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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를 상대로 한 직장 내 성희롱 사건이 또 발생했다. '박희태 전 국회의장 성추행', '쌤앤파커스 고위 간부 성추행'과 '중소기업청 계약직 여직원 자살'에 이어 두 달 사이 알려진 것만 네 번째다. '직장 내 성희롱'이 법으로 명시되고, 성희롱예방교육을 의무화 한 지 올해로 15년이 흘렀지만 현실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2012년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한 <성희롱 사건 백서>를 보면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이 오히려 느는 추세다. <오마이뉴스>는 두 차례에 걸쳐 직장 내 성희롱을 근절하기 위한 대안을 모색한다. [편집자말]
성희롱 예방교육이 의무화된 지 15년째로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여성 노동자들은 ‘직장 내 성희롱’에 시달린다. 지난해 한국여성민우회 상담기록을 살펴보면 공개적으로 문제제기를 했다가 오히려 해고나 전직 등 불이익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사진은 지난해 고용노동부가 만들어 배포한 성희롱 예방 교육용 동영상의 한 장면.
▲ '성희롱 예방 교육 의무화' 15년이 흘렀지만... 성희롱 예방교육이 의무화된 지 15년째로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여성 노동자들은 ‘직장 내 성희롱’에 시달린다. 지난해 한국여성민우회 상담기록을 살펴보면 공개적으로 문제제기를 했다가 오히려 해고나 전직 등 불이익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사진은 지난해 고용노동부가 만들어 배포한 성희롱 예방 교육용 동영상의 한 장면.
ⓒ 고용노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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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신창이가 됐어요."

서울대공원에서 6년째 셔틀버스를 운행하고 있는 최아무개(38)씨의 눈시울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곳에서 파견계약직으로 일하는 최씨는 지난 7월 용기를 내어 상사의 성희롱과 성추행 사실을 알렸다가 오히려 과도한 업무 지시를 받는 등의 불이익을 당했다. 지난 24일 만난 그는 그동안 자신이 겪은 일을 복기하는 내내 착잡한 표정이었다. 자신과 잘 맞아 즐겁기만 했던 일터는 이제 "이를 악물고 버텨내야 하는" 곳이 돼버렸다.

악몽의 시작은 정규직 공무원들과 셔틀버스·매표소에서 일하는 파견계약직 직원들이 함께 떠난 워크숍이었다. 파견 직원을 관리하는 서비스용역실장은 출발 전 매표소 직원들에게 당부했다. "강아무개 팀장(6급)님이 애써주셔서 공무원만 쓸 수 있는 곳으로 워크숍을 오게 됐으니 잘 모셔야 한다." 또 "술을 따르고, 웃으며 분위기를 띄우라"는 지시도 이어졌다.

"오늘 나랑 역사를 이루려고 그래?"... 비정규직에게 쏟아진 음담패설

그날 워크숍 장소로 향하는 버스 안에는 술과 음담패설이 오가기 시작했다. 40대인 강아무개 팀장은 여성 비정규직들이 나란히 앉아 있는 맨 마지막 좌석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앉았다. 버스 안에는 정규직 공무원을 포함한 20여 명이 타고 있었지만 그는 거침이 없었다. "어린 것들과 놀아서 좋다" "다른 부서로 가도 여기 워크숍은 꼭 오겠다" 따위 말을 늘어놓았다.

음담패설의 수위는 점점 높아졌다.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에 들렀을 때였다. 강아무개 팀장이 테이블 맨 끝에 앉은 계약직 직원 김희지(23․가명)씨를 불렀다. "희지야, 결혼하자." 당황한 희지씨가 "네?"라고 반문하자, "오빠가 결혼하자면 하는 거야"라고 답했다. 서비스용역실장도 거들기 시작했다. 같은 여성인 실장은 "둘이 오늘 결혼하면, 합방 콜?" "2세, 2세"를 외치며 박수를 유도했다. 계약직 여성 중에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를 지켜본 최씨는 결국 체하고 말았다.

이날 오후 참다 못 한 최씨가 계약직 직원을 대표해 여성 주무관에게 도움을 청했다. 같은 여성인데다 모든 광경을 목격했으니 자신을 지지해 줄 거라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되돌아 온 대답은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말라"는 것이었다. 최씨는 "그럼 정규직 공무원들과 함께 성희롱 예방교육이라도 받을 수 있도록 위에 건의 해달라"고 요청했다. 석 달이 지나도록 성희롱 예방교육은 이뤄지지 않았다.

여성 공무원들이 외면한 상황에서 성희롱의 강도는 점점 세졌다. 최씨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는 접대부가 된 기분이었다"고 털어놨다. 계약직 직원들을 상대로 "OOO야, 잔 비었잖아, 술 따라드려야지" "이분은 인기가 많으니 줄 서서 따라야 해" 등의 말이 공공연하게 오갔다. 용역실장은 혼자 앉아있는 공무원에게 "왜 혼자 앉아계세요?"라고 묻기도 했다. 묘한 뉘앙스의 말이었다.

이 자리에서 50대 5급 공무원인 이아무개씨가 술을 따르는 직원에게 "취했는데 자꾸 술을 주면 역사가 이루어진다, 나랑 오늘 역사를 이루려는 거냐"고 말했다. 앞에 앉아 있던 최씨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동료를 대신해 항의했지만 분위기는 바뀌지 않았다. 결국 저녁 식사를 마치고 향한 노래방에서 이아무개씨가 계약직 여성 두 명을 성추행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평소에 계약직 직원을 모아놓고 '상명하복'을 강조하는 분위기에서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12년 발간한 '성희롱 사건 백서'를 보면 '상명하복' 문화가 성희롱의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지난 2005년부터 2012년 6월까지 국가인권위원회가 처리한 성희롱 사건 1152건 중 중간관리자 이상이 평직원을 성희롱한 경우가 전체의 80.2%를 차지한다. 수직적 권력관계 안에서 주로 발생한다는 뜻이다.

또한 피해자의 연령대는 20대가 36.3%로 가장 많고, 30대(25.3%), 40대(12.6%)의 순이다. 연차가 낮은 20~30대가 전체 피해자의 74.5%나 된다. 최근에는 비정규직, 파견, 인턴 등 일터 안 고용불안정을 호소하는 '약자' 크게 늘어 직장 내 성희롱이 발생하기 쉬운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외면한 중간관리자... "네가 처리해야 할 일"

계약직들은 사과를 받아내는 일도 쉽지 않았다. "결혼하자" "합방" 따위 말에 이어 노래방에서 성추행까지 당한 희지씨가 워크숍에서 돌아온 후에 서비스용역실장을 찾아갔다.

동물원을 찾는 중년 남성을 마주칠 때마다 그날 노래방에서 자신의 손을 잡아끌고, 어깨와 허리 등을 쓰다듬은 이아무개 과장이 떠올라 화가 치밀었다. 워크숍에서 처음 본 과장은 희지씨가 손사래를 치며 싫다는 의사를 강하게 피력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상처가 컸던 희지씨는 서비스용역실장에게 있었던 일을 알리고 꼭 사과를 받고 싶다고 말했다. 도움을 주겠다던 실장은 며칠 뒤 태도를 바꿨다. 실장은 "나도 그 분 밑에 있는 처지인데, 사과하라고 하면 자존심이 상하실 거"라며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건넸다. 실장은 "네가 처리해야 할 일"이라고 선을 그었다. 희지씨는 지난 27일 <오마이뉴스>와 통화에서 "피해자가 보호받지도 못하고 대면하기 껄끄러운 가해자에게 직접 사과를 받아내야 하는 상황이 황당했다"고 털어놨다.

희지씨가 과장에게 전화를 걸기 전 황당한 일이 또 있었다. 함께 일하는 동료 두 명이 자신을 부르더니 "이번 일을 조용히 묻고 다음에 이런 일이 또 발생하면 그 때 터트리는 게 어떻겠느냐"고 설득을 한 것이다. 희지씨가 완강한 태도를 보이자 동료들은 "사실 지금 너 때문에 난리가 났다" "팀장과 실장이 회의를 했고, 우리를 시켜 네가 과장에게 전화를 못하도록 말리라고 했다"고 털어놨다. 더 이상 일 할 수 없는 환경이라고 생각한 희지씨는 과장의 사과를 받고 퇴사했다. 입사 3개월 만의 일이었다.

희지씨가 퇴사한 후 사내 분위기는 묘하게 흘렀다. 가해자 중 한명으로 지목된 강아무개 팀장(6급)은 매표소 직원이 다 모인 자리에서 "공무직 다 되는 줄 아느냐, 맘에 안 들면 공무직이고 뭐고 못되게 하겠다"고 말했다. 용기 내 문제제기한 최아무개씨가 속한 셔틀버스팀을 지칭하며 '조만간 손 보겠다'는 식의 말도 했다. 그 자리에 있었던 또다른 성추행 피해자 이지혜(가명)씨는 27일 <오마이뉴스>와 통화에서 "속으로 '절대 입을 열지 말아야 겠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정규직 공무원과 계약직 직원 사이에 갑-을 관계가 확실했던 이곳에서 '성희롱 예방교육'을 요구한 최아무개씨는 완전히 상사의 눈 밖에 난 존재가 돼버렸다. 최씨는 "셔틀버스 운행 순서를 무시하고 사람을 빼가는 바람에 대신 운전대를 잡는 일이 많았고, 점심시간도 주지 않고 매표소 지원근무를 시키기도 했다"고 토로했다.

지난 10월 초에는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떠난 동생의 장례를 마치고 돌아온 최씨를 말 한마디 없이 도움터(안내소)로 발령한 일도 있었다. 최씨를 대신할 직원도 이미 채용한 상태였다. 최씨는 인사 발령이 부당하다고 항의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성희롱 가해자로 지목된 강아무개 팀장에게 "잘라 버리려다가 도움터라도 보내준 걸 감사히 여겨라, 거기서 입 다물고 살아"라는 폭언을 듣기도 했다. 사람대우도 못 받는 존재라는 생각이 든 최씨는 설움이 복받쳤다.

"계약직이 5급 공무원 잘라냈다"... 피해자에게 쏟아진 힐난

직장 내 성희롱을 당한 대부분의 피해자들이 가해자보다 피해자에게 쏟아지는 힐난으로 고통스러워 한다. 서울대공원 피해자들 역시 "가정파괴범"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 SBS '현장21'이 보도한 화면. 직장 내 성희롱을 당한 대부분의 피해자들이 가해자보다 피해자에게 쏟아지는 힐난으로 고통스러워 한다. 서울대공원 피해자들 역시 "가정파괴범"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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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욕감을 느낀 최씨는 회사 안에서 성희롱과 부당한 인사 발령 등을 더 크게 알리기 시작했다. 팀장보다 더 높은 직급인 총괄팀장을 거쳐 관리부장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최씨가 총괄팀장에게 관리부장의 내선번호를 묻자 곧바로 용역회사 직원에게 전화가 왔다. 최씨는 "용역직원에게 '이렇게 일을 크게 만들면 도와드릴 수가 없다' '복종을 하시든가, 나가시든가'라는 말을 들었다"고 토로했다.

최씨가 불이익을 감수하고 관리부장에게 면담요청을 하고 나서야 서울대공원에서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부장과 면담 직후 서울대공원은 가해자로 지목된 5급·6급 공무원을 다른 팀으로 보냈고, 서울시 시민인권보호관이 조사에 착수한 직후인 19일에 대기발령을 시켰다.

대기발령이 난 두 공무원은 현재 서울대공원에서 자리를 비운 상태라 입장을 들을 수 없었다. 대신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서울시 시민인권보호관에게 물었으나 "조사 중인 사건에 대해서는 밖에 알리지 않는 게 원칙"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다만 두 공무원은 13일 한 매체의 보도에서 각각 "기억에 나지 않는다"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며 혐의를 부인한 바 있다. 서울대공원 측은 28일 <오마이뉴스>와 통화에서 "현재 피해자와 가해자의 분리하기 위해 대기발령한 상태이며 조사가 끝난 뒤 징계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보복이 두려워 피해 사실을 함구하던 계약직 동료들도 서울시 시민인권보호관과 면담에서 피해사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건이 원만히 해결되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최씨는 "보호관 면담이 시작되자 용역 실장이 직원들을 붙잡고 '뭘 물어 봤느냐' '직접 본 게 아니면 답하지 말라'는 식으로 입단속을 시켰다"고 주장했다.

또한 사내에는 최씨와 사과를 받고 퇴사한 희지씨를 향한 근거 없는 이야기가 떠돌기 시작했다. "계약직이 5급 공무원 잘라냈다" "이번 일로 이아무개(가해자)가 이혼위기다, OOO(글을 올린 동료)는 가정파괴범이다"라는 힐난이었다. 하루는 홍보팀 직원이 최씨를 찾아와 "적당히 하라"며 그와 기자를 연결해 준 사람이 누구냐고 캐묻기도 했다.

최씨는 "피해 당사자가 오히려 가해자로 몰려 마녀사냥을 당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의 요구는 간단하다. 가해자와 이를 동조한 직원을 징계하고 재발방지 대책을 세워달라는 것이다. 당연한 요구를 하고도 가혹한 처지에 놓인 최씨는 일단 내년 2월, 공무직으로 전환될 때까지 버텨볼 생각이다. 하지만 정규직으로 바뀐다고 해서 지금의 상황이 나아질 거 같진 않다. 혼란스러운 그는 "길을 잃은 느낌"이라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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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서울대공원, #성추행, #성희롱, #비정규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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