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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인클럽>은 오마이뉴스가 권력과 자본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한 언론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매달 자발적으로 후원하는 유료 독자들의 모임(http://omn.kr/5gcd)입니다. 클럽은 회원들의 후원으로 '10만인리포트'를 발행하고 있는데요, 이 글 연재하는 김도균 기자는 국방부를 출입하는 오마이뉴스 사회부 기자입니다. [편집자말]


오, 스코틀랜드의 꽃이여.
언제 우리가 다시 볼 수 있을까
너와 같은 사람들을
너의 자그마한 언덕과 골짜기에서
싸우다가 죽어간 사람들을,
그리고 에드워드의 군대를 맞아
맞서 싸운 그 사람들을
그리고 에드워드의 군대를 집으로 돌려보내
다시 생각하게 만든 사람들을

그 언덕들은 황량해졌다네.
낙엽들은
쌓이고 쌓였지만 아직도
우리의 땅은 우리 것이 아니라네,
그 사람들이 굳건히 지켜낸 그 땅은,
에드워드의 군대를 맞아,
맞서 싸운 사람들이,
그리고 에드워드의 군대를 집으로 돌려보내
다시 생각하게 만든 사람들이 지켜온 그 땅이라네.

그 때 그 시절은 지났고,
과거 속에
그 사람들은 남아있지만,
아직도 우리는 일어설 수 있다네,
그리고 다시 나라가 되어,
에드워드의 군대를 맞아,
맞서 싸운 사람들이,
그리고 에드워드의 군대를 집으로 돌려보내
다시 생각하게 만들 수 있다네.

- 스코틀랜드의 꽃 (Flower of Scotland)

"영국과 프랑스가 축구 경기를 벌이면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프랑스를 응원한다."

10여 년 전 런던 출장길에 우연히 만났던 60대 할아버지는 여러 차례 자신을 영국인(Englishman)이 아닌 스코틀랜드 사람(Scotsman) 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짧은 영어로 완벽하게 이해하긴 어려웠지만 한국에서 온 저나 스코틀랜드에서 온 자신이나 똑같이 런던을 처음 방문한 외국인이라는 점을 강조했던 기억이 납니다. 축구를 보더라도 국가대표 단일팀 하나가 아닌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북아일랜드 4개로 나뉘어 월드컵 예선을 치르는 나라답게, 좀 유별난 지역색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당시 기자의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 독립전쟁 이끌었던 '윌레스'와 '부르스'

영국을 이루는 4개 국가 중 하나인 스코틀랜드가 오는 18일(현지시간) 16세 이상의 주민을 대상으로 스코틀랜드 분리 독립 여부를 결정할 주민투표를 진행합니다.

독립안이 투표를 통과하게 되면 오는 2016년 3월 24일을 기해 스코틀랜드는 '그레이트브리튼과 북아일랜드 연합 왕국'(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UK)에서 분리돼 독립국가로 출범하게 됩니다. 스코틀랜드가 연합법 발효에 의해 연합왕국(UK)의 일원이 된 것이 1707년의 일이었으니, 독립이 결정된다면 307년 만에 결별을 하는 셈이죠.

연합왕국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브리튼 섬의 북쪽, 스코틀랜드 지방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8500년 전후입니다. 기원 43년 카물로두눔(오늘날의 콜체스터)에서 남부 브리튼의 열한 개 부족이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에게 항복했을 때도 스코틀랜드는 로마에 복종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문명의 중심이 로마였던 그 때, 브리튼 섬 북쪽의 '거친 족속'들은 로마 사람들에게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골칫거리였습니다. 서기 122년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브리튼 섬 동쪽의 뉴캐슬에서 서쪽의 솔웨이 만까지 113Km에 이르는 긴 장벽을 쌓았죠. 로마의 속주였던 브리타니아의 북쪽, 장벽 너머를 로마인들은 '칼레도니아'라고 불렀습니다. 이 칼레도니아가 바로 오늘날의 스코틀랜드와 얼추 비슷합니다.

2세기 초반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브리튼 섬을 가로질러 쌓았던 하드리아누스 장벽. 이 벽의 북쪽은 칼레도니아로 불렸습니다.
▲ 하드리아누스 장벽 2세기 초반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브리튼 섬을 가로질러 쌓았던 하드리아누스 장벽. 이 벽의 북쪽은 칼레도니아로 불렸습니다.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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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로마가 쇠퇴한 뒤 브리튼섬 남부에 색슨족의 왕조가 들어서고, 1066년 노르망디 공작윌리엄이 쳐들어와 노르만 왕조를 열었을 때도 스코틀랜드는 섬 남부와는 다른 역사를 펼쳐갔습니다. 이곳 주민의 대부분은 브리튼 섬에 이웃한 아일랜드에서 건너 온 켈트족으로 색슨족이나 노르만족과는 구별되는 언어와 문화를 지니고 있었죠.

스코틀랜드 왕국은 잉글랜드를 지배하던 노르만 왕조와의 결혼으로 결속된 비교적 안정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이 평화와 안정은 1286년 3월 스코틀랜드 왕 알렉산더 3세의 뜻하지 않은 죽음과 함께 끝장났습니다. 신하들과 연회를 즐기던 왕이 왕비를 보기 위해 만취한 상태에서 밤길을 나섰다가 그만 말에서 떨어져 목이 부러져 죽고 만 것이죠.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던 딸 마거릿마저 4년 만에 죽자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는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를 점령해버렸습니다.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를 지배한 지 5년째 되는 1296년, 농민 출신 윌리엄 월레스가 잉글랜드의 지배에 저항해 독립 전쟁을 일으켰죠. 멜 깁슨이 감독, 주연한 영화 '브레이브 하트'의 실존 모델이 바로 윌리엄 월레스입니다.

1297년 9월, 스털링 다리 전투에서 월레스는 5천 명에 불과한 군사로 2만5천 명의 잉글랜드 군대를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죠.

이듬해 월레스는 폴커크 전투에서 패하자 도움을 얻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갔습니다. 이후 피신 생활을 하던 그는 1305년 잉글랜드에 매수 당한 스코틀랜드 기사에게 붙잡혀 런던으로 보내져 그해 8월 23일 처형됩니다. 형틀에 묶여 사지가 잘리고 의식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내장이 불태워지는 참혹한 죽음이었습니다.

이렇게 처형된 월레스의 머리는 런던 다리에 걸렸고, 잘려진 팔과 다리는 영국의 네 군데 변방에 반역에 대한 본보기로 보내졌습니다. 하지만 월레스 사후에도 독립을 위한 스코틀랜드인들의 저항은 계속되었습니다.

윌레스를 이어 독립전쟁을 이끌었던 인물은 로버트 더 부르스였습니다. 월레스가 농민이었던 데 반해, 부르스는 귀족출신의 기사(騎士)였죠. 앞서 말씀드린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는 부르스가 조금 나약하고 비열하게 그려지고 있지만, 실제 그는 대단한 무용(武勇)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내리 여섯 차례 잉글랜드 군과의 전투에서 지고 간신히 목숨만 부지했다가, 작은 거미가 여러 번의 실패 끝에 튼튼한 집을 짓는 것을 보고는 다시 독립의 의지를 붙태웠다는 '칠전팔기'의 주인공이 바로 부르스였습니다.

'스코틀랜드의 꽃' 2절 빼고 부르는 이유

베녹번 헤리티지 센터에 있는 로버트 더 부르스의 동상. 스코틀랜드에서 쓰이는 20파운드 지폐에도 그의 초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 로버트 더 부르스 베녹번 헤리티지 센터에 있는 로버트 더 부르스의 동상. 스코틀랜드에서 쓰이는 20파운드 지폐에도 그의 초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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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4년 6월, 마침내 스코틀랜드 군과 잉글랜드 군 사이에 대격전이 벌어졌습니다. 장소는 베녹번 성. 스코틀랜드에서 잉글랜드 군을 완전히 축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베녹번을 함락시켜야 했죠. 하지만 성을 장악하고 있는 잉글랜드 군도 결코 호락호락 하지 않았습니다.

베녹번 성을 둘러싼 전투가 장기화되면서 스코틀랜드 군은 지쳐갔고, 이 기회에 반란 세력을 뿌리 뽑아야겠다고 생각한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2세는 친히 병력을 거느리고 런던으로부터 북상해 옵니다.

스코틀랜드 군의 병력은 약 8천, 여기에 비해 잉글랜드 군은 증원군을 합하면 1만4천이 넘었습니다. 당시 전투의 주력이었던 중장 기사와 멀리서 화살을 날리는 궁수의 숫자도 잉글랜드 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죠. 숫자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의 기병은 잉글랜드의 기병에 상대가 되지 않았고, 스코틀랜드의 궁수들은 잉글랜드의 궁수들에 비해 기량이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수년 동안의 전투 경험을 통해 부르스는 양군의 강점과 약점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부르스는 잉글랜드 기병대의 공격을 상대적으로 약체인 기병으로 맞상대하는 대신 단단한 밀집보병 대형으로 막아내고, 온전히 보존해둔 기병대는 잉글랜드의 궁수들을 공격하는 데 투입했습니다.

이처럼 스코틀랜드 군이 자신의 강점을 극대화 하고 약점을 최대한 보완한 전술을 펼친 반면, 전력상으로 우세했던 잉글랜드 군은 제각기 따로 놀다 무너져갔습니다. 전투 첫날 기병대의 단독 공격은 실패했고, 둘째 날에도 궁수들이 제대로 사격도 하기 전에 기병이 돌격하여 또 패배하면서 궁수들의 사격까지 방해해 버린 것이죠.

결국 6월 23~24일 이틀 간에 걸친 전투에서 패배한 에드워드 2세는 간신히 목숨만 부지하고 도망쳐 버렸습니다. 월레스가 처형당한 지 9년 만에 벌어진 베녹번 전투에서 압승을 거둔 부르스는 스코틀랜드의 왕  로버트 1세로 즉위했습니다. 이후 1326년 벌어진 잉글랜드 2차 침공까지 격퇴한 후 1328년 스코틀랜드는 독립을 쟁취하게 됩니다.



'스코틀랜드의 꽃'은 2인조 포크 그룹 '더 코리스'의 멤버인 로이 윌리엄슨이 작사, 작곡한 곡으로 스코틀랜드 독립의 전환점이 된 베녹번 전투를 모티브로 삼고 있습니다. 1965년 발표된 이 곡은 대중가요로 엄청난 인기를 끌다가, 오늘날 스코틀랜드의 국가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1990년 이후 스코틀랜드 축구팀이나 럭비팀이 다른 나라와 경기를 벌일 때면, 언제나 이 곡이 국가로 연주되고 있는 것이죠.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본선에 나섰던 스코틀랜드 팀의 경기 때도 스코틀랜드의 꽃이 불렸습니다.

이 노래가 국가로 불릴 때는 3절로 구성된 원곡의 가사 중 2절을 빼고 1절과 3절만 부르는데요. 여기에는 베녹번의 승리로 독립을 쟁취했던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가 주축이 된 연합왕국에 합병된 사연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양국 왕실의 혼인관계로 이리저리 복잡하게 얽켜 있었는데요, 1603년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스코틀랜드 스튜어트 왕조 제임스 6세(엘리자베스 1세의 7촌 조카뻘)가 잉글랜드 국왕 제임스 1세로 즉위하게 된 것이죠.

스코틀랜드 왕이 졸지에 잉글랜드의 왕이 되면서 두 나라가 연합국가가 되어버렸고, 1707년 연합법이 통과되어 양국 의회가 통합되면서 한 나라가 되어버린 겁니다. 피땀으로 쟁취했던 스코틀랜드의 독립이 이처럼 허망하게 사라져 버린 것이죠.

이 노래의 2절은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로부터 당했던 핍박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1688년 명예혁명으로 스코틀랜드 혈통인 제임스 2세가 퇴위되고, 그 아들 제임스 3세와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가 복위를 요구하면서 자코바이트(Jacobite)들의 반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들은 통일된 군복대신 챙 없는 푸른 모자와 흰 꽃 모양의 리본장식을 달아 자신이 자코바이트 군임을 나타냈습니다.

군대로 변신한 '영국 은행', 스코틀랜드 압박

챙 없는 푸른 모자에 흰 꽃 모양의 리본장식을 단 자코바이트들의 목표는 스코틀랜드 혈통의 스튜어트 왕가를 복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 자코바이트 반란 챙 없는 푸른 모자에 흰 꽃 모양의 리본장식을 단 자코바이트들의 목표는 스코틀랜드 혈통의 스튜어트 왕가를 복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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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8~1746년 사이 여러 차례 일어났던 자코바이트 반란의 목표는 스코틀랜드 혈통의 스튜어트 왕가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좌에 앉히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1746년 4월 16일 컬로든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이러한 시도는 끝내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잉글랜드 정부는 스코틀랜드 전역의 무기를 몰수하고, 스코틀랜드인의 전통 복장과 소품, 심지어는 전통 언어인 게일어를 사용하는 것도 금지시켰습니다.

이런 점들을 놓고 보면 비록 합의라는 형식을 띄긴 했지만, 잉글랜드와의 병합을 골자로 하고 있는 1707년의 연합법은 보통의 스코틀랜드인으로선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을 겁니다. 더군다나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에 비해 국력이나 인구수에서 월등히(오늘날에도 스코틀랜드의 총인구는 530만 명으로 영국 전체인구의 약 8%, 런던인구 1000만 명의 절반 수준입니다) 앞서고 있거든요.

300년 넘게 이어져온 연합왕국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바람이 스코틀랜드에 불어 닥친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 낙후로 해묵은 민족 감정이 폭발했기 때문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까지 스코틀랜드 산업의 근간을 이루었던 것은 조선업과 항만 시설이었지만 전쟁 통에 독일의 주요 공격 목표가 되면서 큰 타격을 받았죠. 이후 1980년대 마가렛 대처 수상은 강력한 민영화 정책을 추진해 스코틀랜드 경제의 기반이던 철강과 조선 산업을 해체했습니다. 주민 5명중 1명꼴로 실직했을 정도로 스코틀랜드의 경제는 휘청거렸습니다.

스코틀랜드의 분리 독립을 표방하는 국민당이(SNP)이 지지를 얻었던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습니다. 국민당은 1999년 연합왕국으로부터 스코틀랜드의 자치권을 인정받아 자치의회를 구성한 이래, 2011년에는 자치의회의 다수를 구성하면서 분리 독립을 추진했던 것이죠.

독립을 결정하는 투표를 올해 치르기로 한 것도, 스코틀랜드 군이 잉글랜드 군을 격파한 베녹번 전투 600주년이 되는 해가 바로 올해이기 때문입니다.

찬반양론이 팽팽히 맞서고 있어 투표 결과가 어찌 나올지 한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운 상황인 가운데, 영국 정부는 스코틀랜드가 독립하면 이 지역에 있는 스코틀랜드 로열 은행, 로이즈 은행 등 영국계 은행들의 본점을 모두 철수시키겠다고 위협하고 있습니다.

영국계 은행들이 철수하게 되면 얼추 1만 7천개의 일자리가 스코틀랜드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600년 전 베녹번에서 스코틀랜드 군이 맞닥뜨렸던 것이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의 군대였다면, 오늘날 스코틀랜드를 압박하는 군대는 바로 은행가들인 듯합니다.

"아직도 우리는 일어설 수 있다네, 그리고 다시 나라가 되어..."라고 잉글랜드로부터의 독립을 노래하고 있는 '스코틀랜드의 꽃' 3절처럼 스코틀랜드가 독립 국가로 다시 태어나게 될지 아니면 연합왕국의 테두리 안에 머무르게 될지, 투표 결과가 궁금해집니다.

 


태그:#스코틀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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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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