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까꿍이가 유치원을 다닌 지도 어언 6개월째다. 그동안 봄, 여름 두 번의 계절이 지나갔고, 녀석도 하루가 다르게 성장 중이다. 비록 개학식을 끝내고 와서는 엄마에게 또 방학이 언제 오냐며, 하루 유치원 가고 이틀 방학했으면 좋겠다고 앓는 소리를 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씩씩하게 집을 나설 만큼 의젓해졌다. 일찍 일어나 혼자 양치하고 세수하고, 유치원에 입고 갈 옷을 직접 고르기까지 하는 까꿍이.

특히 부모의 입장에서 녀석이 가장 대견하다고 느낄 때는 동생들을 돌보는 경우다. 손이 부족한 엄마와 게으른 아빠를 대신하여 동생들을 달래고, 윽박지르며 쥐락펴락하는 누나의 위엄이란. 아, 그래서 대부분의 첫째 딸들이 남동생에게 "내가 너를 업어 키웠다"고 하는구나하고 새삼 느낀다.

자 따라해봐~~
▲ 쪼르륵 삼남매 자 따라해봐~~
ⓒ 정가람

관련사진보기


그러나 까꿍이의 성장이 늘 흐뭇한 것만은 아니다. 결국 나이를 먹는다는 건 그만큼 속세의 때가 묻는다는 건데, 부모의 입장에서 순수함을 잃어가는 자식의 모습이 조금은 안타까울 때도 있다. 왜 선생님이 스티커 나눠주는 순서에 그토록 예민해 하는지, 왜 여자는 '멋진'이 아니라 '예쁘다'는 표현을 해줘야 좋아 하는지.

어느새 훌쩍 커버린 여섯 살짜리 까꿍이에게 아빠인 내가 갖는 아쉬움들이 늘어만 간다. 다음은 아쉬움에 대한 기록이다.

나이에 민감해진 딸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한 이후 까꿍이의 변화된 모습 중 하나는 놀이터 등에서 제 또래를 만났을 때 녀석이 '나이'를 처음 묻는다는 거다. 그 전에는 "안녕"부터 시작해서 이것저것 물어보던 녀석이 언제부터인가 이런 말을 꼭 꺼내기 시작했다.

"넌 몇 살이야?"

그러고는 까꿍이는 우리에게 다가와 반드시 그 아이가 동생인지, 언니인지, 혹은 동갑인지 알려주었다. 동생이면 의기양양하게, 언니면 조금 아쉬운 듯이, 동갑이면 매우 기꺼워하며 이야기하는 녀석.

누나의 괴력에 눈치 보는 동생들
▲ 내가 무려 여섯 살이다 누나의 괴력에 눈치 보는 동생들
ⓒ 문지영

관련사진보기


뭣 좀 아는 첫째와 카메라만 아는 둘째와 아무 것도 모르는 막내
▲ 여섯살, 네살, 두살 뭣 좀 아는 첫째와 카메라만 아는 둘째와 아무 것도 모르는 막내
ⓒ 정가람

관련사진보기


물론 이런 변화가 모두 유치원을 다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아이가 여섯 살쯤 되면 자연스럽게 모든 대상을 구분, 분류하기 마련일터. 나이는 사람에게 적용시킬 수 있는 가장 쉽고 효과적인 기준이기도 하다. 집에서도 부모한테서 가장 먼저 듣는 말이 몇 살이냐는 질문 아니던가.

다만 유치원이라는 교육시스템은 이런 유아의 나이에 대한 인식을 더욱 강화시키는 듯했다. 아이들을 5세, 6세, 7세 반으로 나누어 생활시키니 당연한 결과다. 까꿍이는 유치원 등교를 하다가 5세반 아이들을 만나면 동생이라며 같이 걷지 않았고, 7세반 아이들을 보면 자기도 내년에는 저렇게 될 수 있다며 부러워했다.

그런 녀석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아니, 짠했다. 물론 나 역시도 커가면서 빠른 79년생이냐, 그냥 78년생이냐를 가지고 수많은 논쟁을 했다. 아직까지도 처음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에게 어떤 존칭을 써야할지 몰라 나이를 물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과정이 결코 유쾌하지만은 않다.

물론 외국처럼 존칭이 사라진다고 그만큼 사람과 사람 사이가 더 평등해지는 건 아니겠지만, 어쨌든 나이로 상대방에 대한 편견을 가지면 얻는 것 보다는 잃는 게 많다는  게 내 지론이다.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나이로 사람 사이를 구분하는 수직사회이고, 그 탓에 소통이 더 어렵지 않은가.

그런데 여섯 살짜리 꼬마가 벌써부터 저 서열의 기준을 내면화 하고 있다니. 그것은 분명 부모로서 씁쓸한 일이다.

스티커 1등으로 못 받았다고 울음 터트린 딸

서로 1등이라 하는 아이들
▲ 누가 더 이쁜가? 서로 1등이라 하는 아이들
ⓒ 정가람

관련사진보기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한 까꿍이가 나이만큼 또 하나 강조하는 것은 바로 순위였다. 1등이냐 혹은 꼴찌냐.

까꿍이가 유치원을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유치원을 마치고 나온 표정이 어둡다 싶더니 집에 도착하자마자 하염없이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지? 유치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적응하기 어려운 건가.

분홍도 경쟁이다
▲ 분홍색 타령 분홍도 경쟁이다
ⓒ 이희동

관련사진보기

그러나 웬걸. 녀석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수업 끝나고 '참 잘했어요' 스티커를 선생님께 가장 먼저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전날에는 1등으로 받았는데 이번에는 1등으로 받지 못해 슬프다고 했다. 물론 이 역시 나이와 마찬가지로 모두 유치원을 다닌 이후로 벌어진 일은 아니다.

동생이 둘이나 있다 보니 까꿍이는 언제나 순서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맛있는 것을 누가 먼저 먹느냐, 누가 먼저 씻느냐, 누가 먼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냐 등 까꿍이와 산들이, 복댕이는 항상 잠재적 경쟁자였다 .

문제는 그런 경쟁심이 유치원을 통해 한층 강화된다는 점이다. 수많은 아이들을 관리하고 통제하려다 보니 유치원에서도 경쟁이라는 메커니즘을 이용할 수밖에 없겠지만, 부모 처지에서 벌써부터 1등을 따지는 딸아이를 보고 있노라니 애잔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인간사에 경쟁이 없을 수 없다지만, 그 조그마한 녀석이 달리기를 해도, 밥을 다 먹어도 걸핏하면 1등을 외치는 모습이란.

이런 누나의 승부욕은 밑의 두 동생들에게도 영향을 끼치고 있는 중이다. 막내야 아직 말을 못하니 그러려니 하지만, 둘째 산들이의 경우 벌써부터 누나에게 지고 나면 씩씩거리며 분을 삭이느라 바쁘다. 누나가 1등이라며 계속해서 자신을 약 올리기 때문이다.

아내는 그런 까꿍이에게 2등을 위로하는 법, 1등에게는 축하하는 법을 가르치려고 노력 중이지만, 어려워 보이는 게 사실이다.

자신이 1등이라는 쾌감이 얼마나 달콤한가. 부디 까꿍이가 크면서 무한경쟁의 논리에 휘둘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물론 그 곁에서 우리 역시 부모의 역할을 다해야겠지만.

<겨울왕국> 엘사의 소품 천국이 돼 버린 집

유치원을 다니고 난 뒤 크게 달라진 행동 중 한 가지는 예전과 달리 색깔이나 캐릭터에 연연한다는 점이다. 전에는 엄마가 입혀주는대로, 신겨주는 대로 따르던 녀석이 이제는 슬슬 자신의 스타일을 고집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여성임을 인지한 후에는 모든 것을 분홍색으로 칠갑하고, 소위 '공주풍'을 고집하는 까꿍이.

물론 여섯 살 아이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옷을 골라 입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만큼 자신의 세계가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집안은 핑크색 옷과 신발, 소품 천국이 되고, 두 남동생에게 물려줄 옷과 신발에는 제약이 생겼다. 그럼에도 자신의 개인적 취향을 떳떳이 말하는 딸내미를 보고 있노라면 부모로서 뿌듯하기도 하다. 어쨌든 그만큼 아이가 성장했다는 것 아닌가.

다만 문제는 그 개인적 취향이 너무 빤한 데 있다. 이는 결국 그 취향이라는 것이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져 또래집단을 통해 확대재생산 되었음을 의미하는데, 대부분의 경우 그 배후에는 아이들을 소비대상으로 하는 자본이 개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겨울왕국> 관람
▲ 비극의 시작 <겨울왕국> 관람
ⓒ 이희동

관련사진보기


역시 겨울왕국
▲ 케이크도? 역시 겨울왕국
ⓒ 이희동

관련사진보기


예컨대 까꿍이는 올해 초 식구들과 함께 보았던 영화 <겨울왕국> 엘사에 꽂혔다. 녀석은 엘사 머리핀에, 모자, 엘사 드레스, 신발 등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겨울왕국 속 공주 스타일을 따라했다. 차에 타기만 해도 <겨울왕국> 노래를 듣고 싶다고 했다. 겨울왕국 타이틀곡 '다 잊어(Let it go)'는 지금까지도 줄줄 외울 정도이다. 그런데 이런 아이들이 어디 까꿍이뿐이겠는가.

엘사 드레스에, 겨울왕국 모자에, 분홍색 우산에....
▲ 이러고 유치원 간다고? 엘사 드레스에, 겨울왕국 모자에, 분홍색 우산에....
ⓒ 이희동

관련사진보기

유치원은 겨울왕국에 대한 집착을 더욱 증폭시키는 역할을 해 준다. 또래의 아이들이 한 장소에 모이는 것만으로도, 그리고 경쟁이라는 메커니즘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유치원은 아이들의 겨울왕국에 대한 관심을 극대화시킨다.

당장 까꿍이만 해도 아이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더운 여름날 땀띠까지 참아내며 엘사 드레스를 입지 않았던가.

요컨대 우리는 아이가 유치원에 다니는 순간부터 아이를 대상으로 하는 자본의 상술에서 아이 지키는 법을 고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아이들이 엘사에 집착할 것이고 그만큼 몰개성화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유치원 교육이 까꿍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이 모든 것이 유치원으로 표현되는 공교육이 추구하는 바일 수도 있으며, 혹은 여섯 살 아이의 자연스러운 성장과정일 수도 있다.

다만 아빠로서, 인생을 조금 더 산 선배로서 바란다. 부디 까꿍이가 나이나 순위, 자본이 규정해 놓은 취향으로부터 자유롭기를.

그래도 그 모든 걸 극복하고 웃어주길!
▲ 집에서도 겨울왕국 그래도 그 모든 걸 극복하고 웃어주길!
ⓒ 정가람

관련사진보기




태그:#육아일기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