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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사진 다 가져가. 안 가져가면 버릴 테니까."

엄마가 한 말이다. 시댁에서 출발해서 기분 좋게 친정에 왔는데... 엄마의 모습이 낯설다. 앨범을 열어보니 이미 여기저기 비어 있다. 언니랑 오빠가 사진을 가져갔나 보다. 내 어린 시절의 추억이 빈자리만큼 사라졌다. 팔순의 엄마는 우리 사남매의 사진도 이제는 다 귀찮아졌나 보다. 서글프다. 엄마는 아픈 곳이 많아지면서 오래된 집의 짐도 당신을 힘들게 하는 혹이라 했다.

아버지 서예작품 (아버지의 작품 모두에는 아버지의 땀과 열정이 들어가 있다. 그걸 모르지 않는 엄마는 그 작품을 이제 버리겠다고 하신다)
 아버지 서예작품 (아버지의 작품 모두에는 아버지의 땀과 열정이 들어가 있다. 그걸 모르지 않는 엄마는 그 작품을 이제 버리겠다고 하신다)
ⓒ 강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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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서예작품도 필요하면 가져가. 다 버릴 거야."
"거기 들어간 돈이 얼만데."

듣기만 하던 아버지가 역정을 내셨다.

"엄마, 아버지 작품이 얼마나 된다고 그걸 버려."

내가 아버지 편을 들었다.

"그래, 내 편은 하나도 없어. 너도 아버지 편이지."

엄마의 반응이 당황스러웠다. 내 말에 엄마가 저렇게 화를 내는 게 이해가 안 된다. 뭔가에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다. 아무래도 아버지에게 쌓인 감정이 있는 듯싶다.

친정에 들른 날, 엄마는 나에게 화를 냈다

엄마의 엄마 자리에서의 은퇴를 응원한다.
 엄마의 엄마 자리에서의 은퇴를 응원한다.
ⓒ s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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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말, 아버지는 언니를 따라서 중국 여행을 다녀왔다. 엄마는 몸이 좋지 않아서 함께 가지 못했다. 여행 다녀오신 뒤 친정집은 공사에 들어갔다. 세들어 살던 사람이 이사 가면서 비용이 1000만 원도 넘게 드는 공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틀 뒤, 아버지가 갑자기 '대장 게실염'으로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염증치료를 위해 입원이 필요했다. 아버지 속옷을 병원에 가져다 드리려고 친정에 들른 날도 엄마는 나에게 화를 냈다.

"내가 너희 아버지보다 더 아팠어. 그런데 이게 뭐냐? 아버지는 여행 다녀와서 입원해 버리고 공사는 나한테 다~아 떠넘기고."

그날 아버지의 속옷은 엄마를 대신해서 내가 찾았다. 그리고 이틀 뒤, 친정에 홀로 있는 엄마가 걱정이 되어 친정에 가려는 나에게 엄마는 "힘들어 오지 마. 다 귀찮아"하고 버럭 화를 내기도 했다.

나흘을 입원했던 아버지는 퇴원 후 다음날부터 볼일을 보러 외출을 하셨다. 엄마는 공사하는 내내 집을 비우지 못했다. 그 뒤로 엄마는 더 자주 억울해 했다. 우리들 사진과 아버지 서예 작품을 버리겠다고 하는 것도 어쩌면 그 억울함의 연장선일지 모른다.

친정을 나와 집으로 돌아오며 엄마가 왜 물건을 그렇게 버리려고 하는지 생각했다. 우울증일까? 노인들에게 '버리지 못하는 병'이 있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버려야 하는 병'도 있는 걸까? 엄마가 과거에는 어떠했는지 더듬어 보았다.

어릴 적 부모님 부부싸움의 시작은 항상 같았다

어릴 적 부모님 부부 싸움의 십중팔구는 "그거 어디에 있어?"라는 아버지의 호통에서 시작됐다. 당장 아버지 앞에 물건을 대령하지 못하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어떻게 된 집구석에 남아 나는 물건이 하나 없어?" 엄마는 아버지의 분노를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다.

물건을 못 버리게 하는 아버지 때문에 이런 일도 있었다. 부모님이 입었던 겨울 코트를 우리 형제에게 물려주었는데 어느 날, 내 형제는 그 코트를 입고 외출했다. 아마 다른 옷을 사 주지 않아서 그 옷을 입고 나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집에 돌아온 형제는 무척 화를 냈다. 오래된 코트 때문에 간첩으로 오해 받아 경찰의 검문에 걸렸다 했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일이니 벌써 30년도 더 된 일이다. 아버지가 물건 버리는 것을 싫어했던 이유는 새 물건을 구매하느라 쓰는 돈이 아까웠기 때문이다.

냉장고를 처음 샀던 날도 생각난다. 1980년대 초반 일이다. 우리 집은 2층집이었다. 1층엔 가게와 아버지 방이 있고 2층에는 우리들 방과 부엌이 있었다. 아버지는 직장에 다녔고 엄마는 가게를 했다. 엄마는 가게를 해서 번 돈으로 냉장고를 주문했다. 냉장고는 2층으로 배달이 되었다. 나는 냉장고를 사서 너무 신이 났다. 얼음을 유리컵에 넣어 흔들면서 진짜 우리 집이 텔레비전에 나오는 집처럼 부자가 되었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엄마는 아버지 앞에서 냉장고의 '냉'자도 꺼내지 못하게 했다. 나는 자랑스러운 냉장고가 집에 있는 것을 아버지에게 왜 숨겨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며칠간 엄마는 마음을 졸이며 새가슴으로 지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2층에 있는 냉장고를 발견했다. 냉장고가 발각된 순간, 아버지의 고함과 날아다니는 물건으로 우리 집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엄마는 숨을 한 번 쉬고는 아버지의 화를 온몸으로 감내했다.

'물건 하나 마음대로 버릴 수 없는 삶'. 엄마의 결혼 생활은 그렇게 간단히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아버지는 왜 낡은 물건을 버리지 말라면서 엄마를 괴롭혔을까?

아버지는 1949년, 열아홉에 홀홀단신으로 남한에 내려온 실향민이다. 열아홉이면 지금 고3 나이다. 그 어린 나이에 세상천지에 돌봐줄 사람이 하나 없었다. 믿을 것은 돈뿐이니 돈을 모으기 위해서 물건은 버리지도 않고 사지도 않았다. 그 원칙을 결혼 후에도 지키려 했으니 엄마는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엄마에게 항상 부업을 권했다. 그리고 월급을 아낀 돈으로 어디엔가 투자를 했다. 물론 아버지의 투자금은 지금까지 깜깜 무소식이다. 생활비가 부족하다는 엄마에게 아버지는 "당신이 얼마나 호화판으로 살면 그 돈이 부족하냐고 사람들이 나한테 물어 보던데"라고 말했다. 엄마는 아무런 대꾸를 못하고 그 말은 엄마의 가슴에 상처를 남겼다. 지금은 두 분의 관계도 많이 변했다. 이제야 엄마는 아버지에게 복수하고픈 마음이 터져 나오는 것일까?

50년 넘게 엄마 노릇한 엄마, 은퇴할 때도 됐다

50년동안 사남매의 엄마로 살았던 우리 엄마가, 변했다.
 50년동안 사남매의 엄마로 살았던 우리 엄마가, 변했다.
ⓒ s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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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순의 엄마는 하루가 다르게 늙어간다. 쇠약해진 엄마의 몸엔 예전에 보여주던 넉넉했던 품이 깃들지 못한다. 그런 것을 느낄 때마다 솔직히 자식으로서는 낯설고 섭섭하다. 우리 집 첫째가 태어났을 때 나는 매일 엄마에게 전화를 하며 그 시기를 버텼다. '산후 우울증'이란 누구나 다 아는 그 병이 나에겐 무척이나 길고 힘겨웠다. 엄마는 그 시기 내 유일한 동반자였다. 그런데 내 삶의 뿌리인 엄마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예전에 엄마로 돌아와 달라고 부탁이라도 해 볼까? 이런 내 감정은 과연 온당한 걸까?

엄마를 낯설어하고 섭섭해 하는 나에게서 잠시 떨어져서 '나와 엄마'를 찬찬히 보았다. 56년간 사남매의 엄마 노릇을 한 여든의 엄마. 그리고 18년간 삼형제의 엄마 노릇을 한 마흔의 나. 엄마도 엄마이기 전에 한 사람이다. 한 사람의 삶에는 생애 전반의 사이클이 있다. 나고 자라고 늙는 그 과정 중 엄마는 이제 노화의 과정을 밟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예전의 우리 남매를 든든하게 지켜주던 그 시절의 엄마 모습을 여전히 바라고 있다. 늙은 엄마는 이제 당신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들어 하는데 말이다.

사실 오십 년도 넘게 엄마 노릇을 했으면 이젠 그 일에서 물러 날 때도 되었다. 왜 엄마라는 임무엔 은퇴가 없을까? 나는 어떤가? 18년간 내 가장 중요한 임무는 엄마였다. 아이들이 내 품을 벗어나는 것이 아쉽기도 하지만 엄마라는 임무에서 언제쯤 좀 비켜 설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도 많다. 우리 아이들이 내가 팔순을 넘겼음에도 여전히 나에게서 예전의 엄마 품을 기대한다면 난 그 기대가 버거울 거다. 나도 이런데, 엄마는 오죽할까?

이젠 거꾸로 내가 엄마를 보살펴 드려야겠다. 그냥 그 모습 그대로의 엄마를 위로하고 인정해 드려야 한다. 알량한 이기심에 아직은 엄마의 모습이 낯설지만 그래도 나는 노력할 거다. 엄마를 사랑하니까.


태그:#엄마의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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