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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장에서 상연되고 있는 연극 <살아 있는 이중생 각하>.
 국립극장에서 상연되고 있는 연극 <살아 있는 이중생 각하>.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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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친일파가 다 비양심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 모두가 끝까지 재산과 지위를 꼭 붙들고 놓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개중엔 양심적 친일파로 분류해줄 만한 이도 있었다. 지난 12일부터 오는 28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상연되는 <살아 있는 이중생 각하>의 주인공만큼은 그렇게 분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살아 있는 이중생 각하>는 평양 출신의 시나리오 작가인 오영진(1916~1974년)이 만든 작품으로, 1949년 5월 중앙극장에서 초연된 이래 이번까지 총 열두 차례 공연되었다. 1940년대 및 1950년대의 서민대중이 어떤 눈으로 친일파를 바라봤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연극의 주인공인 이중생은 일제 강점기 때는 악착같은 친일파로 살았다. 이중생(李重生)이란 이름에 담긴 의미에 관해서는 뒷부분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그는 일본을 하늘처럼 떠받들며 그 대가로 거부를 축적했다. 그는 남들이 기피하는 강제징병에 자기 아들뿐만 아니라 하인의 아들까지 떠다밀었다.

덕분에 이중생은 총독부의 환심을 더욱 더 많이 살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최고 반열의 친일파에 올랐다. 조롱의 의미가 담겨 있기는 하지만, 그를 가리켜 '이중생 각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그가 그만큼 높은 지위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탈세·배임·공금횡령 등을 서슴지 않았던 이중생

이중생이 떠받든 일본이라는 하늘은 무너졌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했다. 일본이 항복한 1945년 8월 15일로부터 불과 3주 뒤인 9월 8일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해서 일본의 뒤를 이어받았다. 그러자, 이중생은 미국을 하늘처럼 떠받들기 시작했다.

절묘한 처신 덕분에 이중생은 기존의 재산을 고스란히 보존했을 뿐 아니라, 일본인들이 두고 간 재산까지 관리하게 되었다. 미 군정청의 지원 하에 귀속재산(미군정이 확보한 일본인 재산)의 관리인이 된 것이다. 관리인의 지위를 활용해서 그는 더욱 더 많은 재산을 축적했다. 그는 탈세·배임·공금횡령 등을 서슴지 않았다.

이중생은 일본제국주의에 아들을 바쳤다. 그는 미제국주의에는 딸을 바쳤다. 미군정과의 관계를 돈독히 할 목적으로 미국인 브로커에게 둘째 딸을 애인으로 소개해준 것이다. 세상의 손가락질에 아랑곳없이 그는 그렇게 미국 앞에서 꼬리를 흔들며 재산과 지위를 늘려갔다. 그러는 새 그의 가슴속에서는 대한민국 장관을 해보고 싶다는 야심까지 생겨난다.

그러나 이중생의 무패가도에도 구멍이 생겼다. 미국인 브로커가 실은 사기꾼이었던 것이다. 미국인의 사기 행각이 밝혀지면서, 그의 치부 전선은 한 번에 무너졌다. 덩달아 이중생 자신의 비리까지 일순간에 공개된 것이다. 그는 감옥에 갇혔고, 국회에서는 특별조사위원회가 꾸려졌다.

보석금을 내고 석방되기는 했지만, 이중생이 감옥살이와 재산 몰수를 모면할 방법은 없어보였다. 이때 그의 변호사가 기막힌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기막힌'이란 것은 이중생의 입장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변호사는 그에게 자살 쇼를 권했다. 경제범죄를 저지르기 이전에 사위에게 전 재산을 물려준 것처럼 거짓 유서를 써놓고 자살을 가장하라는 것이었다.

파격적 가짜 유서 작성 뒤 관 속에 들어간 이유

이중생에게는 의사와 결혼한 첫째 딸, 미국인의 애인이 됐다가 버림받은 둘째 딸, 강제징병으로 끌려간 아들이 있었다. 아들은 강제징병으로 끌려갔지만, 아직 죽은 것은 아니었다. 세 자녀가 멀쩡히 살아 있는 상황에서 이중생은 사위에게 전 재산을 물려준다는 파격적인 가짜 유서를 작성하고 스스로 관 속에 들어갔다.

이중생이 그렇게 한 것은 사위가 만만했기 때문이다. 사위는 양심적이면서도 우유부단했다. 이렇게 만만한 '놈'한테 재산을 물려준 뒤 상황이 잠잠해지면 부활해서 전 재산을 도로 찾겠다는 것이 이중생의 계획이었다.

이중생의 이름이 이중생(李重生)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거듭 중(重), 살 생(生)은 '거듭나다, 부활하다'는 뜻이다. 이(李)라는 성씨는 둘 이(二)를 연상케 하기 위한 장치일 수도 있다. '이중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는 느낌을 전달하고자 일부러 이씨 성을 부여한 것 같다.

친일파 이중생은 일본 치하에서도 권세를 잡았고 미군 치하에서도 권세를 잡았다. 그런 의미에서 이중생이다. 그는 재산 몰수를 피할 목적으로 자살 쇼를 벌여 수의까지 입은 뒤에 다시 일어났다. 그런 의미에서도 이중생이다.

이 기막힌 작전에 스스로 만족하면서 이중생은 수의를 입고 병풍 뒤의 관 속에 드러누웠다. 어느 '놈'이 문상을 오고 어느 '놈'이 안 오는지 그는 꼼꼼히 계산했다. 그러던 중, 이중생 문제 특위에 속한 국회의원이 방문해서 사위와 나누는 대화를 듣고 이중생은 벌떡 일어서지 않을 수 없었다.

국회의원이 사위에게 한 말은 대략 이렇다. '이중생의 재산이 사위님한테 넘어갔지만, 그 재산을 내놓지 않고는 이 집안이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 재산을 사회에 미리 헌납하는 게 어떻겠는가? 사위님이 의사이니까, 그 재산으로 무료병원을 짓는 게 어떻겠소?'

이중생은 사위가 우유부단하다는 것만 믿고 재산을 넘겨주었다. 그러나 그는 사위가 양심적이라는 것은 계산에 넣지 못했다. 사회를 위해 무료 병원을 짓자는 말에 사위는 순간적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저도 평소 그런 일이 하고 싶었습니다"라며 그는 동의하고 말았다. 친일파 이중생의 재산이 무료 병원의 건립 자금으로 둔갑하는 순간이었다. 나쁜 돈이 착한 돈이 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순간적으로 격분한 이중생은 수의 입은 채로 뛰어나오고, 이에 놀란 어떤 가족은 이중생을 막으려고 병풍 앞으로 뛰어가고 어떤 가족은 국회의원의 눈귀를 막느라 한바탕 쇼를 벌였다. 하지만, 국회의원이 돌아간 뒤 이중생은 모든 게 끝났다는 것을 느끼고 자살을 선택한다. 자살 쇼가 정말로 자살이 된 것이다. 친일파에서 친미파로 중생의 삶을 산 이중생은 그렇게 인생을 마감했다. 

이중생의 자살 쇼는 가족과 변호사 외에는 아무도 몰랐다. 하인들도 몰랐다. 관 밖으로 나와 자살한 이중생의 시신을 보자, 그 집 하인은 "시신이 관 밖으로 나왔다"며 또 한 번의 소동을 일으켰다.

이중생은 어쩔 수 없이 자살을 선택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재산을 사회에 헌납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셈이 된다. 수많은 친일파들이 아무런 반성 없이 권세를 보전한 점을 감안하면, 그는 비교적 양심적인 편에 속한다. 그래서 그는 권장할 만한 친일파라고 말할 수 있다.

'친일파 건재'라는 부조리를 낳게 한 요인

<살아 있는 이중생 각하>의 무대 장치
 <살아 있는 이중생 각하>의 무대 장치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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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속의 이중생을 포함한 친일파 문제의 본질은, 친일파가 등장했다는 데 있다기보다는 친일파가 청산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외국의 지배를 받는 나라에서는 어떤 경우든 간에 친○파가 등장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외국의 지배가 끝나면 친○파도 청산되어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것은 한국 역사의 구조적인 문제와 연결된다. 고려 왕건이 전쟁을 통해 후삼국을 통일한 이래로 이 땅에서는 혁명이나 전쟁을 통한 왕조 교체 혹은 국가 교체가 한 번도 발생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옛 지배층이 새로운 나라의 지배층으로 둔갑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이 같은 한국 역사의 패턴이 친일파의 건재라는 부조리를 낳은 한 가지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워질 때, 신진사대부(개혁적 사대부 그룹)라는 새로운 엘리트층이 등장했다. 신진사대부 중에서도 소수파인 정도전 계열만 역성혁명을 지지하고, 다수파인 정몽주 계열은 혁명을 거부했다. 그래서 정몽주 계열도 결과적으로 구세력이 되었다. 이들은 기존의 구세력인 권문세족과 결과적으로 한 편이 되었다.

권문세족과 정몽주 계열은 조선이 세워진 뒤에도 재산과 지위를 상당부분 보전했다. 정치적 주도권만 상실했을 뿐, 경제적·사회적 지위는 잃지 않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조선 건국을 계기로 상층의 엘리트만 약간 바뀌고 지배층의 색깔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고려 멸망 및 조선 건국의 과정에서 혁명이나 전쟁이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실의 지위를 보호하는 데만 급급했던 고종

조선(대한제국)이 망하고 일본이 들어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권력의 최상층부가 한국인에서 일본인으로 바뀌었을 뿐, 전반적인 엘리트 구조는 별로 바뀌지 않았다. 조선총독부가 원활한 식민통치를 위해 지주와 양반의 특권을 거의 그대로 인정하고 주로 서민층에 대해서만 착취를 가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은 주로 평민 출신들에 의해 주도되었지만, 이회영이나 김가진 같은 일부 양반들도 여기에 가담했다. 하지만 총독부는 "양반 출신들은 독립운동 같은 것을 하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공언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지주나 양반들은 총독부에 협력했기 때문이다.

지주나 양반들이 거리낌 없이 총독부에 협력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고종의 행태 때문이다. 나라를 빼앗기기 전에 고종은 이완용을 앞세운 일본과의 협상(이른바 합병 협상)에서 조선 황실의 지위를 보호하는 데만 급급했다. 조선이란 나라를 없애더라도 황실의 지위만큼은 가급적 보호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황제까지 이렇게 타협적이었으니, 지주나 양반들이 굳이 저항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의 지배층은 거의 그대로 총독부 치하의 상층부로 전환될 수 있었다. 만약 전쟁을 통해 나라를 빼앗겼다면, 이런 일이 발생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미군정이 들어서고 대한민국이 세워질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땅에서는 혁명이나 전쟁이 발생하지 않았다. 독립투사들이 해외에서 소련·중국·영국·미국 등과 함께 대일(對日) 전쟁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이 땅에서는 그런 현상이 발생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 땅에서는 친일파가 강제로 축출될 여지가 없었다.

이처럼 왕건 이후로 한국(엄밀히 말하면 38선 이남)에서는 혁명이나 전쟁을 통해 옛 지배층이 쫓겨난 적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옛 지배층을 완전히 무시하고서는 새 나라를 세울 수 없었다. 그래서 고려의 지배층은 사실상 그대로 조선의 지배층이 됐고, 조선의 지배층은 사실상 그대로 총독부의 여당 세력이 됐고, 총독부의 여당 세력은 사실상 그대로 미군정과 대한민국의 여당세력이 되었다. 각각의 시기마다 정권 핵심부는 바뀌었지만, 전반적으로 보면 지배층은 별로 바뀌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양심적 친일파가 된 이중생, 그러나 현실은...

물론, 유혈을 동반하는 혁명이나 전쟁을 무작정 환영할 수는 없다. 하지만 혁명이나 전쟁을 통해 왕조나 국가가 바뀔 경우, 새로운 나라는 이전 나라보다 훨씬 더 건강하고 훨씬 더 서민 지향적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지난 1천 년간 이런 일이 없었다. 그래서 지난 1천 년간 한국에서는 실질적이고 전면적인 지배층의 교체가 발생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한반도에서는 옛 지배층이 아무런 반성 없이 새로운 나라에서 지배층 노릇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을 위협할 만한 세력이 혁명이나 전쟁을 통해 등장하지 않았고, 새로운 나라를 떠받치는 외세는 궁극적으로 그들 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과거의 잘못에 대해 반성할 필요가 없었다. 재산과 지위를 내놓을 필요도 없었다. 

연극 속의 이중생은 결과적으로 재산을 헌납하고 자살을 선택했다. 그래서 그는 결과적으로 양심적인 친일파가 되었다. 하지만 현실 속의 이중생들은 자식들에게 재산을 물려주고 부귀영화를 늘려 나갔다. 그래서 그들은 비양심적인 사람들이다.

현실 속의 이중생들과 그 후예들이 이제라도 선택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뒤늦게라도 이중생을 본받는 것이다. 연극 속으로 뛰어 들어 이제라도 양심을 되찾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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