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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계 졸업생 홀대 이유 아직도 모르나" 사설이 실린 <한국경제> 누리집 캡쳐.
▲ <한국경제> 누리집 "인문계 졸업생 홀대 이유 아직도 모르나" 사설이 실린 <한국경제> 누리집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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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계 졸업생 홀대 이유 아직도 모르나"

대형 포털 사이트에 '인문계 홀대'라고 치면 자동완성 되는 검색어이다. 이 검색어는 <한국경제>의 사설 제목이다. <한국경제>는 지난 23일자 지면을 통해 "인문계 졸업생 홀대 이유 아직도 모르나"라는 제목의 사설을 내보냈다. 최근 대기업들이 인문계 출신을 뽑지 않고 이공계 출신을 뽑는 이유가 인문계 졸업생이 '반자본주의적' 질서에 물들었기 때문이라는 요지의 사설이었다.

현 대기업 환경에서 이공계 취업 유리는 당연

인문계가 이공계에 비해 취업관문이 좁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인문학이 불량해서가 아니라 한국의 대기업이 제조업 위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패스트 팔로우' 전략으로 성장한 한국의 대기업 환경에서 인문학이 힘을 쓸 수 있는 곳이 적은 건 당연지사다. 관광산업이 주인 나라에서는 상대적으로 이공계의 문이 좁은 것과 같은 이치다. 심지어 사설에서 든 예시는 모두 '화학', '전기', '공학' 등 기술이 주력인 기업들이 아니던가.

"사실 기업 인사담당자들은 인문학적 상상력은 고사하고 지독한 반기업 정서에 물든 인문계 졸업생들에게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라고 말한다. 반시장주의, 반자본주의를 인문학으로 위장하는 강남좌파식 교수들이 판을 치니 당연한 결과다."

인문학 교육이 "강남좌파식 교수들"에 의해 반시장주의, 반자본주의로 물들었다는 논지 역시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다. 인문학은 '인간'을 이야기하는 인본주의적 학문이다. 자본주의의 뿌리에는 인간이 있다. 이를 감안하면 현재의 비인간적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인문학의 의무다. 자신들을 비판한다고 '반자본주의'라고 명명하는 것은 파시즘과 다름없다. <한국경제>라는 매체 혹은 사설 작성자의 '무지의 소치'이다.

인문학을 자본과 경제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인문학을 자본과 경제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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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핏하면 실체도 없는 인성교육만 떠들어댈 뿐 과학정신은 폄하하기 일쑤다."

인문학이 인성교육만 떠들어대고 과학정신은 폄하한다는 말에서도 인문학에 대한 몰이해가 보인다. 그들이 말하는 '과학정신'이 대체 정확히 무엇인지 제대로 설명조차 하지 않아 나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현재의 비인간적 자본주의에 비판을 가하며 인성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어떻게 과학정신에 대한 폄하인 것일까. 이 연결 사이에는 분명 거리가 있어 보인다.

"이들은 시장경제가 만들어낸 정의로운 체제와 그것이 확산시키는 평화와 평등의 질서에 대해 진지한 성찰을 했던 사람이 바로 도덕주의 철학자 칸트였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한다."

안타깝지만 사설의 전제와 달리 한국의 자본주의는 정의롭지도 않고 건전하지도 않다. 평화와 평등의 질서를 확산 시키지도 않는다. 고용 없는 성장과 임금 없는 성장은 청년들을 비정규직으로 몰고 갔고 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45%를 가져가는 불평등의 시대를 불러왔다. 같은 일을 하면서 '사내하청'이란 이름 아래에 누군가는 턱도 없는 임금을 받는다. 배임, 횡령, 탈세, 근로기준법위반, 노조탄압, 산재인정거부 등을 하며 자신들의 지갑을 불리는 것이 지금 한국 자본주의의 민낯이다.

'성장'이란 미명 하에 사회는 죽고 기업만 살아남았다.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지난 대선 당시 시대정신이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시대를 헤쳐 나가 정의로운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인문학'이라는 나침반이 필수적이다. 불평등을 합리화하는 이 사회를 개선하기 위한 답은 인문학처럼 '묻는 것'이다. 정말로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지, 이 시대는 진정으로 건강한지 물어보아야만 나은 체제를 그릴 수 있다. 그래야만 인간적 가치를 되찾고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다.

<한국경제>는 대기업 팬클럽인가

대기업의 팬클럽마냥 그들의 선전선동 도구가 되어 버린 저 언론을 보자. 저 사설은 우리나라의 자본이 인문학을 어떻게 취급하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탐욕'만을 추구하는 작금의 자본주의에서 인문학은 그저 '자신들에게' 귀찮고 시끄러운 무언가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에게 '반자본주의적', '반시장주의적'이라는 낙인을 찍으려 하는 것이다.

규제 없는 자본주의가 독재라면, 인문학을 홀대하는 자본주의는 폭주기관차일 뿐이다. 인문학에 대한 몰이해를 자랑하며 자신들의 무식함과 수구성을 과시하는 저 사설에서 우리가 바라봐야할 지점은 멀리 있지 않다. 저렇게까지 인문학을 왜곡하고 지금의 체제를 찬양한다는 점은 그만큼 인문학이 두렵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여전히 자본주의라는 폭주기관차의 엔진을 멈출 수 있는 것은 인문학뿐이다.

"이러니 성숙한 민주주의의 버팀목인 건전한 직업인 육성을 기대할 수 없다."

진실은 언제나 천천히 하지만 확실히 온다. 사설의 주장과 달리 인문학은 변화할 필요가 없다. 늦지만 꾸준히 그리고 굳건하게 나아가 지금의 체제를 허물면 된다. 성숙한 민주주의의 버팀목은 "직업인 육성" 따위의 미시적인 무언가가 아니다. '문제적 지금'으로부터 '나아진 미래'를 그리는 상상력, 그것이다.


태그:#한국경제, #사설, #인문학, #대기업, #취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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