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지난 8월 떠난 남유럽 여행은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감상하기 위한 일정이 있었다. 8월 15일 인천을 출발해서 다음날 스페인의 마드리드에 도착한 아침, 게르니카를 보기 위해 국립 소피아박물관으로 향했다.

난 사실 기괴한 소와 말, 기하학적으로 분해된 인간들을 그린 음울한 이 그림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학교에서 배운대로 '전쟁의 처참함을 고발한 피카소의 걸작'이란 정도. 게다가 내게 피카소란 '20세기 최고의 화가', '입체파의 거장', '늙도록 많은 여인들과 사랑을 나눈 천재 예술가'등의 이미지로 기억될 뿐.

덧붙인다면 초등학교 때 '피카소'란 이름의 크레파스가 갑자기 '피닉스'란 상표로 바뀌었는데 그 이유가 피카소가 공산주의자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들은 게 전부였다. 학교에서 내내 그렇게 배웠고, 난해한 그의 그림 이외엔 그 어디서도 피카소를 특별히 접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피카소, <게르니카>, 1937, 캔버스에 유채, 782 x 351cm, 
마드리드, 국립 소피아박물관 소장
 피카소, <게르니카>, 1937, 캔버스에 유채, 782 x 351cm, 마드리드, 국립 소피아박물관 소장
ⓒ 박현옥

관련사진보기


아침 일찍 가서 기다리다가 박물관 문이 열리자마자 입장한 덕분에 거대한 크기의 '게르니카'를 한가롭게 몰입해서 감상할 수 있었다. 현지 가이드의 설명, 이번 여행에 동행하신 미학 교수님의 강의, 사전에 받은 안내 책자의 도움을 받아 그 그림을 감상했다. 그곳엔 게르니카를 그리기 위한 피카소의 사전 드로잉이 여러 장 함께 진열되어 있었다. 미로와 달리의 그림들도 많이 있었지만 내 머리엔 피카소의 게르니카만이 남았다.

그 다음날은 실제 그림의 현장인 스페인 북서쪽 바스크 지방에 자리한 게르니카로 향했다. 8월 17일, 날은 더 없이 맑고 상쾌했다. 자그마한 소도시인 게르니카는 붉은색 스페인 기와에 흰 벽을 가진 아름다운 집들이 그림 같이 어우러진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과거에 처참한 폭격과 상흔을 겪은 마을이라곤 믿기지 않았다.

마을 공회당에서 내려다본 게르니카 .
 마을 공회당에서 내려다본 게르니카 .
ⓒ 박현옥

관련사진보기


전쟁 중에 파괴된 바스크인의 상징인 참나무 거목의 남은 일부
 전쟁 중에 파괴된 바스크인의 상징인 참나무 거목의 남은 일부
ⓒ 박현옥

관련사진보기


게르니카 마을에 설치된 실제 크기의 게르니카 모사품
 게르니카 마을에 설치된 실제 크기의 게르니카 모사품
ⓒ 박현옥

관련사진보기


표면적으로 게르니카 폭격의 명분은 스페인 내전중인 프랑코 장군에 대한 나치의 지원이었다. 1937년 4월 26일은 게르니카의 장날이었다. 나치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이날을 택해 게르니카에 5만 발의 포탄을 퍼부었다. 게르니카 폭격은 무고한 양민을 상대로 전쟁 준비 중이던 독일 나치가 자신들의 비행기와 폭탄에 대한 성능테스트를 위해 감행한 것이었다. 폭격은 서너 시간 밖에 되지 않았지만 불길은 사흘이나 지속되었고, 이 작은 도시 인구의 1/3인 160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도시의 70% 가량이 파괴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피카소는 경악했다. 마침 의뢰받은 1937년 만국 박람회에 출품할 작품으로 이 주제를 정하고 수십 장의 스케치를 거쳐 이 대작을 완성해냈다. 그리고 이 작품을 통해 온 세상에 게르니카에 저질러진 만행을 알리게 된다. 오늘 동양인인 내가 여기에 와서 새삼 그 처참함을 느끼듯이.

난 게르니카 외에도 한국 전쟁의 비참함을 피카소가 그렸다는 것을 알았다. 한국전쟁에서 저질러진 많은 양민 학살 중의 하나가 군 인구의 4분의 1인 3만5383명이 잔인하게 학살된 신천 양민 학살이다. 이 현장기사를 읽으면서 충격을 받은 피카소가 1951년에 완성한 작품이 '조선에서의 학살(Massacre in Korea)'이다.  그 작품을 보면 죽음의 공포에 질린 네 어머니와 아이들, 언덕 위에는 파괴된 작은 집, 그 언덕 아래에는 여성과 아이들이 끌려왔을 구불구불한 길이 보인다. 그리고 사격 자세를 취한 병사들이 여러 개의 총부리를 어머니들과 아이들에게 겨누고 있다.

조선에서의 학살(Massacre in Korea) 파리 피카소 미술관 소장.
 조선에서의 학살(Massacre in Korea) 파리 피카소 미술관 소장.
ⓒ 박현옥

관련사진보기


우리는 세상의 폭력에 저항하고 분노했던 피카소의 예술가적 면모는 학교에서 배우지 못했다. 우리는 피카소의 반쪽만 배웠던 것이다. 이제야 비로소 난 위대했던 예술가의 그 나머지 반쪽을 이번 여행을 계기로 만나게 된 것이다.

.
 .
ⓒ 박현옥

관련사진보기


게르니카 평화 박물관에 걸린 전쟁으로 파괴후의 게르니카 전경과(위) 복구된 현재의 모습(아래)
 게르니카 평화 박물관에 걸린 전쟁으로 파괴후의 게르니카 전경과(위) 복구된 현재의 모습(아래)
ⓒ 박현옥

관련사진보기


평화박물관 내부의 모습. 그 당시 폭격했던 비행기와 건물의 파편, 당시의 상황등이 전시되고 있었다.
 평화박물관 내부의 모습. 그 당시 폭격했던 비행기와 건물의 파편, 당시의 상황등이 전시되고 있었다.
ⓒ 박현옥

관련사진보기


관람을 마치고 나오자 박물관 직원이 우리에게 인쇄물을 나눠 주었다. 게르니카 평화박물관 재단이 발행한 "평화란? 게르니카의 폭격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은? 오늘날의 세계평화는?"이란 생각거리가 적혀 있었다.

.
 .
ⓒ 박현옥

관련사진보기


게르니카 평화 박물관 앞의 광장에서 버블파티에 신난 아이들.
 게르니카 평화 박물관 앞의 광장에서 버블파티에 신난 아이들.
ⓒ 박현옥

관련사진보기


평화박물관 앞은 마을의 메인 광장이었다. 오늘은 무슨 마을 행사가 있는 날인지 시의 상징인 참나무 걸개 그림 아래 시민들이 한가롭게 모여들고 있었고 아이들을 위한 버블파티가 한창 신나게 진행되고 있었다. 늦여름 어느날 게르니카 시민들의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27일,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본 신문에는 그때까지도, '세월호 특별법'은 한 걸음의 진전도 없이 숨통이 막힌 채 표류하고 있었다.

우리도 게르니카의 게르니카 평화 박물관처럼 팽목항에 '세월호 박물관'을 지녀야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도대체 왜 이런 기막힌 사고가 이 사회에 일어났던가를 명명백백히 밝혀서 반성하고 다시는 이런 참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거울로 삼는 게 우리의 당연한 의무가 아닐까. 우리의 세월호 박물관에 그 당시의 기록물 상황등을 각계각층이 모두 합심해서 전시하고 표현하고 보여주어 각성의 기회를 삼아야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너무나 가슴 아파 외면하고 잊고 싶지만 절대 그럴 수 없고, 나는 예외라고 부정할 수도 없는 이 세월호 참극을 보면 그저 먹먹하다. 자식 키우는 부모지만 장삼이사에 불과한 내가 우리 애들의 미래를 위해 힘을 보태야할 일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이다.

게르니카의 어린 아이들이 역사의 상흔을 딛고 밝고 행복한 일상을 즐기듯이 우리 아이들에게도 그런 참사가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을 안전한 일상을 되돌려줘야 되지 않을까.

수많은 예술가들이 존재하는 이 땅에서 한국의 '게르니카'를 기대해도 좋을까?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예술가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일에 무관심 할 수 있겠습니까? 회화는 아파트나 치장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술은 슬픔과 고통을 통해서 나온다. 위대한 예술은 언제나 고귀한 정신을 보여준다."
- 파블로 피카소


태그:#게르니카, #피카소, #남유럽여행, #소피아 박물관, #바스크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