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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요즘 소위 '사이버 망명'으로 불리며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모바일 메신저 '텔레그램(Telegram)'은 자신의 휴대폰에 전화번호가 저장된 사람이 이 앱을 설치할 경우 '누구누구가 텔레그램에 합류했다'고 메시지를 띄워준다. 1일 저녁 이 메시지가 하나 떴다. 대검찰청 관계자였다. 순간, 잠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뭐지? 대검 검사도 사이버 망명인가?

물론 단지 휴대폰에 이 앱을 깔았다는 이유만으로 사이버 망명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하도 이야기가 많이 되니 호기심 차원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또다른 이유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하다. 대검 관계자조차 이 앱을 깔고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는 점이다. 그만큼 텔레그램의 상승세가 심상치 않다.

텔레그램에 입성한 대검 검사

대검 관계자가 텔레그램에 합류한 다음날인 2일 오전 서울중앙지검은 재밌는 사건 하나를 발표했다. 일명 '이재만 사칭 사기사건'. 이재만이 누구인가. 현 청와대 총무비서관이자, 박근혜 대통령을 국회의원 시절부터 모셔온 보좌관 출신으로, 소위 실세그룹 '만만회(박지만-이재만-정윤회)'의 한 명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런데 누군가 이런 이재만을 사칭해 사기를 친 것이다.

사건 개요는 이렇다. 취업하기 힘들었던 50대 조아무개씨는 2013년 7월 초 박영식 대우건설 사장에게 전화를 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청와대 총무비서관 이재만입니다. 조○○ 장로를 보낼테니 취업을 시켜주시면 좋겠습니다. 내일 3시에 보내겠습니다."

다음날 오후 3시 조씨는 대우건설 사장실에 갔고, 학력 등을 허위로 작성한 응시원서를 제출했다. 결과는 대성공. 얼마 후 대우건설 사무직으로 채용됐다. 직급은 부장급.

약 1년간 근무하다 퇴사한 조씨는 이번에는 KT의 문을 두드렸다. 올해 8월 중순 황창규 회장에게 전화를 했다. "나는 청와대 총무비서관 이재만입니다. 사람을 보낼테니 만나보고 원하는대로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역시 다음날 오후 3시 조씨는 회장실로 가서 이렇게 말하며 허위 응시원서를 제출했다.

"나는 청와대 총무비서관의 소개로 온 조○○입니다. VIP(대통령을 지칭-기자 주) 선거시 비선조직으로 활동했고, 10여 년 전부터 VIP를 도와왔고, 제 집에도 방문한 적이 있으며, 현재도 VIP를 한달에 1~2번 면담하고 직언을 하고 있습니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검찰 공소장에는 황 회장이 취업절차를 진행시켰다고 나와있는데, KT의 설명에 따르면 조씨를 수상히 여긴 황 회장이 비서실에 신분확인을 지시했고 이후 청와대에 신고했다. 어쨌든 '이재만 사칭 사기'는 이렇게 두 번째 성공의 바로 문턱에서 들켜버렸다.

"나 이재만인데" 전화 한 통화로 사장실·회장실로 직통

텔레그램 열풍과 이재만 사칭 사기사건 - 전혀 별개인 이 두 사건에 공통점이 있다. 바로 권위주의다. 두 사건은 2014년 10월 현재 한국사회가 과거 권위주의 시절로 완벽하게 퇴행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텔레그램 열풍이 지난달 18일 검찰의 '사이버상 허위사실 유포 엄정 대응' 발표로부터 촉발됐고, 이 발표는 이틀 전 박근혜 대통령의 "국민을 대표하는 대통령에 대한 모독적인 발언이 그 도를 넘고 있다"는 발언에서 시작됐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대검 차장, 형사부장, 사이버범죄수사단장과 법무부, 안전행정부, 미래창조과학부, 방통위, 경찰청 관계자들, 그 뿐 아니라 카카오톡, 다음, 네이버, SK컴스 등 민간 IT 업체 관계자들까지 불러모아 대검찰청 15층 중회의실에서 열렸던 '사이버상 허위사실 유포사범 유관기관 대책회의'도 과거 독재 권위주의 정권 시절 익히 보았던 모습과 많이 닮았다.

'모독', '허위사실' 등 범죄적 냄새를 물씬 풍기는 단어를 동원하고 있지만, 국민들은 이미 그 배경에 있는,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제어하겠다는, 지독한 권위주의적 발상을 간파하고 있다. 텔레그램 열풍은 그에 대한 저항이자 조롱이다. 보안성은 강하다지만 한글화가 되어있지 않아 국내 사용자에게는 '듣보잡'에 가까웠던 텔레그램이 2일 현재 애플 앱스토어 다운로드 순위에서 카톡을 제치고 1위다. 지난달 24일 1위에 올랐으니 벌써 꽤 됐다.

57년 전, 57년 후

이재만 사칭 사기사건은 독재 권위주의 사회에서 전형적으로 벌어지는 현상이다. 사실 이 사건은 1957년 한 청년이 지방도시를 돌며 자신을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인 이강석이라고 사칭했던 '가짜 이강석 사건'의 완벽한 재현이다.

57년 전 대통령의 양아들이라는 한마디에 경찰서장과 군 사단장, 시장, 군수 등이 찾아와 잘 보이기 위해 아양을 떨었고, 특급호텔, 술파티, 경호차, 뇌물까지 등장했다. 57년 후 정권 실세를 사칭한 전화 한 통화에 대기업의 사장실과 회장실 문이 바로 열렸고, 50대 나이에 그 어렵다는 대기업 취업까지 직행했다. 해당 회사의 고위 간부는 조씨에게 전화를 걸고, 따로 만나 돈도 건네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57년 전 가짜 이강석은 단 사흘만에 사기 행각이 들통났지만, 57년 후 가짜 이재만은 무려 1년 넘게 신분을 속이고 근무할 수 있었다.

지금 홍콩에서는 "한국처럼 희생을 각오하고 있다"며 민주화를 위한 시위가 한창이다. 그런데 정작 한국은 과거 독재 권위주의 시절로 되돌아가고 있다. 정권 핵심부는 57년 전 가짜 이강석을 낳았던 진짜 이강석의 마지막이 어땠는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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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청와대 이재만인데" 전화 한 통에 대기업 취직


태그:#텔레그램, #이재만, #권위주의, #검찰,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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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선임기자. 정신차리고 보니 기자 생활 20년이 훌쩍 넘었다. 언제쯤 세상이 좀 수월해질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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