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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봉을 앞에두고 통천문에서 뒤돌아 본 풍경
 천왕봉을 앞에두고 통천문에서 뒤돌아 본 풍경
ⓒ 전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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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3시, 새벽의 지리산 성삼재에 등산객들이 하나 둘 모여든다. 지리능선 당일 종주를 시작하는 시간이다. 등산객들은 머리에 랜턴을 하나씩 달고, 발아래를 밝히면서 산길로 들어선다. 키 큰 나무들이 에워싼 숲길은 온통 깜깜하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빛이 쏟아진다.

"이렇게 맑은 밤하늘을 본 적이 있었던가?"

머리 위로 가깝게 다가선 별, 별빛을 감싸면서 산란하는 하늘빛, 하늘을 가리려는 나뭇잎의 실루엣...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밤하늘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동이 밀려온다. 발걸음이 가볍다. 지리능선 산행의 시작은 이렇게 시작된다.

별빛을 받으며 걸어가는 지리능선

지난 6일, 추석을 앞두고 산행을 준비했다. 성삼재에서 출발하여 천왕봉 올랐다가 중산리로 내려오는 34km 정도의 지리산 종주길이다. 빠른 사람들은 13시간 정도 걸린다. 내가 산을 타는 정도는 '보통'이니 15시간 정도로 예상 소요 시간을 잡았다.

지리능선 당일 종주는 쉽지 않다. 산을 완주하려면 시간 배분을 잘 해야 한다. 구간별 산행속도와 시간, 그리고 체력을 유지하면서 걸어야 하는 장거리 산행이다. 성삼재에서 오전 3시에 출발해서 연하천대피소까지는 못해도 오전 7시까지 도착하기로 계획을 잡았다. 세석에는 낮 12시까지, 그리고 천왕봉에는 늦어도 오후 3시까지 도착해야 오후 6시 정도에 산행을 마칠 수 있다.

종주산행은 새벽 3시부터 시작한다. 성삼재에서 노고단고개로 오르는 길.
 종주산행은 새벽 3시부터 시작한다. 성삼재에서 노고단고개로 오르는 길.
ⓒ 전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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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계획이 늦어졌다. 성삼재 개방시간인 3시에 출발할 예정이었으나, 산행 준비하느라 30분 늦게 산길로 들어섰다. 깜깜한 어둠속에서 산길을 더듬어 올라가는 기분이 좋다. 노고단대피소를 지난다. 천왕봉까지 25.9km를 가라고 알려준다.

노고단고개(1440m)에서 임걸령까지 가는 길은 완만한 숲길이다. 숲 속으로 난 길은 불빛이 없으면 걷기 힘들다. 랜턴을 밝히고 어둠 속에서 빠르게 걷는다. 지리능선 종주는 초반에 속도를 내야 한단다. 발만 보고 걷다가 숲에서 벗어나면 먼 골짜기 아래로 마을 불빛들이 보인다. 어둠은 사람을 그립게 만든다.

임걸령(1320m)에 도착해서 샘물을 마신다. 물맛이 아주 시원하다. 뒷맛이 아주 맑다. 지리산 능선에서 맛본 샘물은 비교 불가다. 잠시 쉬었다가 산길을 재촉한다. 앞서가던 등산객들 불빛이 금방 사라진다. 다들 서두른다. 어둠 속에서는 걷는 것 말고는 할 게 없다.

대한민국에서는 가장 완벽한 트레킹 코스

어둠이 점점 밀려나고 발밑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다. 삼도봉(1550m)으로 올라선다. 천왕봉이 있는 동쪽 산마루의 검붉은 하늘은 어둠과 싸움을 하고 있다. 하늘이 점점 붉어진다. 일출을 보기에는 시간이 이르다. 오전 5시 45분이었다.

삼도봉에서 본 여명.
 삼도봉에서 본 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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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에서 만난 예쁜 꽃. 왼쪽이 투구꽃, 오른쪽이 진범
 산길에서 만난 예쁜 꽃. 왼쪽이 투구꽃, 오른쪽이 진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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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재촉한다. 어둠이 걷힌 산길에는 오리를 닮은 진범, 투구를 쓰고 있는 투구꽃 등 여러 꽃들이 가득하다. 화개재를 지나고 토끼봉(1537m)으로 가파르게 올라간다. 오르락내리락 하더니 연하천대피소에 다다른다. 연하천대피소에서는 등산객들이 아침을 먹고 있다. 예상했던 시간보다는 그리 늦지는 않았다. 오전 7시 50분이었다.

아침을 먹을까 고민하다가 그냥 지나쳤다. 산행 중 준비한 식사는 아침과 점심이다. 종주하려면 배낭 무게를 줄여야 한다. 그래서 김밥만 샀다. 아침도 김밥, 점심도 김밥으로 준비했다. 밥을 먹기 위해 따로 자리를 펴고 할 게 없다. 걷다가 앉기 좋은 장소가 있으면 아침을 해결하기로 했다. 대신 초콜릿, 연양갱, 비스킷 등의 대용식량을 준비했다. 걷다가 힘들 때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과자류다. 고열량 과자라서 급격히 체력이 저하될 때 회복해주는 마력이 있다.

지리산 산길은 정말 아름다운 길이다.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숲과 고산지대를 반복하면서 능선길을 걸어간다. 중간에 대피소가 있어 쉬었다 갈 수도 있다. 세계적으로 손꼽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라면 단연 최고의 트레킹 코스다. 형제봉을 지나고 벽소령대피소에 도착한다. 시계는 오전 9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벽소령대피소에 오면 절반쯤 온 기분이 든다. 서쪽 노고단과 동쪽 천왕봉의 중간 정도다. 내려가는 길을 계산하면 아직 반도 못 왔다. 벽소령대피소에서 자리를 깔고 앉았다. 가져간 사과도 먹고, 구워간 오징어도 먹는다. 지나가는 등산객들도 보면서 여유를 가졌다.

지리능선 종주는 체력과의 싸움

벽소령대피소를 지나서 얼마동안 완만한 산길을 걷는다. 기분이 좋다. 이런 길이라면 하루 종일이라도 걸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런 길은 잠시다. 다시 오르락내리락 하는 거친 산길을 걷는다. 산길을 걸어갈 때는 평지를 걷는 것 보다 더 힘들다. 이동시간도 평지의 두 배가 걸린다. 거친 산은 훨씬 더 걸린다.

지리산 형제봉을 지나며.
 지리산 형제봉을 지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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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능선. 뾰족 솟은 봉우리가 천왕봉이다.
 지리능선. 뾰족 솟은 봉우리가 천왕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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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소령에서 세석으로 가는 길은 덕평봉, 칠선봉, 영신봉을 넘는 거친 산이다. 지리능선 종주길은 구간을 지날 때 마다 점점 가까워지는 기분이 드는데 벽소령에서 세석으로 가는 구간만은 그렇지 않다. 성삼재에서부터 6시간 이상을 걸어서 체력이 떨어지기도 한데다가 구간 거리도 6.3km로 길다. 개인적으로 가장 힘든 구간이다.

영신봉(1522m)으로 오르는 길. 계속 이어지는 나무계단길이다. 체력도 바닥이 나서 계단길에 그만 퍼졌다. 계단 중간에서 신발을 벗고 맨발로 쉬었다. 쉬는 김에 싸왔던 김밥을 펼쳤다. 아침을 안 먹었으니 아침 겸 점심이다. 김밥이 달다.

밥이 들어가니 힘이 다시 솟는다. 영신봉을 넘어서니 세석평전이 펼쳐진다. 세석대피소에 도착하니 낮 12시 40분이다. 생각보다 늦어진다. 세석대피소는 그냥 지나친다. 장터목대피소까지 3.4km가 남았다. 촛대봉으로 오른다. 고산지대 느낌이 물씬 난다. 나무들도 키가 작아지고 하늘이 낮아진다. 길가로 구절초와 산오이풀이 알록달록 환하게 피었다. 촛대봉에 올라서니 천왕봉이 가까이 보인다.

지리산 촛대봉 오르는 길. 야생화와 맑은 하늘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길이다.
 지리산 촛대봉 오르는 길. 야생화와 맑은 하늘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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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하봉 오르는 길. 고산지대 야생화 군락이 펼쳐진다.
 연하봉 오르는 길. 고산지대 야생화 군락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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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대봉을 뒤로 하고 연하봉으로 향한다. 점점 체력이 떨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연하봉(1730m)이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무릎도 아파오고 발바닥도 따갑다. 체력도 문제지만 몸도 이곳저곳이 아프다. 천왕봉을 지나 중산리까지는 아직도 10여 km를 더 가야 하는데...

장터목대피소에서 고민을 한다. 중산리로 바로 내려갈까? 하지만 지금 도전하지 않으면 마음속에 아쉬움이 남을 것 같다. 제석봉으로 오른다. 제석봉(1806m)은 민둥산이다. 햇살이 따갑다. 제석봉에 올라서니 천왕봉이 바로 잡힐 것 같다. 통천문 앞에 선다. 천왕봉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올 때마다 힘든 산, 지리산

통천문을 지나니 구름이 천왕봉을 향해 피어오른다. 하얀 구름 속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천왕봉이 신령스럽게 다가온다. 철계단을 밟아 올라가니 하늘 아래 바위봉우리가 섰다. 바위벽에 새겨진 천왕이라는 글자는 산의 위상을 보여준다. 하늘아래 최고의 산이 천왕봉(1915m)이라고 말하고 있다. 천왕봉 표지석은 볼 때마다 부자연스럽다. 산정에 있는 돌을 사용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오후 3시 15분이었다.

구름이 피어오르는 천왕봉. 신령스러운 기운이 넘친다.
 구름이 피어오르는 천왕봉. 신령스러운 기운이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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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아래 천왕봉. 지리산 정상이다.
 하늘아래 천왕봉. 지리산 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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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천왕봉
 지리산 천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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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산이다. 명산의 조건은 아름다움에 있다고 한다. 지리산은 보이는 것보다 지리산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더 장관이다. 산너울이 끝이 없다. 여인네 엉덩이를 닮은 반야봉이 보인다. 지리능선 걸어온 거리가 너무나 멀다. 북쪽으로는 계곡을 건너 서북능선이 장쾌하게 펼쳐진다.

천왕봉에 앉아서 산너울을 바라보고 있으니 내려서기가 싫다. 그러나 시간은 기대려주지 않는다. 중산리까지 5.4km를 내려가야 한다. 가파른 돌계단을 밟아 선다. 발을 디딜 때마다 무릎에 통증이 밀려온다. 계단 높이가 생각보다 높다.

남강발원지인 천왕샘을 지나고 개선문을 지난다. 통천문으로 들어와서 개선장군처럼 개선문을 지나니 기분이 좋다. 가파른 길은 법계사까지 이어진다. 아직도 중산리까지 3.4km를 내려가야 한다. 무릎이 아프고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누군가에게는 내려가는 길이 쉽다지만 지금은 아니다. 내려가는 길은 더 힘들다. 물소리가 가깝게 들린다. 오후 5시 30분, 새벽부터 시작한 14시간 대장정이 끝났다.

지리능선에서 본 산너울.
 지리능선에서 본 산너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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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을 여러 번 오면 쉬워져야 하는데, 올 때마다 힘들다."

지리산 천왕봉을 앞에 두고 했던 말이다. 오를 때마다 쉬워지는 산이라면 이렇게 자주 찾지 않았을 것이다.


태그:#지리산, #지리능선 종주, #천왕봉, #지리산 종주, #성삼재 중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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