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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을에 나는 푸른 옷의 수인이다
오라에 묶여 손목이 사슬에 묶여
또 다른 곳으로 끌려가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번에는
전주옥일까 대구옥일까 아니면 대전옥일까
나를 태운 압송차가
낯익은 거리 산과 강을 끼고
들판 가운데를 달린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내려
따가운 햇살 등에 받으며 저 만큼에서
고추를 따고 있는 어머니의 밭으로 가고 싶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내려
숫돌에 낫을 갈아 벼를 베는 아버지의 논으로 가고 싶다
- 김남주 <이 가을에 나는>에서

분단의 아픔 온몸으로 노래한 김남주

김남주 아카이브전 개막식에서 테이프를 끊는 유족과 문우와 해남군 관계자와 귀빈들
 김남주 아카이브전 개막식에서 테이프를 끊는 유족과 문우와 해남군 관계자와 귀빈들
ⓒ 김이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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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곱게 물든 지난 20일, 김남주 20주기 추모 문화제 참석을 위해 강원도 원주에서 새벽 열차를 타고 청량리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 오전 10시에 해남행 전세 버스에 올랐다. 남도의 들판이 곧 펼쳐졌다. 아직 벼를 베기에는 조금 일렀다. 벼 베는 철은 또다시 다가오지만 "숫돌에 낫을 갈아 벼를 베는 아버지"는 없는 요즘이다. 불과 삼사십 년 만에 세상은 그만큼 변했다.

요즘 세상은 KTX보다 더 빨리 변해 가고 있다. 하지만 광복 후 70년 동안 변함없는 것은 조국의 허리를 가르는 분단의 철책이다.

"조국은 하나다"
이것이 나의 슬로건이다
꿈속에서가 아니라 이제는 생시에
남모르게 아니라 이제는 공공연하게
"조국은 하나다"
권력의 눈앞에서
양키 점령군의 총구 앞에서
자본가 개들의 이빨 앞에서
"조국은 하나다"
이것이 나의 슬로건이다
....
- 김남주 <조국은 하나다>에서

1990년대 초, 김남주의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천지가 개벽할 만큼의 감동을 받았다. '조국은 하나다', 너무나 당연한 이 말이 그렇게 가슴을 파고들 줄이야. 까닭은 과거의 시대 상황 때문이었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 말을 감히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모두가 짐승처럼 동족에게 총부리를 겨누며 살았다.

김남주 아카이브전 안내현수막
 김남주 아카이브전 안내현수막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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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제 쓰리라
사람들이 오가는 모든 길 위에
조국은 하나다라고
오르막길 위에도 내리막길 위에도 쓰리라
사나운 파도의 뱃길 위에도 쓰고
바위도 험한 산길 위에도 쓰리라
끊어진 남과 북의 철길 위에도 쓰리라
조국은 하나다라고
나는 이제 쓰리라
인간의 눈이 닿는 모든 사물 위에
조국은 하나다라고
눈을 뜨면 아침에 맨 처음 보게 되는 천장 위에 쓰리라
만인의 입으로 들어오는 밥 위에 쓰리라
쌀밥 위에도 보리밥 위에도 쓰리라
...
- 김남주 <조국은 하나다>에서

김남주 옥중 육필시
 김남주 옥중 육필시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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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 앞에서 몹시 부끄러웠다. 그는 광복 후 격동의 세월을 온몸으로 부딪히며 민족의 모순을 뚫기 위해 살았지만, 나는 거센 비바람을 요리조리 피하며 자기 보신에 골몰한 소시민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와 나는 1945년 동갑 해방둥이다. 그는 전남 해남에서, 나는 경북 구미에서 태어났다.

해남으로 달리는 전세버스 안에서 옆자리 김창규 시인과 이런저런 세상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어느새 행사장인 해남 군청에 이르렀다. 먼저 도착한 광주의 이승철 시인과 해남 토박이 고산 윤선도의 후손 윤재걸 시인이 우리를 반겼다.

곧이어 해남군청 옆 해남 문화 예술관 2층 전시실에 마련된 김남주 아카이브 전 '나의 칼, 나의 피' 개관식이 열렸다. 개관 테이프를 자른 뒤 김남주 기념 사업회장 김경윤 시인은 "우리가 이 시대에 김남주의 삶을 다시 돌아보는 것은, 단지 그를 기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조국의 통일과 평화를 위해 온몸으로 실천했던 한 인간의 순결하고 외로운 투쟁을 통해 우리 삶을 되돌아보기 위함이다"라며 추모 문화제의 의의를 말했다. 김남주의 선배요, 동지며, 또 문우인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은 마이크를 잡고 울먹이며 축사를 시작했다.

다산연구소 박석무 이사장 "남주 있었다면 혜안 제시했을 것"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이 김남주를 기리고 있다.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이 김남주를 기리고 있다.
ⓒ 김이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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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가 그립다. 남주가 피 흘리며 목숨까지 바쳐 쟁취한 조국의 평화와 통일의 기운은 사라지고, 어찌하여 이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남주에게 부끄럽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20년 전 남주가 눈을 감은 그 시절로, 아니 남주가 감옥에서 투쟁하던 40년 전 그 시절로, 회귀하고 있다.

참으로 참담하다. 남주는 시인 이전에 평화 통일의 전사였다. 그가 살아있다면 오늘 방향을 잃고 헤매는 이 겨레에게, 그의 목소리와 혜안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줄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가 그립다."

김남주 추모 걸개시화전(해남군청 앞 9. 20~10. 4)
 김남주 추모 걸개시화전(해남군청 앞 9. 20~10. 4)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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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이사장은 김남주 시인과 함께 투옥되었을 때 그가 쓴 시 <다산이여 다산이여>의 일화를 들려주며 "우리 오늘 다시 민주주의의 위기와 조국 통일의 암담함에 처했다. 우리 모두 깨치자"며 말을 마쳤다.

김남주 부인 박광숙 선생이 내빈에게 인사말을 하고 있다.
 김남주 부인 박광숙 선생이 내빈에게 인사말을 하고 있다.
ⓒ 김이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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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한국작가회의의 사무총장 정우영 시인의 축사, 김남주 시인의 부인 박광숙씨의 감사 말씀으로 개막식은 끝났다. 김남주 아카이브전에는 김 시인의 육필 유작, 유품, 옥중 편지, 사진과 영상물로 전시장을 채웠다. 그가 감옥에서 화장지와 우유곽에 못으로 긁어 쓴 옥중 육필시 외에도 그의 안경, 스웨터, 목도리도 볼 수 있었다.

관람객들이 김남주의 전 생애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잘 마련해 두었다. 일찍이 전남 해남은 고산 윤선도의 고향으로 전국에서 군 단위에서 가장 많은 문인들을 배출하고 있다고 해남의 윤재걸 시인과 이웃 마을 함평 출신의 이승철 시인은 자랑했다.

위대한 시인과 작가는 저절로 태어나지 않는다. 글을 숭상하고 사랑하는 향토민의 정성으로 이 기운은 무럭무럭 자랄 것이다. 관람하는 내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이 고장에 대한 부러움과 함께, 이 고장이 더욱 그렇게 나아가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만인을 위해 내가 노력할 때
나는 자유이다
땀 흘려 힘껏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이다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몸부림칠 때 나는 자유이다
피와 땀을 눈물을 나눠 흘리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사람들은 맨날 밖으로는 자유여, 형제여, 동포여! 외쳐대면서도
안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고들 있으니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제 자신을 속이고서

- 김남주의 <자유>에서

덧붙이는 글 | 민족시인 김남주 20주기 추모문화제
때: 2014년 9월 20일(토) ~ 10월 4일(토)
곳: 전남 해남문화예술회관



태그:#김남주, #김남주 20주기 추모문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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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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