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텍스트(Text)에는 맥락(Context)이 있습니다. 문화 콘텐츠도 마찬가지입니다. 100% 정치적인 예술이 존재할 수 없듯이, 100% 순수한 예술도 없습니다. 문화 공연을 때로는 인문학적으로, 때로는 사회과학적으로 읽어봅니다. 마음에 안 들면 신랄하게 태클도 걸어보고, 재미있으면 '우쭈쭈' 칭찬도 합니다. 공연을 정치·사회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항상 성공하지는 않을 겁니다. 시도가 비록 재미(Fun)는 없더라도, 최소한 '뻔'한 리뷰는 쓰지 않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극단 C 바이러스의 배우들이 연극 <민중의 적 : 2014> 연습을 하고 있다.

극단 C 바이러스의 배우들이 연극 <민중의 적 : 2014> 연습을 하고 있다. ⓒ 곽우신


비좁은 연습실의 벽은 사방이 까맣다. 까만 벽에는 하얀 분필로 달력과 창문, 액자 등이 그려져 있다. 변변한 소품도 없다. 낮은 단상과 막대기 정도가 전부다. 창문 하나 없는 지하 연습실은 답답할 정도로 더웠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날 정도다. 연습에 매진하는 배우들의 옷에는 땀자국이 선명했다. 탈탈거리며 돌아가는 낡은 선풍기 하나만으로는 연습실을 가득 메운 열기를 식히기 어려워 보였다.

"우리의 고통이 어디서 비롯되었십니꺼? 전자파 때문이 아입니다. 저 성도일씨와 같은 사람들이 수 년간 불순한 외부 세력의 사주로 우리 마을을…."

지난 8월 말부터 시작된 연습, 아직 배우들은 대사와 연기가 몸에 익지 않아 보였다. 긴 대사를 혼자 소화하고 있던 배우가 잠시 멈칫하자 곧바로 연출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아직도 본인 대사를 제대로 모릅니까?"

배우는 주눅 들지 않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더니 다시 대사를 외쳤다

"불순한 외부 세력의 사주로 우리 마을을 파괴하려고 했기 때문 아입니까? 마, 다 제 부덕함 때문입니데이. 이 못난 읍장을 용서하이소!"

지난 15일 오후 7시 30분, 서울시 성동구에 위치한 극단 'C 바이러스'의 연습실 풍경이다. 이들은 오는 10월 2일부터 막을 올리는 연극 <민중의 적 : 2014>를 위해 한 달 가까이 땀을 흘리고 있었다.

19세기 노르웨이의 <민중의 적>, 2014년 대한민국 밀양으로 오다

 연극 <민중의 적 : 2014>에서 의사 성도일 역을 맡은 김정석씨가 연습을 하고 있다. 주인공 성도일은 송전탑의 폐해를 양지마을 주민들에게 밝히고 반대 투쟁을 독려하는 인물이다.

연극 <민중의 적 : 2014>에서 의사 성도일 역을 맡은 김정석씨가 연습을 하고 있다. 주인공 성도일은 송전탑의 폐해를 양지마을 주민들에게 밝히고 반대 투쟁을 독려하는 인물이다. ⓒ 곽우신


<민중의 적 : 2014>는 노르웨이의 극작가 헨릭 입센의 작품 <민중의 적>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헨릭 입센은 현실을 고발하고 사회 문제를 지적하는 작품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민중의 적>은 사실주의 희곡의 대가로 불리는 그의 작품 중에서도 '4대 문제작'으로 꼽힌다. 헨릭 입센이 1882년에 쓴 이 작품은 1883년에 처음으로 무대에 올랐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유럽사회의 허위의식과 위선을 고발하고 다수의 몰이해를 비판했다.

극단 'C 바이러스'의 대표이자 <민중의 적 : 2014> 연출을 맡은 이문원(49)씨는 19세기 말 노르웨이 남부 해안가를 2014년 대한민국 밀양으로 옮긴다. 갈등의 중심은 오염된 온천에서 송전탑으로 바뀌었지만 문제의식은 변함없이 날카롭다.

진실을 밝히려는 소수의 인물과 이익을 위해 이를 숨기려는 다수가 존재한다. 한 때 진실을 위해 헌신했으나 권력과 결탁하여 배신하는 자가 있고, 집단 이기주의에 매몰되어 현실을 부정하는 이들이 있다. 결국 민중을 위해 움직였던 사람이 '민중의 적'으로 낙인찍힌다. 진정한 민중의 적은 누구인지 이 문제작은 세기를 뛰어넘어 질문을 던지고 있다.

"망해라 경제여! 사라져라 권력이여! 깨어나라 민중이여!"

한동대학교 언론정보문화학부 공연영상전공 교수이기도 한 이문원 대표는 이 대사가 "사실상 내가 가장 하고 싶은 말"이라고 했다. 작품을 연출하는 데 있어서 세월호 참사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그는 밀양의 문제가 밀양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4월 16일 이후, 이 땅의 누구도 나와 관계없는 고통과 눈물에 눈 감고 살아온 수치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됐습니다."

이 대표는 밀양을 배경으로 선택한 이유에 대해 "고통받는 분들에게 같이 싸우는 사람이 있다는 점을 알려드리고 싶다"고 설명했다. 이어서 그는 "밀양의 할매·할배들이 얼마나 외로우시겠냐"며 "잊히는 것이 두려우실 분들께 아직 옆에서 함께하는 사람이 있다는 확신을 드리고 싶었다"고 연출 의도를 밝혔다.

그 때문인지 이 대표는 이 작품의 연출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었다. 배우들의 작은 눈짓과 몸짓까지 꼼꼼하게 확인했다. 대사의 톤, 배우들 간의 미묘한 합, 소품의 등장 타이밍에 대해 하나하나 고민했다. 연습하는 배우가 대사를 한 번 할 때마다 대사량 이상의 주문을 쏟아냈다.

"이 작품 하나가 세상을 바꾸지는 못하겠지만..."

 연극 <민중의 적 : 2014>의 연출을 맡은 이문원씨가 소속 배우들에게 연기 지도를 하고 있다.

연극 <민중의 적 : 2014>의 연출을 맡은 이문원씨가 소속 배우들에게 연기 지도를 하고 있다. ⓒ 곽우신


배우들의 열의도 크다. 연출의 지시를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즉석으로 여러 제안을 해본다. 배우들은 연습 중 잠깐 쉬는 시간에도 대사를 계속 연습하거나 인물의 심리 표현에 대해 갑론을박 했다.

"작품 하나가 세상을 바꾸지는 못한다. 그래도 공감하는 사람들에게 같이 분풀이 하고 힐링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다. 밀양 송전탑 문제를 자세히 모르는 분들에게는 정보를 전달하고, 관심이 없는 분들에게는 관심을 촉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다."

주인공 성도일 역을 맡은 김정석(36)씨는 <오마이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팀 전체가 밀양에 다녀왔다"며 "할매들을 뵙고, 주민들과 얘기를 나누고 돌아오니 부담감이 훨씬 커졌다"고 털어놨다. 김씨는 "진정성이라는 말은 자칫 위험하고 모호한 말이 될 수 있다"며 "그 진정성을 어떻게 관객들에게 전달할지 고민이 많다"고 말했다.

이 작품에서는 주동 인물보다 반동 인물이 더 많다. 읍장 성창일 역시 대표적인 반동 인물이다. 그는 '국가의 안보', '경제적 위기', '선량한 시민 의식' 등을 강조하며 성도일을 궁지에 몰아넣는다. 성창일 역할을 연기하는 김경덕(29)씨는 "인간 김경덕의 속마음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연기해야 하는 역할이라 많이 어렵다"고 말했다.

김씨는 "성창일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 작품을 보고 약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봐줬으면 좋겠다"며 "그 사람들의 입장을 고려하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문원 대표는 이 연극에 "완벽한 악인은 없다"고 전제했다. 주동 인물이든 반동 인물이든 절대선이나 절대악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밀양 송전탑 건설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입체적으로 살아있는 인물을 통해 양쪽 입장을 최대한 다 실으려 노력"하는 작품이다.

김정석씨의 말마따나 "세상을 바꿀 수 없는" 이 작품 하나에 이들은 왜 이리 정성을 쏟는걸까. 이문원 대표는 보도자료를 통해 연출의 변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그런데 말이다. 이 초라한 연극 한 편이 과연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바닷가에서 어떤 소년이 파도에 밀려나온 불가사리를 물에 던져 넣고 있었다. 이를 보던 어떤 어른이 딱하다는 듯이 한 마디 했다. '얘, 이 많은 불가사리들을 네가 어떻게 다 살리겠다는 거냐? 그냥 가만 두거라' 소년이 답했다. '적어도 제가 들고 있는 이 한 마리는 살릴 수 있어요' 그는 그 불가사리를 힘껏 바다로 던져 넣었다."

<민중의 적 : 2014>는 오는 10월 3일부터 12일까지 대학로 소극장 '천공의 성'에서 관객과 마주한다. 공연이 끝난 후에는 '관객과의 대화' 시간을 통해 함께 소통하는 자리를 열 계획이다. 특히 밀양 송전탑 투쟁으로 지친 밀양 할매·할배를 직접 모셔와 어우러지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민중의 적 : 2014> 포스터 오는 10월 3일부터 막을 올리는 <민중의 적 : 2014>의 포스터이다. <민중의 적 : 2014>는 헨릭 입센의 동명 원작을 밀양 송전탑 문제에 대입해 각색한 작품이다.

▲ <민중의 적 : 2014> 포스터 오는 10월 3일부터 막을 올리는 <민중의 적 : 2014>의 포스터이다. <민중의 적 : 2014>는 헨릭 입센의 동명 원작을 밀양 송전탑 문제에 대입해 각색한 작품이다. ⓒ 극단C바이러스



극단C바이러스 밀양 송전탑 연극 헨릭 입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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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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