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버스터'란 국내 유일의 신조어가 유행한 지도 꽤 오래다. 흥행에 단기간에 성공한 영화나 거대예산 영화를 칭하는 '블록버스터'란 용어의 사촌쯤 될까. 허나 한 구역을 날려버릴(bust) 위력을 지닌 폭탄에서 유래됐다는 걸 떠올려보면, '단기간에 성공한 예술영화'를 칭하게 된 이 조어는 꽤나 서글프고 아이러니하기까지 하다.  

이 아트버스터라는 조어와 상관없이 예술성을 인정받는 것은 물론 관객들의 사랑을 받아온 감독들의 신작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관객들을 만난다.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의 반열에 오른 홍상수, 베를린을 비롯해 신작마다 해외영화제의 러브콜을 받고 있는 이송희일 감독, 작년 선댄스국제영화제에서 <지슬>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던 오멸 감독.

이송희일 감독의 <야간비행>이 지난주 개봉한 데 이어, 홍상수 감독의 <자유의 언덕>과 오멸 감독의 <하늘의 황금마차>가 4일 나란히 개봉한다. <명량>의 압도적 흥행과 <해적:바다로 간 산적>의 신승으로 막을 내린 여름 블록버스터 대전 직후, 풍성한 아트영화의 물결에 동참할 때다.

이송희일 감독의 동시대적 감수성과 놀라운 외연 확장 <야간비행> 

 영화 <야간비행>의 한 장면.

영화 <야간비행>의 한 장면. ⓒ 시네마달


이송희일 감독은 자살을 택한 어느 학생이 죽기 전 엘리베이터에서 웅크려 앉아 있던 CCTV 화면의 처연한 강렬함에 대해 논한 적이 있다. 영화 <야간비행>에서도 잠깐 등장하는 이 가슴 아픈 한 컷이야말로, 갈 곳 없이 갇혀버린 듯한 상황으로 종종 내몰리는 우리네 청소년들의 작금을 상징적으로 포착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야간비행>의 주인공들 역시 마찬가지다. 홀어머니와 함께 사는 우등생 용주(곽시양 분)는 중학교 시절 절친이었던 '짱' 기웅(이재준 분)을 마음에 품고 있고, 또 다른 친구인 기택은 '펀치머신'이라 불리며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는 신세다.

이들을 중심으로 이송희일 감독이 보여주는 학교라는 공간은 삭막하고 메마르기 짝이 없다. 그 와중에 용주와 기웅이 서로를 보듬어 안고 밀쳐내려는 몸부림은 처연하면서도 희망이란 두 글자를 새기기에 충분하다.

<후회하지 않아>에서 두 게이 남성을 멜로드라마의 공식 안에 철저히 들이밀었던 이송희일 감독의 외연은 넉넉하게 확장됐다. 기웅을 좋아하는 용주를 중심으로 성소수자 문제를 비롯해 교육이 직업이 되어버린 교사, 로맨스를 즐기는 중년, 노조 활동에 뛰어든 부모 세대 등 학교와 사회, 학생과 부모, 사람과 구조를 유연하게 연결시킨다.

물론, 그저 한 편의 가슴 아픈 로맨스로 즐기기에도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지난달 28일 개봉해 영화의 제목처럼 우리 10대들의 비행을 진심으로 응원 중이다.

<지슬> 오멸 감독의 흥쾌한 노년과 죽음의 이야기 <하늘의 황금마차>

 영화 <하늘의 황금마차>의 한 장면.

영화 <하늘의 황금마차>의 한 장면. ⓒ 영화사진진


밴드 매니저 뽕똘은 오랜만에 찾아 온 둘째형에게서 들은 큰형님의 이야기에서 과거를 떠올리고, 돈이 궁하던 차에 그 둘은 외면하고 살던 큰형님을 찾아가기에 이른다. 거기서 만난 '성격 좀 있는' 셋째형은 큰형님이 이미 치매에 걸렸고, 암으로 인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들려준다.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2>로 작년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하며 한국영화계를 놀라게 했던 오멸 감독의 차기작 <하늘의 황금마차>은 노인문제와 죽음이란 가볍지 않은 화두를 건네는 작품이다.

그런데 막상 스크린으로 접하는 이 작품은 의외로 흥이 넘치고, 실실 웃음이 배오 나오게 만든다. 그도 그럴 것이, 외견상 매니저 뽕똘이 이끄는 밴드 황금마차(킹스턴 루디스카라는 실제 스카 밴드가 직접 출연한)의 연습과 연주 장면이 다수 들어가면서 마치 몇 편의 뮤직비디오를 삽입해놓은 듯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정서의 핵심은 영화 속 내러티브와 관점과 맞닿아 있다. 유산으로 물려줄 집을 탐내는 동생들에게 큰형님은 함께 여행을 가면 물려주겠다고 말한다.

그래서 시작된 (오멸 감독의 활동 본거지이기도 한)제주도 여행, 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여행은 큰형님에게는 물론 메마르고 팍팍한 일상에 지쳐가던 동생들에게도 작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자기 삶을 돌아보고, 또 그 가족이란 관계를 재고하게 만드는 힘 말이다.

오멸 감독은 그래서 이 여행을 마치 우리가 꿈꾸고 싶은, 혹은 꿈꾸어 볼만한 '꿈결' 같은 정서로 가득 채워 놓는다. 꿈이 어찌 달콤하기만 할까. 장례식을 인생의 축소판처럼 종합적으로 묘사했던 임권택 감독의 <축제>마냥, 오멸 감독은 이 4형제의 여행을 페스티벌로 탈바꿈시켜 놓는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제작하는 인권영화 시리즈 11번째 작품인 <하늘의 황금마차>는 올 체코 카를로바리 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돼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카세료와 홍상수의 만남, 그들이 보내 온 편지 <바람의 언덕> 

 영화 <바람의 언덕>의 모리를 연기한 카세료.

영화 <바람의 언덕>의 모리를 연기한 카세료. ⓒ 전원사


부지런하기로 소문난 시네아스트 홍상수 감독의 신작 <자유의 언덕>은 일본배우 카세료의 출연으로 이미 화제를 모은 바 있다. 홍 감독의 영화 중 외국배우가 주연을 맡은 작품은 <다른 나라에서>의 이자벨 위페르 이후 카세료가 두 번째다.

그러나 그가 출연했다고 해서 달라진 것은 없다. 카세료는 여전히 북촌을 거닐고, 문소리가 예의 그 털털하고 사랑스러운 얼굴로 등장하며, 김의성, 윤여정, 정은채, 기주봉, 이민우 등 홍상수 사단의 배우들도 그대로 등장한다.

다른 것이 있다면, 편지가 내러티브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는 점이리라. <밤과 낮>에서는 일기를, <극장전>에서는 영화를, 그리고 <해변의 여인>에서 메모를 극에 녹여냈던 홍상수 감독은 이번엔 순서가 섞여 버린 편지를 극 전개의 중심에 세웠다. 권(서영화 분)을 찾아 서울에 온 모리(카세료 분)가 보내는 2주일을 통해 익숙한 듯 신선한 67분간의 경험을 제공한다. 예의 그 형식과 주제를 일치시키는 세계관과 함께.

"책에 따르면 시간은 실체가 아닙니다. 우리 뇌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틀을 만들어내는 거죠. 하지만 우리가 삶을 꼭 그런 틀을 통해 경험할 필요는 없는 겁니다"라는 모리의 대사는 <자유의 언덕>의 실체다. 그렇게 진화해 버린 우리가 (영화를 통해)사고하는 모리의 2주일은 뒤죽박죽이다. 그의 언어도, 행동도, 그걸 배치한 시간대도 마찬가지다.

끊임없이 회의하게 만드는 '홍상수월드'도 여전하다. 그 안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모리의 2주일은 우리의 틀을 과감히 흔들어 버린다. 올 베니스국제영화제는 <자유의 언덕>을 경쟁부문인 오리종티 섹션에 초청했다. 부니, 낭보가 전해지길.   

야간비행 하늘의 황금마차 자유의 언덕 이송희일 홍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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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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