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기숙사 방에서 세미나 페이퍼를 쓰고 있습니다
▲ 1학년 기숙사 방에서 세미나 페이퍼를 쓰고 있습니다
ⓒ 조한별

관련사진보기


"(다 쓴 페이퍼를 손에 들고) 드디어... 낳았다아아아아!"

애도 안 낳아본 주제에 이런 비교를 해서 세상의 어머니들께 죄송하지만… 그만큼 나에게, 그리고 죠니(St.John's의 John's에서 따와  세인트 존스 학생을 Johnnie라고 부른다)들에게 페이퍼 쓰기는 너무나 힘든 과제였다. 그래서 매번 페이퍼를 쓸 때마다 나는 출산의 고통에 비유하곤 했다. 글 하나 써내는 게 뭐가 그렇게 힘들까? 의아해 하실 것 같다.

이번 기사는 세인트 존스(이하 센존)에서의 페이퍼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인문학 고전을 읽으며 그에 관한 글을 써 보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 걸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거나, 그저 읽는 행위 말고 더 깊은 사고를 하는 공부를 해보고 싶은 분들께  미약하게나마(!)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 학기 수업을 듣는 동안 죠니들은 많은 페이퍼를 쓴다. 수학, 음악 페이퍼를 쓰기도 하고, 랩(실험) 수업에선 실험 리포트를 쓰기도 한다.  불어, 희랍어를 배우는 랭귀지 수업에서 역시 번역 관련 페이퍼를 쓴다.

하지만 이 많은 페이퍼들 중 제일 중요한 것이 바로 세미나 에세이다. 다른 페이퍼들은 한 학기에 3~4개 쓰지만, 세미나 에세이는 한 학기에 딱 한 개만 쓰는데, 그런 만큼 중요하고 정성 들여 써야 하는 페이퍼다.  개인적으로는 이 세미나 에세이를 '세인트 존스 배움의 꽃'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 이유는 세미나 에세이 하나를 써 내기까지의 과정이 너무나 신나고 소중한 배움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다 니가 알아서 해!

1학년 때는 튜터(교수)님이 페이퍼에 대해 좀 더 설명을 해주실 줄 알았다. 어떤 식으로 쓰는 건지, 어떤 에세이가 돼야 하는지. 그런데 정말 황당하게도 아무런 설명이 없으셨다.  그저 세미나 에세이 제출 날짜 한 달 전쯤 한 번 언급하신 것이 전부였다.

"드디어 이 즐거운 시기가 돌아왔습니다~ 그동안 많은 걸 배웠죠? 8~12장짜리 페이퍼를 써~ 주쎄용!"

8~12장짜리 페이퍼는 도대체 어떻게 쓰는 것이여? 무슨 책으로? 주제는? 주제를 정해주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하고 생각하던 나에게 주제는 커녕 책조차 정해주지 않는다는 것은 한편으로 두려운 충격이었다. 책부터 나 스스로 골라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이번 학기 세미나에서 읽었던 책들 중 마음에 들었던 책 몇 권을 뽑아놓고 열심히 쳐다봤다(지난 학기에 읽었던 책 중에서 쓰고 싶은 책이 꼭 있다면 튜터님께 허락을 받으면 된다).

그렇게 후보자들을 놓고 심사를 하고 있으니 처음 들었던 당혹감과는 다르게 '오~ 재밌는데?'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책이 정해져 있었더라면 큰일날 뻔했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면서 내가 그동안 얼마나 정해진 것에 따르는 수동적인 배움의 과정에 익숙해 있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만약 써야 할 책이 정해져 있는데 내가 그 책을 싫어했더라면? 으~ 한국에서 진절머리치며 해야만 했던 숙제와 다름 없는 일이 아닌가! 싫어하는 책으로 10장이 넘는 페이퍼를 쓰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 스스로 고른 책은 <걸리버 여행기>였다.   

그렇게 책을 고르고 나면 이제 또 다시 맞게되는 다음 난관! 책은 골랐는데, 주제는 어떻게 정하지? 다시 책을 읽어보면 좋겠지만 <걸리버 여행기>는 분량이 장난 아니다. 몇백쪽 분량의 책을 그냥 빠르게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훑어보며 예전에 읽었던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살려야 한다. 세미나 때 걸리버 여행기를 읽은 후로 여러 다른 세미나 책들을 읽으며 이미 산 넘고 강 건너 가버린 내 정신을 다시 걸리버 여행기를 읽던 때로 불러와야 하는 거다. 이렇게 주제를 고민하며 에세이를 어떻게 쓸지 머리를 굴리는, 즉 '브레인스토밍(brainstorming) '과정을 거쳐야 한다.

브레인스토밍을 통해 생각에 깊이를 더하기

도서관
▲ 학교 도서관
ⓒ 조한별

관련사진보기


이 브레인스토밍을 할 때 큰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노트 필기다. 처음 책을 읽을 때 드는 생각들을 책에 적어 놓기도 하고(그래서 여전히 대부분의 죠니들은 e-book 대신 페이퍼 북을 선호한다), 아예 따로  그때 그때 드는 생각이나 질문들을 노트에 적어 놓는 습관을 들이면 좋다. 또 세미나에서 그 책을 토론할 때 나왔던 주제들, 특히 토론 중 내가 마음에 들었던, 흥미가 있었던 질문들을 적어 놓으면 나중에 에세이의 주제를 정할 때 내가 관심 있었던 부분으로 돌아가 빠르게 브레인스토밍을 시작할 수가 있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부분을 발견했다면 이제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다시 읽기 시작한다. 걸리버 여행기로 예시를 들어보면, 걸리버 여행기에는 4종류의 나라가 나온다. 그 중 내가 만약 첫 번째 나라, 소인국 릴리풋이 제일 흥미로웠으니 이 이야기에만 집중하겠다고 결심한다면 릴리풋 이야기만 다시 정독해서 읽어보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읽고 있다 보면 또 다른 흥미로운 부분이 발견되는데 그 부분은 어떤 특정한 사건이나 사물일 수도 있고 특정한 캐릭터가 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릴리풋 왕국 이야기에서는 계란을 깨 먹는 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계란에 흥미가 있으면 이제 "왜 계란이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할까?"라는 질문을 계속 생각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읽어보는 거다.

이렇게 하나의 주제를 머릿속으로 생각하며 책을 다시 읽는 건 재미있기도 하지만 정말 중요한 과정이다. 바로 이 과정을 통해 '내 생각'을 만들어나갈 뿐 아니라 깊이를 더하게 되기 때문이다. 기본 질문을 가지고 책을 다시 읽으면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발견되고 그러면서 점점 더 해답을 찾기도, 내 주장을 뒷받침할 예시들이 나오기도, 아니면 점점 더 미궁으로 빠지기도 한다.

그런 과정을 거치다 보면 내 질문이 별로 재미가 없는 질문이구나, 또는 별로 쓸 게 없겠구나 하는 걸 깨닫게 되기도 한다. 그러면 과감히 여태껏 발견한 것들을 다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브레인스토밍을 시작해야 한다. 슬프지만 이미 페이퍼를 쓰기 시작했다가 뒤집어엎는 것보다 백배 천배 나은 일이니 과감히 다시 시작하는 거다.

내가 생각하고 있고 고민 중인 주제를 책을 읽은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 해보는 것도 아주 좋은 방법이다. 정말로 좋은 질문이고 기가 막힌 주제라고 나는 생각하지만 객관적으로 보기에는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1학년 때 사실 이런 실수를 했었다.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고 인간의 사회성에 대해 썼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기가 막힌 주제야!' 하면서 신이 나서 내 나름대로 책을 분석해 에세이를 써냈다. 그런데 튜터들로부터 처음 절반은 참신하고 좋았지만 나머지 절반은 어거지라는 극과 극의 평을 받아 웃다가 울었다.

자신이 주제를 정하고 책을 그 주제에 맞춰 해석해 나가기 시작하면 어떤 때는 그동안 못 봤던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지만, 어떤 때는 콩깍지가 씌어서 말도 안 되는 것을 그럴 듯하다고 생각하고 책을 내 시야에 끼워 맞춰 잘못 해석하는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다.  따라서 책을 함께 읽은 친구들과 내가 생각하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고 의견을 듣는 것은 객관적인 견해를 들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생각을 정리해주는 아웃라인 만들기

이렇게 브레인스토밍을 하고 있으면 주제 선정뿐만 아니라 아웃라인까지 만들게 된다.  아웃라인은 또 뭣이여? 에세이 하나 쓰려면 이런걸 다 해야만 하나? 하고 나도 처음에는 생각했었다. 그래서 1학년 때는 주제만 덜렁 정해놓고 무작정 글을 쓰기도 했었다. 그런데 몇 번 쓰다 보니 잘 쓰여진 에세이는 구성이 튼튼하고 전달이 명확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고 자연스럽게 나도 아웃라인을 짜게 됐다. 근데 사실 이 아웃라인도 별거 없다. '에세이 아웃라인 짜기'라고 하면 되게 간지나 보이는데 이건 다른 말로 하면 '내 생각의 흐름 정리하기'일 뿐이다. 내가 선택한 주제에 대한 내 생각을 정리하고 전개해 나가는 형식을 정해 놓는 것이 바로 아웃라인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내 에세이의 주제는 '계란 깨어 먹는 법 따위가 왜 중요한가?' 였다. 그 답을 찾기 위해 나는 이 질문을 염두에 두고 걸리버 여행기를 읽고 또 읽는다. 그러다가 첫 번째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계란 깨어 먹는 법은 당사자들에게는 중요한 일이지만 객관적인 걸리버가 보기에는 너무나 하찮은 일임을 암시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러면 에세이의 첫 부분은 내가 발견하게 된 그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흘러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면 이제 또 다시 내가 책을 읽으면서 발견한 두 번째 주장으로 넘어간다. 계란 깨어 먹는 법이 왜 릴리풋 왕국에서 문제가 되었는지, 계란의 중요성에 대한 내 발견을 책으로부터 근거를 들어가면서 독자들을 이끌어 가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계란 깨어 먹는 방법은 인간들의 관습을 암시한다'는 내 두 번째 주장으로 도달할 수 있다.     

이렇게 쓰고 보면 내 아웃라인은 다음과 같아질 수 있다. <계란 깨어 먹는 법이 왜 중요한가?>가 주제고, 첫 번째 아이디어는 '계란 사건을 통해 객관적인 걸리버의 의견을 볼 수 있다'가 될 테고 두 번째 아이디어는 '계란은 인간들의 관습을 보여준다'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결론에 도달하면 된다. 결국 아웃라인까지 확실해졌다는 말은 그 책에 대한 내 생각이 드디어 정리가 됐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신나게 글쓰기를 시작하면 된다.         

페이퍼와 에세이의 차이

페이퍼는 여러 종류다. 제일 기본적인 리서치 페이퍼부터 실험 리포트, 수학 페이퍼, 번역 페이퍼 등의 일반적인 작문 숙제를 받으면 학생들은 "페이퍼가 있다"고 말한다. 에세이 역시도 '써야 할 페이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에세이의 특징은 오로지 자신의 생각만으로 글을 진행시켜 나간다는 것이다. 유명한 사람의 주장을 따 오거나 어딘가에서 찾은 정보를 인용하지 않는다. 하나의 질문을 내 스스로 정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의 힘으로 찾아나가는 과정을 쓰는 것이 에세이고 그게 바로 세인트 존스에서 말하는 세미나 페이퍼다.

내 생각만으로 글을 진행시켜 나간다는 것이 뭐가 그렇게 의미가 있지? 이미 이 기사에 나와있기도 하지만 그 의미는 내 스스로 공부하고 답을 찾아나가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독서'를 통해 우리는 새로운 것들을 알게 되고 생각해보게 된다. 그것들을 가지고 '토론'을 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서로의 의견을 공유하고 다양한 견해를 들으며 생각을 넓힐 수 있다. 그리고 '에세이 쓰기'를 통해 그 사방에 퍼져 있던 생각들을 정리할 뿐만 아니라 내가 책에 대해 관심 있는 한 부분을 더 깊게 파고들며 그 생각의 범위를, 깊이를 넓힐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결국 에세이 쓰기는 글쓰기가 아니다. 세인트 존스에서 학생들이 써야 할 것은 '글'이 아니라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세미나 에세이 쓰기를 '세인트 존스 배움이 꽃'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내가 정한, 내가 좋아하는 책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좋아서 하는 적극적인 배움인 만큼 그 과정이 너무 재미있고 책을 다시 읽어보며 하나 하나 새로운 것들을 발견해낼 때의 흥분은 정말 그 어떤 공부와도 비교가 안 되는 짜릿함이다.

그러다 보니 세미나 페이퍼를 쓸 때는 학교에서 아예 학생들에게 '글 쓰는 기간'을 준다. 1학년 때는 '긴 주말(long weekend)'이라는 이름으로 금요일부터 월요일까지 수업을 없애줘, 4일간 스스로 학습(페이퍼 쓰기)을 할 수 있고 2학년 때는 더욱 더 페이퍼가 중요해지기 때문에 일주일 동안 수업이 다 취소된다. 스스로 고민, 생각, 공부해 보고 그 과정을 보여주라는 뜻이다.

4학년은 에세이 쓰기의 피날레다. 이 에세이는 길이만 길어진 것(25~100장)뿐 아니라, 4학년이 제출해야 할 논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4학년 때는 아예 한 학기 중 한 달간 수업을 없애고 그동안 논문을 쓰라고 한다. 그리고 이 페이퍼 쓰는 기간은 죠니들에게 (물론 스트레스는 쌓이지만) 너무나 즐거운 시간이다. 내가 원하는 주제에 대해 마음껏 생각하고, 친구들과는 물론이고 튜터(교수)님과도 약속을 잡아 그 주제에 대해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해보며 지식을 추구할 수 있는 기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페이퍼 쓰는 기간이 되면 튜터님들은 미소를 머금고 학생들에게 말씀하신다.

"자~ 에세이 쓸 시기가 됐네요. Please Enjoy! (즐기세요!)"          

* 드디어 토론 수업, 영어, 에세이 쓰기까지 세인트 존스에 관한 어느 정도의 공부 이야기가 나온 것 같아요! 훌라훌라 씬난당- 이제 드디어 복잡하고 어려운 내용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습니당! 따라서 다음 글은 좀 더 쉽고 흥미로운, 공부 외 미국 소규모 대학의 파티, 클럽 활동, 그리고 야외 활동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조한별 기자의 개인 카페(http://cafe.naver.com/nagnegil)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ST.JOHN'S COLLEGE, #세인트 존스, #고전100권, #영어 에세이, #영어 글쓰기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