감독관에게는 미동도 허락지 않는 고통의 시간이기도 하다.

웬걸, 영어가 우리말처럼 익숙하게 들린다. 영어 공부를 접은 지 십 년이 넘었는데도, 문제지를 보지 않고도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다. 수험생들도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답안지에 마킹하는 펜 놀림조차 가볍고 경쾌하다. 이러다 그들 입에서 무심결에 흥얼거리는 소리가 나오면 어쩌나 하는 괜한 걱정까지 했다. 1교시 국어 시험 때의 침울했던 분위기와는 하늘과 땅 차이다. 

엎드려 자는 수험생도 거의 없다. 나이 지긋해 보이는 늦깎이 수험생 한 둘만 빼면, 모두가 '영어 삼매경'에 빠져있다. 그런데도 불현듯 걱정이 앞선다. 틀림없이 변별력을 잃었다며, 입시 지도가 어려워졌다며, 눈치작전이 극심해질 거라며, 수능에 십자포화를 퍼부을 것이 빤하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변별력은 수능의 양보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이며, 거칠게 말해서,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늘 그래왔듯, 수능은 쉬워도 안 되고, 어려워도 안 되는 시험이다. 출제된 문제가 고3 교과서의 수준에 부합하는지는 아예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일렬로 줄을 세웠을 때, 동점자 수 없이 한 가닥 매끈한 실처럼 '보기 좋게' 정렬될 때라야 비로소 수능 출제자들이 욕먹지 않게 된다. 수능은, 고등학교 3년간의 학업성취도를 평가하는 시험도 아니고, 이름 따온 대로 대학에서 공부할 능력이 있는가 여부를 파악하는 시험도 아니다. 유일한 목적은 '순위를 매기는 것'이다.

국영수의 '부록'처럼 여겨지는 4교시 탐구영역

4교시 탐구영역 시험은 국영수의 '부록'처럼 여겨진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네 과목이나 치러야 해서 네 영역 중 시간이 가장 길었는데, 지금은 달랑 두 과목만 치르니 한 시간이면 끝난다. 수능에서의 비중도, 아이들의 집중도도 짧아진 시험시간만큼이나 시나브로 낮아졌다. 3교시만 끝나면 대개 긴장이 풀린 듯, 기지개를 켜거나 손가락으로 연신 볼펜을 돌리는 등 앞 시간엔 하지 않던 '여유로운' 동작을 보이곤 한다. 

100분짜리 수학시험도 풀었는데 고작 30분짜리 탐구과목 시험은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 일찌감치 끝내고 엎드려 자는 아이들이 속속 눈에 띈다. 한국사 교사로서, 그들이 주로 선택한 과목이 무엇인지 궁금해 돌아보았다. 안타깝게도 28명 중 한국사를 선택한 경우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윤리와 사상, 생활과 윤리가 태반이고, 이따금 한국지리와 동아시아사가 보였다. 선택 과목만 놓고 보면, 대한민국은 매우 '윤리적'인 나라다.

수능에 학교 교육과정이 철저히 종속돼 있다 보니 생기는, 일종의 '교과목 편식'이다. 공부하기 비교적 수월하고, 점수 따기도 무난한 과목으로의 편중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곧, 수능 필수과목이 되는 한국사를 아이들이 얼마나 부담스러워하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내년에 수능에 응시하는 아이들이 스스로 재수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윽고 종료령이 울렸고, 올 수능은 끝났다. 대개는 감독관이 있어도 함성을 지르며 홀가분함을 드러내는데, 이번엔 전혀 달랐다. 수거해 간 스마트폰을 돌려받을 때까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그대로 앉아있었다. 모르긴 해도, 1교시 국어시험의 여파인 것 같았다. 되레 들뜬 곳은 교문 주변이다. 수험생들을 기다리는 부모와 그들이 타고 온 차들로 이미 발 디딜 틈조차 없다.  

답안지 이상 유무가 완전히 확인될 때까지, 수험생도 감독관도 30분여를 교실에서 대기해야 한다. 정말 데면데면한 시간이다. 시험이 끝났는데도, 시작할 때보다 더 움츠리고 있는 그들에게 격려가 필요해보였다. 그러나 쉽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격려한답시고 꺼낸 말이 자칫 그들에게 상처를 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저 눈으로 말했다. '여러분 모두의 건투를 빌어요.'

다음 날 아침, 출근하기 무섭게 한 아이가 찾아왔다. 그도 이번에 수능을 치렀다. 가채점 결과 그 어려웠다는 국어 시험을 다 맞혔다며 들떠 있었다. 평소 모의고사 성적을 훨씬 뛰어넘는, 말 그대로, '대박'인 셈이다. 그러면서 수시모집에 합격할 것을 되레 아쉬워했다. 물론, '수능 대박'이면 '정시 올인'인 게, 학교든, 학원이든 입시지도의 ABC다.  

여느 수험생들처럼 수능이 삶의 전부라고 여기는 그는 이번 수능 결과를 통해 인생은 역시 '한 방'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셈이 됐다. 그것도 아주 기분 좋게. 수십 만 수험생들과 학부모에게, 또 그들을 가르친 학교와 교사에게, 어쩌면 이게 곧 '수능'이고, '교육'이다. 학교생활을 아무리 잘 했어도, 공부를 아무리 충실히 했어도 소용없다. 오로지 결과다.


태그:#2015 수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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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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