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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에 유행했던 표어 중 하나. 영화촬영소에서 발견했다.
 1970년대에 유행했던 표어 중 하나. 영화촬영소에서 발견했다.
ⓒ 송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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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나면 다시보고 수상하면 신고하자'

이 땅에서 1970년대를 살아온 지금 40대 중반 이상에게는 눈에 익은 말이다. 도시와 농촌 할 것 없이 그 시절에는 전봇대나 담벼락마다 이런 표어가 하나 건너 하나씩 붙어 있었다. 아, 이런 것도 있었다. '간첩 잡아 애국하고 유신으로 번영하자'.

주위 사람들 중에 혹시 간첩이나 무장공비가 아닌지 의심나는 이가 있으면 자세히 살펴봐서 아무래도 수상하다 싶으면 경찰서나 가까운 지서에 신고하라는 것이었다. 그게 애국하는 일이었다. 유신으로 번영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런 표어에는 국가 안보를 튼튼히 하겠다는 취지만 들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 싶다. 아니, 오히려 정권 안보가 주된 목적이었을지도 모른다. 간첩을 신고하면 나라에서 주겠다는 포상금 액수 또한 가히 로또 당첨금에 버금갔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북괴'의 각종 도발이 벌어질 때마다 전국의 크고 작은 공설운동장에서는 각종 공공기관이나 기업체의 이름으로 수도 없이 들고 나온 플래카드를 펄럭이면서 규탄대회나 궐기대회라는 걸 열기도 했다. 물론 짚으로 만든 김일성 화형식도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반공이야말로 수출 증진과 더불어 국시(國是)로 대접받던 시절 이야기다. 그거야 어쨌든 가난하게 살던 그 시절 이 땅의 국민 모두는 애어른 가릴 것 없이 요즘말에 빗대자면 '간(첩)파라치'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 터….

어느 파출소 앞에 걸린 플래카드
 어느 파출소 앞에 걸린 플래카드
ⓒ 송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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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처럼 남에게 피해를 주는 나쁜 운전습관은 당연히 사라져야 할 것이다. 신호를 무시하기 일쑤고, 난폭 운전을 일삼는 바람에 다른 운전자들에게 직간접적으로 크고 작은 피해를 입히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교통경찰 입장에서도 인력부족이라는 물리적 한계 때문에 '나쁜 운전'을 일일이 단속하기가 거의 불가능할 거라는 점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 옛날처럼 무슨 궐기대회 같은 걸 대대적으로 벌이기도 쑥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추방'이라고까지 말할 건 또 뭔가. '합시다!'도 (물론 그 옛날의 '하자'식 반말 투에서 조금 나아지기는 했지만) 다분히 선동적이다. 모르긴 해도 이런 걸 제작하는 데는 국민들이 낸 세금도 적잖이 축났을 것이다. 더구나 도시의 대로변에 이런 플래카드를 내건다는 게 명색이 OECD 국가로서 체면이 말씀이 아니다. 

'나쁜 운전을 추방합시다!' 바로 아래에는 신고 방법까지 친절하게 적어놓았다. 자, 그러면 거리를 걷거나 운전을 하다가 나쁘게 운전하는 (교통법규를 위반하는) 차를 발견하면 플래카드에 적힌 인터넷 사이트에 접속을 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는, 가령 이런 식이겠다.

"조금 전에요, 그러니까 4월 13일 오후 2시 20분쯤, 홍대 근처 네거리에서 붉은 신호등인데 직진하는 파란색 1톤 화물트럭 한 대를 봤어요. 그 차 때문에 하마터면 큰 사고가 날 뻔했지 뭐예요. 진짜로 나쁜 운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신고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도 경황이 없어서 번호판을 제대로 찍지 못했는데 어떡하…죠?"

"아주아주 나쁘게 운전하는 사람들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지금 볼일이 있어서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휴게소에 잠깐 들렀습니다. 아까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니까 단속 카메라가 없는 데서는 사람들이 얼마나 과속을 해대는지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사실은 저도 카메라가 안 보이면 120킬로쯤으로 좀 밟는다고 밟았습니다. 그런데 제 차를 추월하는 차가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아, 이제 보니까 저도 속도위반을 했습니다. 그럼 저도 나쁜 운전을 한 것입니다. 신고 취소하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그 옛날에는 전국 방방곡곡 거리나 산기슭이나 전봇대에 간첩신고 플래카드와 표어를 눈이 어지럽도록 처발라서 온 국민을 '간파라치'로 만들더니, 21세기 글로벌 시대에 들어서는 시민 모두를 '차(車)파라치'로 만들고 싶은 건가?

가만 있자…, 어렸을 때는 남의 잘못을 고자질하는 게 제일 나쁜 거라고 했지 않은가. 그건 그렇다 치고, 간첩신고는 로또급 포상금이라도 걸려 있었는데, 플래카드를 살펴보니 차파라치한테는 땡전 한 푼도 안 줄 작정인가 보다.


태그:#운전,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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