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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전거가 귀한 시절에 태어나고 자랐다. 어린 내 눈엔 골목마다 하나씩 있던 구멍가게 앞에 비치된 짐 자전거가 고향의 외양간에서 살고 있던 소와 한 가치로 여겨졌으니 말이다. 1980년대 말, 대학시절에는 고등학생이던 동생이 신문배달 일로 눈물겹게 마련한 일명, '싸이클'을 몰래 타고 등교한 일이 있다. 학교 도서관 앞에 세워두었다가 도둑을 맞았다는 소식을 접하고 달기 똥 같은 눈물을 흘리던 동생의 처연했던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미안하기 그지없다.

<자전거 여행1> 표지
 <자전거 여행1> 표지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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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여행>을 읽다가 나는 자전거 여행이 하고 싶다기 보다 자전거에 얽힌 이런 저런 추억들을 떠올린다. 초등학교 2학년이나 3학년 시절 속초 고모 댁을 방문해 사촌들로부터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운 일, 그리고는 곧 혼자서 커다란 자전거를 타고 속초의 시내며 바닷가, 언덕배기에 있던 사촌 형들의 학교를 돌아다니던 일들이 말이다.  여행 에세이를 위해 누구에게나 있는 추억의 자가용,자전거를 선택한 저자의 혜안이 느껴진다.

<자전거 여행1, 2>은 이젠 67세가 된 소설가 김훈이 52세의 나이에 장딴지가 부풀어 오르고 팽창하는 허벅지에 통증이 차오르도록 멈추지 않고 우리나라 방방곡곡을 자전거로 돌아다니며 쓴 에세이다. 올해 재편집되어 다시 태어났다. 곳곳은 우리가 이미 돌아본 적이 있지만 김훈은 이 책에서 그 장소들을 관광지나 유적지가 아닌 대화의 상대로 만나고 있다. 세밀한 관찰과 엄중한 통찰을 통해서 앎이나 느낌만으로는 묘사할 수 없는 글과 생각을 남겼다.

"'숲'이라고 모국어로 발음하면 입안에서 맑고 서늘한 바람이 인다. 자음 'ㅅ'의 날카로움과 'ㅍ'의 서늘함이 목젖의 안쪽을 통과해 나오는 'ㅜ'모음의 깊이와 부딪쳐서 일어나는 마음의 바람이다. 'ㅅ'과 'ㅍ'은 바람의 잠재태이다. 이것이 모음에 실리면 숲 속에서는 바람이 일어나는데, 이때 'ㅅ'의 날카로움은 부드러워지고 'ㅍ'의 서늘함은 'ㅜ'모음 쪽으로 끌리면서 깊은 울림을 울린다."(1권, p.59)

'숲'이라는 단어를 사랑하는 저자가 안면도 소나무 숲과 광릉 수목원을 멀리서 또는 가까이에서 그리고 최대한 천천히 살피다가 깨달은 바를 소개한다. 저자 김훈이 생명의 근원인 숲이 인류사를 통해 지구에서 계속 그 면적이 줄어들고 있어 안타깝다는 표현은 전혀 하고 있지 않지만 나는 그의 글을 읽으면서 슬프다. 지구가 오염되지 않고 자연복원력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세계인구가 5천명 미만이어야 한다는 말이 생각나서였다. 자연과 인간의 평화로운 공존이 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절망감 때문일까.

저자는 강원도 고성의 태백산맥에서 불이 나 재가 되어버린 숲을 복원한답시고 막대한 돈을 들여 조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관료들의 기계적 행태에 분개한다. 전문가여야 할 그들이 숲의 자연복원력을 모르고 있고 산림전문가의 조언도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감정을 배제한 건조체를 유지하던 저자도 사람인지라 섬진강을 기억하면서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자 시인인 김용택과의 친분을 과시한다. 김포 전류리 포구에서 <자산어보>에 횟감의 으뜸으로 소개되어 있다는 '웅어'를 읽을 때는 개발에 훼손되는 자연이 안타깝고, 한강을 거슬러 다산 정약용의 생가가 있는 두물머리 께 가서는 정약용 형제들과 이벽, 이승훈 등 일가가 천주교 탄압을 국가적 시책으로 삼은 조정의 칼날에 일망타진되는 과정을 소개한다. 배교와 치욕에서 잔인한 인간사를 읽는다. 저자가 정약용에 대한 경외감을 표현할 때는 읽는 독자도 소름이 돋는다.

'형틀에 묶인 정다산은 천주교를 서슴없이 배반했다. 그는 주문모 신부의 존재를 폭로했고, 황사영과 이승훈을 삿된 무리들이라고 저주했다. (중략) 길고도 기약 없는 유배생활에서 수많은 저술을 쌓아가면서도 그는 1801년의 배반과 치욕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쓰지 않고 말하지 않았다. (중략) 다산의 치욕은 침묵 속에 잠겨 있다.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치욕이 아니라 그가 한평생 간직했던 침묵이다. 치욕은 생애의 중요한 부분이고, 침묵은 역사의 일부다.'(1권 p.172)

<자전거 여행2> 표지
 <자전거 여행2> 표지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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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으로 가면 무등산 정기를 받을 수 있고, 문경새재와 도산서원, 안동 하회마을을 읽을 수 있다. 내가 근무하는 모란시장도 나오고 나의 중시조인 송강 정철의 노련한 정치가로서의 면모와 성산별곡의 작가로서의 도가적 면모가 소개되기도 한다. 내가 사는 근방에서 가장 유명한 지역, 남한산성에서는 조선의 12대 임금인 인조가 청의 용골대에 행한 치욕적인 항복의식을 만난다.

자전거에 얽힌 나의 추억이 하나 더 생각난다. 대학시절 야학생활 중 일화다. 야학은 중랑구 면목동의 성당지하에 위치해 있었고, 늦은 저녁 수업이 끝나면 술자리가 있었다. 면목시장에서 시작된 술자리는 종종 면목동 길을 따라 포장마차에서 포장마차로 이어지기 마련이었는데, 그날따라 중화동 태릉시장까지 이어지는 것이었다.

그 근처에 살던 선배가 부모님이 집을 비웠다며 초대했고 그 자리가 그날의 마지막 술자리였다. 일행 중 막내였던 내가 집밖으로 나가 술을 사오기로 했는데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추운 겨울이었지만 골목 끝 어귀의 구멍가게에 다녀오기로 한 당시의 나는 속옷 위에 재킷을 걸치고 맨발에는 슬리퍼를 꿴 대책 없는 차림이었다.

술과 안주를 한 보따리 사서 들고 헤맨 골목 안의 대문들은 같은 형태와 색깔이었고 늦은 밤이었으며 난 취해있었다. 다시 가게로 돌아간 나는 술과 안주를 맡기고 짐 자전거를 빌려야 했다. 중화동에서 면목동 길을 따라 어린이 대공원 후문을 거쳐 천호대교를 넘어 암사동 우리 집까지 자전거 여행을 해야 했으므로.

태릉시장의 포장마차와 그 선배의 집을 추억하고 싶지만, 김훈의 표현에 따르면 '남의 방바닥이 나의 천장이고 나의 방바닥이 남의 천장인 지붕이 없는' 아파트들이 덮쳐버렸기에 불가능한 일이 됐다.

덧붙이는 글 | <자전거 여행 1,2> 김훈 지음, 이강빈 사진, 문학동네, 2014년 10월 22일 발행



[세트] 자전거여행 - 전2권

김훈 지음, 이강빈 사진, 문학동네(2014)


태그:#김훈, #자전거,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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