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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 저는 <오마이뉴스> 기자 중 가장 먼저 진도에 도착해 약 한 달을 머물렀습니다. 이후 대부분 기자들이 현장을 떠났고, 계절이 두 번 바뀌어 9월이 됐지만, 세월호 침몰사고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우연히 진도에 머무는 동안 찍었던 사진을 다시 더듬었습니다.

당시 흘려보냈던 사진 중 몇몇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다시 꺼낸 그날'의 사진엔 반성, 후회, 분노 그리고 아픔이 담겨 있었습니다. 9월 첫날, 저는 다시 진도에 왔습니다. 그리고 '그날'의 사진을 한 장씩 꺼내려고 합니다. '기억은 곧 존재'라고 믿습니다. 사진기자도 아닌 제가 그날의 사진을 다시 꺼내는 데는 별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그저 '잘' 기억하고 싶을 뿐입니다. - 기자 말

4월 16일 사고 소식을 듣고 황급히 진도로 내려가는 도중, 민간인 자격으로 구조작업에 참여한 조도 면장(어민)과 전화통화를 할 수 있었다. "전원 구조"라는 보도가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던 중이었다. 조도면장과의 대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구조자는 몇 명 정도 되나요?
"한 170, 180명 정도나 될까?"

- 탑승 인원이 400명 정도라던데(당시 정확히 집계되지 않음)….
"그건 나도 잘 몰라."

- 그럼 나머지 분들은 배에 있단 말이에요?
"그럴 수도 있지."

통화 당시 조도 면장은 언론 보도를 접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정부의 발표와 이를 토대로 한 언론보도를 믿고 싶었지만, 현장에서 구조작업을 한 조도 면장의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더군다나 조도 면장이 "구조작업할 땐 해경, 해군과 무전을 하기에 무전내용을 알 수 있다"고 말한 터라 마냥 무시할 수 없었다. 아래는 당시 구조현장에서 조도 면장이 찍은 사진 세 장을 문자 메시지로 받은 것이다.

4월 16일 사고 소식을 듣고 황급히 진도로 내려가는 도중, 민간인 자격으로 구조작업에 참여한 조도면장(어민)과 전화통화를 할 수 있었다. 사진은 당시 구조현장에서 조도면장이 찍은 사진 세 장을 문자메지시로 받은 것이다.
 4월 16일 사고 소식을 듣고 황급히 진도로 내려가는 도중, 민간인 자격으로 구조작업에 참여한 조도면장(어민)과 전화통화를 할 수 있었다. 사진은 당시 구조현장에서 조도면장이 찍은 사진 세 장을 문자메지시로 받은 것이다.
ⓒ 박종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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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도 면장의 말은 사실이었다. 당시 "전원 구조"라고 했던 정부는 구조작업을 돕던 어민보다 현장 상황을 모르고 있었다.

사고 현장 주변의 어민들은 지난달 21일 광주지법에서 열린 세월호 선원들의 10차 공판에 증인으로 참석해 "(사고 당시) 구조여건은 아주 좋았다"고 말했다(관련기사: 그날, 세월호 주변 선박들 "구조 여건은 아주 좋았다").

하지만 좋은 구조여건에도 국가는 국민을 살릴 능력이 없었다. 이후 '관피아'의 실체와 이에 따른 세월호의 부실운영, 재난대응시스템의 허술함 등이 속속 드러났다.

새누리당은 세월호 침몰사고를 '교통사고'로 규정했다(관련기사: 주호영 "세월호는 교통사고라는 게 기본 입장", 홍문종 "세월호는 일종의 해상 교통사고").

맞다, 국가가 저지른 교통사고.

[다시 꺼낸 그날 ①] '내 자식은 살아있겠지...' 어찌 그날을 잊을까


태그:#세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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