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웨이크닝> 초반 오프닝을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오지요.

1914년에서 1919년에 걸친 전쟁과 독감으로 인해 
영국에서만 백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결론.
지금은 유령의 시대이다.

전쟁과 독감이 지독한 고통의 시대에는 이런 것들이 유령으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전쟁의 시대에는 공습이, 기아 난민의 시대에는 지독한 배고픔이, 독감이나 에이즈의 시대에는 질병이 유령으로 인식되기도 하지요.

재미있는 것은 과학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도 여전히 공포 영화 속의 귀신, 유령을 보며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전쟁, 질병, 배고픔, 추위 혹은 어떤 부족민들에겐 짐승 같은 것들이 과거에는 유령이 될 수 있었더라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유령으로 다가오는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요. 어쩌면 공포영화를 보는 맥락도 그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어웨이크닝] 영화 초반 오프닝은 전쟁과 독감을 유령으로 묘사한다.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라는 얘기에 주목하자.

▲ [어웨이크닝] 영화 초반 오프닝은 전쟁과 독감을 유령으로 묘사한다.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라는 얘기에 주목하자. ⓒ 나이너스엔터테인먼트


유령으로 다가오는 것들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선 먼저 어째서 호러물을 관람하는지부터 살펴봐야합니다. 공포 영화 속에서 우리는 현실 속 접하기 힘든 두려운 사건들과 만나고 공포를 느끼지만, 동시에 자신들은 안전하게 브라운관 바깥에 앉아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아무런 해도 입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에 이를 만족스럽게 즐길 수 있지요. 안전하게 동물원의 사자를 관람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동물원의 사자를 통해 위험한 맹수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하는 것처럼 호러물도 위험한 상황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하나의 요소라는 얘기지요. 허나 동물원과는 다르게 공포영화 관람을 끝마쳤다고 하여 현실로 돌아가는 순간 두려움이 모두 증발하는 것은 아닙니다.

유년기 시절에 저녁까지 주말의 명화에서 틀어주던 공포 영화를 시청하고 여전히 영화가 끝난 뒤에도 이불 속에 들어가 바깥으로 발이 빠져나가면 혹이나 귀신이 잡지 않을까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발발 떨어본 기억이 있다면, 단순히 어떤 만족감을 위해 호러물을 시청한다는 것이라고 결론내리기는 힘듭니다.

물론 잔인성 등을 통해 동물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을 충족시킨다거나, 혹은 롤러코스터를 오르내리는 것과 같이 짜릿한 공포의 상승 하향 때문에 감상하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허나 그 정도 되려면 진짜 공포나 호러 마니아가 돼야 가능하거든요. 일부에게만 적용시킬 수 있는 경우는 잠시 제외합시다. 게다가 동물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을 충족시키는 쪽은 공포영화를 즐긴다기보다 고어물을 더욱 즐긴다고 보는 게 맞겠지요.

고어 마니아들 사이에서 유명한 영화 [기니어피그] 이 정도를 보는 건 공포마니아라기 보다는 고어마니아라고 봐야한다.

▲ 고어 마니아들 사이에서 유명한 영화 [기니어피그] 이 정도를 보는 건 공포마니아라기 보다는 고어마니아라고 봐야한다. ⓒ 오렌지하우스


이제 유령으로 다가오는 것들은 어떤 특징이 있는지 알아봅시다. 호러물을 관람하는 사유와 유령으로 다가오는 것의 특징을 각각 나누어 생각하고 그 후에 합치면 공포의 본질을 어느 정도 들여다볼 수 있을 겁니다. 대체적으로 시대를 대표하는 공포들의 특징은 이렇습니다.

1. (사건 등이) 3인칭 관찰자의 시점에서든, 혹은 당사자가 되는 1인칭 시점에서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발생한다. 물론 이것은 영화뿐만 아니라 실제 사건에도 적용이 된다.

2. 귀신, 혹은 유령처럼 미지의 것이어야 한다. 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는 정체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질병 등도 미지의 것으로 인식될 수 있다.

3. 만일 미지의 것이 아닐 경우 그것의 공포 원인이 설명되지 못해야 한다. 즉, 공포의 대상이 미지의 것이 아닌 현실의 명확한 것이라면 그것의 사유나 그것으로부터 발발되는 결과들이 미지의 것이 되어야 한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소음이라든지 이유 없는 건축물의 붕괴 등도 이에 해당한다.

4. 그러므로 시대적 공포의 대상은 현 시대에 과학적으로 명확히 밝혀지지 못한 대상, 혹은 우리가 대상의 의중을 뚜렷이 파악할 수 없는 것들이다.

5. 만일 미지의 것도 아니며 대상의 의도를 명확히 파악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포를 느낄 수 있다면 공포의 대상으로부터 오는 피해의 정도가 전혀 예측 불가능할 것.

사실 5번의 사유를 넣을지 말지 상당히 고민하였는데, 사람들이 귀신을 두려워한다고 했을 때 반드시 생명의 위협을 느끼거나 당장 죽을 것만 같아 두려움을 느끼진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지의 것도 아니며 대상의 의도를 명확히 파악할 수 있음'이라는 보충을 삽입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5번에 해당되는 것은 전쟁 정도가 될 수 있겠네요.

공포의 대상이 결정되는 사유들을 살펴보다 보면 재미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통 공포의 대상을 보면 시대의 과학적, 혹은 문화적 발전 정도를 가늠해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아직 정복되지 못한 것들에서 공포를 느끼는 인간의 특성 때문입니다. 질병이 정복되지 못한 시대에는 감기, 콜레라가 유령이 되기도 합니다만 현대에선 이것들은 그저 질병 자체로 인식되는 것들이지요. 더 과거로 올라가서 숲과 어둠이 두려웠던 시절에는 숲은 미지의 공간이고 으르렁거리는 짐승이 유령이 되기도 했습니다. 유령은 곧 환경을 대표하는 미지가 채택되던 좋은 사례지요. 그렇다면 현대를 대표하는 공포들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여전히 그 존재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귀신(고스트) 같은 것들, 전기톱을 든 살인마 등등은 과거로부터 아직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경제대공황, 취업대란 혹은 청년 실업, 환경문제 등으로부터 오는 공포들은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것들일까요?

오래전에 거품 청년이라는 유행어가 생겨난 이유도 생각해보면 생리적으로 늙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 이상의 심리적 공포를 반영한 것이겠지요. 기대수명이 짧았던 시대에는 어쩌면 거품청년이라는 단어에서 느낄 수 있는 공포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과학이 발달하고 인간의 수명이 늘어나며 생긴 새로운 공포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지요.

불경기는 과거 원시시대 배고픔의 연장선상에서 오는 공포일 수도 있겠지만 이것에 인지 요소를 합쳐 가게 주인이 출근을 하며 길거리의 상점이 모두 손님 없이 텅텅 비어있는 것을 보았을 때의 공포는 후천적으로 습득된 공포일 것입니다. 결국 원시적 공포요소에서 후천적으로 학습된 문화적 요소가 결합되어 공포의 대상도 점점 발전 되어가거나 새로 창출되고 있습니다.

어쩌면 텔레그램으로 대표되는 사이버망명과 같은 사태도 누군가의 시선으로부터 두려움을 느끼는 원시적 요소와 문명의 스마트폰 기술이 만나 이뤄낸 결합공포의 요소일 수 있습니다. 숲속에서 맹수의 시선을 피하기 위한 위험회피의 발전형일수도 있는 거죠. 사실 제가 위에서 언급한 공포의 특성에 일치하는 부분이 상당히 있지요. 피해대상이 분명한 본인이 아닐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지며, 감시로 인한 피해의 정도가 예측불가능하기도 하지요.

사실 '검찰'이라는 감시의 대상도 너무나 추상적이어서 미지의 것으로 분류하여도 무방할지 모릅니다. 시민들은 명확히 누가 감시하는지 알 수 없거든요.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공포의 대상은 시대의 과학적, 문화적 발전 정도를 가늠해볼 수 있지요. 정부의 감시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것은 과학적 발전이 상당하다거나 문화적 발전이 상당히 더디다는 것을 나타내진 않을까요? 물론 명확한 답은 각자 내리실 거라 생각합니다만.

비약이 너무 심했나요? 하지만 현실에서 실재로 발생하는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패러디를 통한 호기심을 유발하는 사례를 보면 조금은 공감하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얼마 전에 아홉시 반 주립대학에 붙었던 대자보가 그런 패러디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마치 '무서운 영화' 시리즈 같군요. 실제로 존재하는 공포를 이용하여 정반대의 감정을 유도할 수 있지요. 공포물을 보지 못하는 사람도 패러디물을 통해 공포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 대자보가 현실 공포를 도저히 두고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나온 '무서운 영화' 같군요. 사방팔방이 공포의 대상뿐이었다면 사람들은 눈 둘 곳이 없었겠지만 저런 패러디 덕택에 숨통이 트이는 듯합니다. 사실 현시대 공포의 대상이 정치적 집단이 된다는 것은 아주 심각한 얘기입니다. 본인들이 공포의 특성을 갖추기 때문에 패러디 현상이 발생한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하는 거지요. 만일 행정부의 수반이 패러디를 단순한 모욕으로 느낀다면 그는 공포가 발생하게 되는 사유를 절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일 겁니다.

아홉시반 주립대학 대자보 추상적인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공포 극복의 방안이 아니었을까?

▲ 아홉시반 주립대학 대자보 추상적인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공포 극복의 방안이 아니었을까? ⓒ 아홉시반 주립대학


어쩌면 20년 뒤, 혹은 아주 가깝게는 5년 뒤에는 정치에 대한 공포 영화가 출시될지도 모릅니다. 명확하게 단체의 속성을 파악할 수 없는 대상이, 누군가를 검열할 수 있는데 그 대상이 반드시 본인은 아니지만 나일 수도 있을 경우에 오는 두려움 같은 것이 소재가 되어서 말이지요. 얼마나 많은 세월이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귀신같은 것은 없다!'라고 명확히 밝혀지는 날이 온다면 우리가 두려워했던 소복 입은 처녀, 몸이 뒤틀린 유령이 공포 영화의 소재로 등장하는 일은 더 이상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때는 거대한 정치집단이 소재로 등장하며 사람들을 오싹하게 만드는 공포영화의 단골 소재가 될지도 모르지요. 극장에서 심장이 약한 여자가 애인 품에 안겨 이렇게 소리칠지 모릅니다.

"꺄악, 검찰이다."


공포 특성 시대 인식 호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