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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뒤 첫 번째로 맞이하는 남한산성의 가을, 그 빛이 부드럽고 아름답다.
▲ 남한산성 남문 유네스코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뒤 첫 번째로 맞이하는 남한산성의 가을, 그 빛이 부드럽고 아름답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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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남한산성>이라는 소설을 읽은 후, 남한산성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달라졌다. 추억이 아니라 이미지라고 하는 것은, 어릴적 남한산성을 오르내리며 뛰어놀던 추억은 아련하되 김훈의 소설 이후에는 병자호란이라는 굴욕적인 이미지가 맴돌기 때문이다.

아무런 대책도 방도도 없이 후금을 오랑캐로 여기고,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당시의 서인정권, 사대부는 그야말로 백성들의 안전에는 관심조차 없는 무능하고 부패한 이들이었다.

남한산성의 단풍은 이번주말과 다음주까지 절정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오늘도 절정이라 할만큼 아름다웠다.
▲ 단풍 남한산성의 단풍은 이번주말과 다음주까지 절정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오늘도 절정이라 할만큼 아름다웠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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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은 청태종의 입을 빌어 당시 서인세력과 사대부, 인조의 무능함을 드러낸다.

"내가 이미 천자의 자리에 올랐으니 땅 위에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나를 황제로 여김은 천도에 속하는 일이지, 너희에게 속하는 일이 아니다. (줄임) 네가 명을 황제라 칭하면서, 너의 신하와 백성들이 나를 황제라 부르지 못하게 하는 까닭을 말하라."

등산로를 위해 잘려진 나무, 그 밑둥이 얼마나 많이 밟혔는지 반질거린다.
▲ 나무밑둥 등산로를 위해 잘려진 나무, 그 밑둥이 얼마나 많이 밟혔는지 반질거린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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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능했던 임금과 그 수하들, 말(言)과 글 외에는 아무 능력도 없는 이들은 여전히 백성 위에 군림했고, 백성은 복종했을 터이다.

세월호 200일, 이 나라가 제대로 된 나라였다면 유족과 국민이 원하기 전에 앞장서서 세월호참사의 진상규명을 밝히고 책임자들을 처벌했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이 나라는 그리하지 못했다. 오히려 유족들과 세월호 특별법을 요구하는 이들을 질타하고 있다.

눈부신 가을빛은 부드럽기까지 했다.
▲ 단풍 눈부신 가을빛은 부드럽기까지 했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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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름다운 가을빛을 보면서도 흔쾌하게 저 깊은 속까지 맑아지지 않는 이유는 이런 이유들이다. 부끄러웠던 역사와 부끄러운 현실, 그 속에서도 가을빛은 이리도 아름답다. 얄밉도록 아름다운 것이다.

병자호란은 역사속으로 잊고, 저 낙엽 속으로 묻어버린다고 하더라도, 지금 여기라는 현실은 어찌해야 하는가?

남한산성에 올라 산행을 하기 전에는 이런저런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했다.

이미 나뭇잎을 다 떨군 나무는 가을빛만 붙잡고 있다.
▲ 가을 이미 나뭇잎을 다 떨군 나무는 가을빛만 붙잡고 있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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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로를 따라 걸어가며 만난 가을빛, 그 부드러운 빛들을 보면서 걷는 내내 나는 그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남한산성의 아름답고 부드러운 가을빛이 그 아픈 역사와 현실로부터 나를 탈출시킨 것이다.

내 안에 있던 것들을 그들이 품음으로서 카타르시스의 시간을 나에게 선물한 것이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역사는 아프더라도 묻어두고, 그 역사를 거울 삼아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는 것이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이들의 몫이리라.

남한산성의 올해 단풍은 은은하고 부드러운 맛이 있다.
▲ 단풍 남한산성의 올해 단풍은 은은하고 부드러운 맛이 있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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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안타깝게도 되풀이되어서는 안 될 망령의 역사가 되풀이 되는 현실을 본다. 망령의 역사가 되풀이 되면서 올곧던 역사는 왜곡되고, 우리네 역사를 아프게 했던 친일파와 극단적인 보수우익들이 활보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런 현실을 뒤로하고 산행을 한다는 것, 가을빛의 아름다움에 취해 잠시라도 잊는 것이 큰 죄를 짓는 것만 같다. 그러나 잠시라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다. 이 미친 세상에서 미치지 않고 살아가려면 잠시라도 현실을 잊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단 하나 남은 마지막 잎새, 이파리를 떨군 나뭇가지마다 꽃눈이 열렸다. 긴 겨울을 나고 봄이면 저 곳에서 새순이 싹틀 것이다.
▲ 마지막 잎새 단 하나 남은 마지막 잎새, 이파리를 떨군 나뭇가지마다 꽃눈이 열렸다. 긴 겨울을 나고 봄이면 저 곳에서 새순이 싹틀 것이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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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도피하겠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말 같지도 않은 말들에 치이고, 사람 같지 않은 사람에 치이다 보면 나 스스로도 이성을 상실할 수 있으니 잠시 한 걸음 물러나겠다는 것이다.

어느새 마지막 잎새.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일까? 잔가지마다 꽃눈, 저 꽃눈이 겨울을 나야 새봄에 연록의 새싹이 피는 것이다. 봄은 가을부터 시작된 것이다.

가을단풍나무 아래로 등산로를 따라 산행하는 이들의 걸음걸이가 활기차다.
▲ 산행 가을단풍나무 아래로 등산로를 따라 산행하는 이들의 걸음걸이가 활기차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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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그렇게 남한산성의 가을은 모든 것을 품어버렸다. 그래서 현실에 대해 무책임하게 살겠다가 아니라, 그런 품으로 현실의 아픔들을 품고 묵묵히 남한산성에 기대어 사는 나무들처럼 살아갈 일이다.

맨 처음 나무는 남한산성에 기대어 살았지만, 이젠 남한산성이 나무에 기대어 살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남한산성 남문의 성벽을 따라 산행을 하는 이들도 가을빛으로 물들었다.
▲ 남한산성 남한산성 남문의 성벽을 따라 산행을 하는 이들도 가을빛으로 물들었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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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가는 조국이 정상이라면, 이런 아름다운 가을빛이 넘쳐나는 곳에서는 그저 외마디 탄성을 질러가며 단풍의 아름다움을 만끽했을 것이다.

그러나 비정상이 정상인 나라에서 개인의 삶에 잠시 매몰되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가을단풍 별이 되다. 초점을 흐려 별모양의 보케를 만들어 보았다.
▲ 가을빛 가을단풍 별이 되다. 초점을 흐려 별모양의 보케를 만들어 보았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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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의 가을빛은 부드러웠으며, 그 아픈 역사를 품었고 나를 품어주었다.

가을이란 그런 계절인가 보다. 비움의 과정을 밟기까지 겪었던 모든 계절들 가운데 아픔도 있고 기쁨도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을 품고 나니 이리도 부드러운 빛을 갖게 되었다고 잎으로 말하는 계절인가 보다.


태그:#남한산성, #병자호란, #인조, #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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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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