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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는 집의 조건은 이랬다. 보증금은 낮되 월세는 비싸지 않을 것. 1년 계약이 가능할 것. 풀옵션일 것. 결론. 그런집은 없다.
 찾는 집의 조건은 이랬다. 보증금은 낮되 월세는 비싸지 않을 것. 1년 계약이 가능할 것. 풀옵션일 것. 결론. 그런집은 없다.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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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필요했다. 미국에 있는 남편의 가족을 만나 간략한 결혼식을 올린 후다. 1년 후엔 남편과 장기 여행을 떠날 계획이었다. 그 사이의 시간을 채워줄 작은 공간이 필요했다. 어쩌면 여행보다 더 중요한 여행 전의 시간. 그 공간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음식을 하고, 청소도 하고, 여행 계획도 짜며 소소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겠지.

살림살이가 거의 없는 작은 집이겠지만, 잠시 머물다 떠나겠지만, 앞으로의 짧은 시간이 담길 집을 상상하니 마음이 흐뭇했다. 선선한 밤이면 남편과 동네 산책을 나갈 테다. 친구가 오면 요리도 해줄 거고. 커피가 맛있는 조용한 카페를 찾아 자주 놀러 가야지. 

보증금은 낮고 월세는 싼 집? 그런 집 없어요

찾는 집의 조건은 이랬다. 보증금은 낮되 월세는 비싸지 않을 것. 1년 계약이 가능할 것. 풀옵션일 것. 몇 주간 발품을 팔았다. 대부분 2년 계약에 보증금이 많거나, 보증금이 적당하면 월세가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비싼 곳뿐이다.

"보증금 천만 원이 안 되면 방 자체가 없다니까?"
"천만 원은 안 돼. 집주인이 보증금으로 천만 원을 가져가서 다시 돌려준다는 보장이 있어?"


미국에서 온 남편에게 '전세'란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었다. 전세는 둘째치고, 웬만하면 천만 원이 넘는 보증금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했다. 미국엔 전세 개념 자체가 없고, 보증금이라고 해도 한 달 치 월세를 내는 정도다.

남편은 보증금이 법적으로 확실히 보호되는 것인지 알고 싶어했다. 덕분에 임대차계약법도 들여다보고, 방 구하는 사람들의 인터넷 커뮤니티에 가서 이것저것 들여다보았다. 나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보증금에 대한 나의 결론은 언제나 이랬다.

"남들도 다 그렇게 계약해! 보증금을 못 돌려받는다면 누가 집을 계약하겠어!"
"설명해봐. 전셋값이 1억이라고 하면, 집 나갈 때 다시 1억을 돌려주는 거잖아. 맞지? 그럼 그 집주인은 그 1억으로 1년 동안 뭘 하는데? 그냥 가지고 있어?"
"뭐 은행에 넣고 이자를 받거나 투자를 하거나…."
"투자! 생판 남한테 내 돈 1억을 쥐어주고, 내 돈으로 투자라도 해서 쫄딱 망하면? 내 보증금은 법적으로 보호받아?"
"아, 몰라. 지금까지 보증금 못 돌려받았단 소리는 못 들어봤다고."


남편이 의심이 많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지난 3년간 한국에서 영어 강사 생활을 하고 못 받은 체불임금이 천만 원을 웃돈다. 퇴직금은 제외다. 월급에서 공제해 간 국민연금도 미납이다. 노동부에 고소도 해봤다. 고소를 취하하는 것이 좋다는 조언을 들었다. 강사 3명의 수개월 치 임금을 체납한 원장이 소송에서 패소한다고 해도, 내야 하는 벌금은 고작 100만 원 수준이라는 것이었다.

국민연금도 찾아갔다. 사측에서 내지 않은 세금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은 달리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기본적인 것들이 너무나 쉽게 어겨졌다. 피해에 대한 보호나 보장은 허술했다. 내 고집대로 몇천만 원짜리 전셋집을 알아보자고 우기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월급의 반 가까이 되는 월세를 내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보증금을 2천만 원으로 올리면 월세 40만 원 정도에 구할 수 있는 방들이 꽤 있었다. 보증금 1천만 원이면 월세는 60만 원 수준. 남편의 바람대로 보증금을 5백만 원대로 낮추면, 월세는 70만 원 이상으로 뛴다. 우리 둘의 요구를 다 만족시키는 집은 존재하지 않았다. 한 달 가까이 집 구하는 데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이젠 지친다.

"안 해. 이젠 못해. 그냥 보증금 천만 원으로 해."


아무리 남편의 심정을 이해하고 양보해도 보증금 천만 원 이하의 집을 찾기는 어려웠다. 사실 서울 부동산 시세에서 보증금 천만 원은 비싼 것도 아니었다. 마침 마음에 드는 9평짜리 오피스텔을 찾은 참이었다. 보증금 천만 원에 월세 55만 원. 사람들에게 물어 조언을 얻은 대로 등기부등본도 확인했다. 등기부등본은 깨끗했다. 부동산중개료 25만 원을 낸 대가로 2억 원짜리 보증보험 증서도 받았다. 계약서와 깨끗한 등기부등본. 부동산 보증보험. 서류가 두둑해지니 믿음도 두둑해졌다.

"이게 등기부등본이라는 건데. 이 집에 압류 잡힌 게 없다, 그런 뜻이래. 이건 부동산 보증보험. 2억 원까지 보장해 준대."
"2억 원까지 뭘 보장해 주는데? 집주인이 보증금을 안 주면 부동산에서 주는 거야?"
"그건…. 몰라. 아무튼, 부동산에서 천만 원짜리 보증금을 못 받는 경우는 없다고 걱정하지 말래."


남편은 천만 원이나 되는 돈이 남의 통장에 떡하니 입금된다는 사실을 여전히 못 미더워했다. 하지만 더 이상 집을 구하느라 에너지를 소모할 순 없었다. 집 계약이라면 다 하는 거 아닌가. 임대차계약법이라는 것도 있지 않나. 법을 허투루 만든 건 아닐 테다.

찾는 집의 조건은 이랬다. 보증금은 낮되 월세는 비싸지 않을 것. 1년 계약이 가능할 것. 풀옵션일 것. 몇 주간 발품을 팔았다. 대부분 2년 계약에 보증금이 많고 월세가 적당하거나, 보증금이 적당하면 월세가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비싼 곳뿐이다.
 찾는 집의 조건은 이랬다. 보증금은 낮되 월세는 비싸지 않을 것. 1년 계약이 가능할 것. 풀옵션일 것. 몇 주간 발품을 팔았다. 대부분 2년 계약에 보증금이 많고 월세가 적당하거나, 보증금이 적당하면 월세가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비싼 곳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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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히지 않는 냉장고, 주저앉은 세면대, 이게 풀옵션?

집에는 문제가 많았다. 화장실 문은 망가져서 닫을 수가 없었다. 화장실 세면대는 당장에라도 주저앉을 것처럼 달랑거렸다. 에어컨은 작동하지 않았고 냉장고 역시 문이 닫히지 않았다. 바닥에는 뭔지 모를 검은 얼룩이 가득했다. 계약한 집은 풀옵션을 조건으로 하는 집이었다. 화장실도, 싱크대도, 에어컨도, 냉장고도 작동하지 않을 거라면 풀옵션이 아니지 않나.

"계약서에 '본 계약은 현 상태 그대로의 계약임'이라고 써놨잖아요. 자꾸 이렇게 전화해서 이거 고쳐달라 저거 고쳐달라 하면 어떡해요?"


집주인은 현 상태 그대로 계약을 한 거니, 자기가 수리해 줄 의무는 없다고 주장했다. 집 상태를 본 부동산 사장이 집주인에게 전화했다. '현 상태'는 살 수가 없는 상태다, 살게는 해 주고 집을 빌려 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설득했다. 간곡히 부탁한 끝에 화장실 문과 싱크대를 수리했다. 에어컨과 냉장고는 우리가 알아서 고쳤다. 집주인은 더 이상 관여하고 싶지 않으니 다른 문제는 거론하지 말라고 했다. 나에게 짜증이 난 듯했다.

처음으로 집을 계약한다고 하니 이것저것 충고해 주던 회사 선배의 말이 생각났다. 집주인 성질을 건드려서 좋을 거 하나도 없다. 임대계약은 집주인이 '갑'인 관계이다. 웬만하면 비위를 맞춰라.

임대계약은 그저, 살 만한 집을 제공하고 그에 대한 대가를 지급하는 계약 관계 아니었던가. 화장실 문이 안 닫히는 대로 세면대가 주저앉은 대로 그냥 살았어야 하나. 뭔가 잘못한 기분이 들었다. 정당한 요구를 했을 뿐인데. 찜찜한 마음에 뒤통수가 시큰했다.

1년 후 장기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살, 작은 공간이 필요했다. 작은 집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음식을 하고, 청소도 하고, 여행 계획도 짜며 소소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겠지. (*사진은 실제 살던 원룸과 관계없음)
 1년 후 장기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살, 작은 공간이 필요했다. 작은 집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음식을 하고, 청소도 하고, 여행 계획도 짜며 소소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겠지. (*사진은 실제 살던 원룸과 관계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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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계획했던 장기 여행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집 계약을 끝내기 위해 월세와 관리비를 정산했다. 다음 세입자에게 누가 되지 않기 위해 청소도 열심히 했다. 방바닥부터 화장실 거울까지. 집안이 반짝반짝해졌다.

정산을 다 하고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엌 싱크대 하수관에서 물이 새네요. 계약서에 '현 상태 유지'를 조건으로 한다고 쓰여 있는 거 아시죠? 보증금은 하수관 수리비 제하고 드리죠." 


부엌 붙박이장 안에 붙어 있는 수도관? 그건 집의 장기적인 유지, 관리의 문제 아닌가? 우리가 사는 동안 냉장고가 고장 났으면? 30년 된 오래된 냉장고라도 우리가 살 때 고장 난 거니 우리 책임인가? 덜렁거리던 세면대가, 하필이면 우리가 사는 동안 떨어져 깨지면 그것도 우리가 물어야 하나? 집에 들어갈 땐 '현 상태 유지'의 계약이라는 이유로 기본적인 관리나 정비는 신경도 안 쓰더니, 나갈 때가 되니 수십 년간 붙박이장 안에 붙어 있었을 수도관을 수리해내라니.

"그건 저희가 물어야 할 게 아닌 것 같아요."
"계약서 못 봤어요? '현 상태 유지.' 원래대로 돌려 놓고 가야죠."
"수도관이 오래돼서 생기는 문제잖아요? 고작 몇 개월 세들어 산 저희가 책임질 일은 아니죠."
"하여간 또박또박 말대답은 잘해. 아 됐고. 그럼 수리비 못 내겠다. 이건가요? 그럼 현 상태 유지 조건을 못 지키겠다는 거네. 저도 보증금 돌려줄 필요 없겠네요."


집주인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며 전화를 끊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회사 선배의 말이 생각났다. 집주인은 갑이다. 집주인의 성질을 건드려서 좋을 게 없다. 집주인은 보증금을 쥐고 있다. 내 태도가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보증금을 쥐고 나를 쥐락펴락할 힘이 충분히 있다. 천만 원. 이십 대인 우리 인생을 좌지우지하기에, 앞으로의 계획을 모두 망쳐놓기에 충분한 돈이었다.

"수리비는 별도로 이야기하시죠. 보증금은 일단 입금해 주세요."
"별도로 얘기하긴 뭘 별도로 얘기해."
"보증금은 돌려 주셔야죠. 지금 제 돈 쥐고 협박하시는 꼴이잖아요."
"월세가 얼마였죠?"
"55만 원이요."
"허, 참. 고작 55만 원 하는 방에 살면서 뭐 그렇게 말은 많은지."
"55만원 저한텐 큰돈이고요. 그리고 55만 원짜리 방에 사는 거랑 보증금이랑 무슨 상관이죠?"


이젠 대놓고 모욕이다. 아쉬운 사람이 약자다. 내 보증금을 쥐고 흔드는 집주인은 아쉬울 게 없는 강자다. 정말 우리 돈 천만 원을 떼어갈까 싶어, 하루에도 몇 번씩 오금이 저렸다. 집주인은 내가 하는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전화기 저쪽에서 나 혼자 떠들도록 내버려 두었다. 전화를 스피커폰으로 돌려놓고, 밥그릇을 덜그럭대며 밥을 먹었다. 모욕감이 밀려왔다. 피가 거꾸로 솟았다.

회사 선배는 한국 사회에선, 특히 부동산 계약 같은 일에선 여자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으니, 나이가 어느 정도 든 남자에게 부탁해서 조율하라고 충고했다. 그 말에 더 화가 났다. 나는 돈을 내고 공간을 사용하는 계약을 한 것뿐이다. 계약은 끝났고, 돌려받아야 하는 보증금을 돌려받고자 하는 것뿐이다. 여자인 게, 세입자인 게 무슨 상관인가.

아쉬운 사람이 약자다. 내 보증금을 쥐고 흔드는 집주인은 아쉬울 게 없는 강자다. 정말 우리 돈 천만 원을 떼어갈까 싶어, 하루에도 몇 번씩 오금이 저렸다. (* 사진은 실제 살던 원룸과 관계없음)
 아쉬운 사람이 약자다. 내 보증금을 쥐고 흔드는 집주인은 아쉬울 게 없는 강자다. 정말 우리 돈 천만 원을 떼어갈까 싶어, 하루에도 몇 번씩 오금이 저렸다. (* 사진은 실제 살던 원룸과 관계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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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주인과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부동산을 찾아가 보증보험에 대해 물었다. 보증금을 안 준다고 부동산에서 물어주는 건 없다고 했다. 그럼 이 보험은 뭔가. 뭘 보증을 해준다는 건가. 무료법률구조공단에 전화를 걸었다. 상담원은 당연히 돌려받는 게 맞는 보증금이기에, 소송을 하면 이길 확률은 높다고 했다.

하지만 소송이라는 건 6개월 이상이 걸리는 장기적인 싸움이라, 웬만하면 원만히 해결하는 게 답이라고 조언했다. 6개월 이상이 걸릴 소송싸움 끝에 내가 얻는 건 비싼 소송비를 제외하고 남은 보증금이다. 소송에서 진 집주인이 물어내야 하는 건, 애초에 응당 돌려줘야 했던 보증금뿐이다.

내 돈을 쥐고 돌려주지 않는 사람은 집주인이지만, 소송을 걸어 더 고통스러울 사람은 나였다. 내가 소송을 걸더라도, 집주인은 끝까지 내 돈을 쥐고 나를 괴롭히다, 소송에서 지면 그때서야 내놓으면 그만인 것이었다.

나는 휘둘리고 있었다. 내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 당했다. 보증금은 엄연히 내 돈이었지만 민사소송을 하지 않는 이상 돌려받을 수 없었다. 집주인이 원하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집주인에게 문자를 보냈다. 수리비로 제시한 금액을 제외하고 보증금을 돌려달라고 했다. 집주인은 답이 없었다.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그렇게 일 주일. 남편과 나는 사색이 되었다.

강남에만 해도 집이 여러 채 있다는 집주인이 천만 원을 융통하기 어려워 돌려주지 않은 건 아닐 터였다. 내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을 것이다. 고작 55만 원 하는 월세방에 살면서, 할 말은 다 하는 나를 혼쭐을 내 주고 싶었을 거다. 집주인이 이겼다. 집주인의 바람대로 나는 단단히 혼쭐이 나고 있었다. 혹시라도 집주인의 마음이 바뀌어 보증금을 입금하지는 않았을까. 하루 종일 인터넷 뱅킹의 거래내역을 조회했다. 새로 고침을 아무리 해도 보증금은 들어오지 않았다. 달리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새로 고침을 계속 눌렀다.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응, 여행 준비는 잘 되고 있고?"


여행 준비. 지난 몇 주간 보증금 문제로 온 신경을 곤두세운 탓에, 여행 준비 같은 건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여행에 대한 설렘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아니. 보증금 문제로 여행은 아예 떠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빠가 내뱉은 '여행'이라는 단어가 심장을 톡 건드렸다. 나는 내 보증금을 돌려받을 권리가 있었다. 집주인 책임인 수리비를 내지 않겠다고 말할 권리도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부당하다. 억울하다. 지난 몇 주간 겪은 심리적 고통이 물꼬를 트고 울음으로 터져 나왔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 아빠…. 집주인이 내 보증금 천만 원 안 준대."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모님에 대고 대성통곡을 했다. 아빠는 삼촌이 아는 변호사들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있으라며 나를 다독였다. 아빠의 그 말에 더 서러웠다. 나는 내 권리를 스스로 지켜낼 힘도 없다.

전화를 끊고, 코를 훌쩍이며 다시 인터넷 뱅킹을 확인했다. 거래내역 없음. 다시 확인했다. 어? 빨간 숫자. 9로 시작하는 백만 원대의 금액. 보증금이다. 집주인이 원했던 금액을 제외한, 딱 그만큼의 숫자다.

"나는 우리 딸이 똑똑하고 강한 줄만 알았더니. 보증금 때문에 울고불고 헛똑똑이네. 우리 딸이니까 오랫동안 멀리 여행가도 잘하겠다 싶었는데. 아빠가 믿어도 되는 거야?"


며칠 후 저녁 식사 자리에서 아빠가 농담을 던지듯 말했다. 아빠의 말이 맞다. 내가 똑똑하지 못했다. 임대계약 전 법을 꼼꼼히 공부하지 않았던, 법에 대해 무지했던 내 잘못이다. 집을 계약하기 전 집의 옷장 구석에서부터 수도관 틈새까지 꼼꼼히 확인하지 않은 내 잘못이다. 상식적 수준의 수리와 관리는 집주인 측에서 응당 제공할 거라 믿었다. 대한민국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이 세입자이고 집주인이기에, 임대계약을 다루는 법, 세입자를 보호하는 법이 탄탄하리라고 믿었다. 내가 틀렸다.

보증금을 못 돌려받는 경우는 없다고 우기던 내 말도 사실이 아니었다. 인터넷에는 집주인이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수두룩했다. 천만 원이 아니라, 수천만 원, 억대가 넘는 보증금을 못 돌려받는 경우도 많았다. 해결책은 민사소송뿐이다. 승소한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다. 집주인이 패소해도 돌려주지 않는 경우도 있다. 집주인이 재산이 없으면 재산이 생길 때까지, 기약 없는 오랜 시간을 메여 있어야 한다.

집주인에게 힘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 공간을 제공하고 현금을 지급하는 계약 관계에서 집주인은 보증금으로 보장을 받지만, 세입자는 그렇지 못하다. 몇 달, 혹은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소송을 할, 그리고 소송비를 감당할 의지가 없다면 집주인이 자신을 휘두르는 대로 당하는 수밖에 없다. 집이 나가지 않는다고, 줄 돈이 없다고, 혹은 세입자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을 힘이, 집주인에게 너무나 쉽게 주어진다. 월세 계약 전 집주인의 품성까지 조사해야 할 판이다. '사람 좋은' 집주인이 아니라면, 세입자에겐 이사 갈 자유도, 집 관리 문제로 목소리를 낼 자유도 없다.

남편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이젠 절대로, 보증금 천만 원은 줘야 한다고 우기지 않는다.

집이 나가지 않는다고, 줄 돈이 없다고, 혹은 세입자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을 힘이, 집주인에게 너무나 쉽게 주어진다. 월세 계약 전 집주인의 품성까지 조사해야 할 판이다. '사람 좋은' 집주인이 아니라면, 세입자에겐 이사 갈 자유도, 집 관리 문제로 목소리를 낼 자유도 없다.
 집이 나가지 않는다고, 줄 돈이 없다고, 혹은 세입자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을 힘이, 집주인에게 너무나 쉽게 주어진다. 월세 계약 전 집주인의 품성까지 조사해야 할 판이다. '사람 좋은' 집주인이 아니라면, 세입자에겐 이사 갈 자유도, 집 관리 문제로 목소리를 낼 자유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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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나는 세입자다, #월세, #전세, #임대차계약, #보증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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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한 부부의 히말라야 여행,'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 인도편'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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