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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원할 자유> 표지
 <죽음을 원할 자유> 표지
ⓒ 명랑한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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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이다. 온 식구가 모이는 흥겨운 명절. 하지만 이런 명절이 우울한 가족들이 있다. 중증 치매 같은 불치병을 앓고 있는 부모가 있는 가족들이 그 중 하나가 아닐까. 이들에겐 온 식구가 오손도손 둘러앉아 정겨운 시간을 보내는 일이 꿈만 같다. 오히려 부모님 병 수발이나 이에 따른 돈 문제로 형제 간 불화가 폭발할 때가 훨씬 더 많다.

어느 특별한 가족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8월 21일 국회예산정책처가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65세 이상 노인 인구의 치매 유병률은 9.58%였다. 수치로 61만 명에 이르는 비율이다. 치매 환자를 포함해 불치병을 앓고 있는 많은 노인이 병원 중환자실이나 요양병원에 몸을 의탁하고 있다. 조금씩 죽어가는 정신으로 무기력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이들의 모습은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이런 아버지를 가정해보자. 전체 평균 수명을 넘긴 지 한참 되셨다. 그래도 몸은 그다지 나쁘지 않다. 지병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음주나 흡연 등 좋지 않은 습관도 없다. 그런 어느 날 아버지에게 뇌졸중이 일어났다. 1년 뒤에는 심장에 문제가 생겼다. 병원에서는 심장 박동을 일정하게 유지시키는 심박조율기 시술을 권한다. 어떻게 할까.

저널리스트인 <죽음을 원할 자유>의 저자 케이티 버틀러는 아버지에게 심박조율기를 달기로 결정한다. 심장에 문제가 생겼으니 심박조율기를 다는 일은 일견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저자는 그 의료기기가 가족들에게 일으킨 문제를 하나하나 짚어간다. 이 책은 그 모든 과정을 순차적으로 기록한 것이다.

심박조율기가 가져온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무엇보다 저자의 아버지가 겪는 고통이 컸다. 저자의 아버지는 뇌졸중 후 치매로 인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시력을 거의 잃은 채 반식물인간처럼 돼버렸다. 하지만 저자의 아버지는 심박조율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지 못한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모두 잃은 채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아버지를 묘사하는 저자의 붓끝은 처연하기만 하다.

어머니는 힘겨운 간병 과정에서 아버지를 학대하고 스스로를 소진시켰다. 저자는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은연중에 아버지의 죽음을 바란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세차게 내젓는 도덕적 딜레마 속에서 하루하루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낸다. 희망에 대한 기대감에 앞뒤 재지 않고 단 심박조율기는 5년 내내 남은 가족을 '희망의 독재'로 괴롭힌다.

인명을 구하는 일과 죽음을 미루는 일, 구분할 수 있나

'우리'라면 어떻게 했을까. 평상시 죽음을 외면하거나 부정하고, 늙어 죽는다는 것에 대해 그 어떤 깊은 성찰도 해본 적 없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자식들로서 말이다. 우선 병원 말에 그대로 따를 가능성이 높다. 그것이 부모님을 새로 태어나게 해줄 희망의 단서가 되리라 철썩같이 믿을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는 저자가 겪은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의 똑같이 밟게 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해보자. 뇌졸중이나 심장 박동 이상은 노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다. 오래 쓴 자동차에 큰 고장이 잦은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의사는 노화에 수반되는 각종 질병을 싸워 이겨야 할 '적'으로 규정한다. 심박조율기 시술은 그런 '적'과의 전투를 위한 전술의 하나다. 그것의 이점이나 장점을 적극적으로 강조한다. 대개 자식들이 의사의 권유를 큰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배경이다.

저자는 이런 일반적인 경로에 강력한 의문을 제기한다. 저자는 첨단 의료 기법을 동원해 인명을 구하는 일과 죽음을 미루는 것 사이에 명확한 경계선을 긋기 어렵다고 본다. 저자에 따르면 생명이 위급한 상황에 빠진 노인을 치료해 집으로 돌려보내는 일은 또 다른 치명적인 병에 걸리기를 기다리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의료계 내부의 비뚤어진 경제적 유인, 그리고 우리 가족의 무지와 공포와 희망이 과잉의료 행위를 부추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의료기술이 자연사를 상대로 벌이는 놀랍도록 성공적인 전쟁, 우리 조상들이 귀하게 여겼던 '좋은 죽음'의 추방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27쪽)

'좋은 죽음'은 어떤 것일까. 저자는 우리 조상들이 의학에 휘둘리지 않는 자연사를 좋은 죽음의 이상적인 형태로 생각했다고 말한다. 그런 죽음에는 전문가가 필요하지 않았다. 저자는 또한 옛날 사람들이 죽는 법과 임종을 지키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유아기 때부터 시작해 아동기와 청년기, 중년기, 노년기에 걸쳐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며 자랐기 때문에 죽는 법과 보내는 법을 자연스레 터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오늘날은 그렇지 않다. 노화에 따른 노쇠와 각종 질병 등은 의학 기술로 정복해야 하는 치료 대상이 돼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좋은 죽음'은 언감생심이다. 최첨단 연명 의료 기술 덕분에 많은 노인이 모니터와 호흡기에 의지한 채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어간다. 과잉진료의 덫에 빠진 환자와 그 가족들은 자연사라는 전통적인 '좋은 죽음'은 꿈도 꾸지 못하게 돼버렸다.

죽음을 적대시하는 사회... 과잉진료는 어디서 시작되나

메디케어(미국의 사회보장제도) 환자 중 3분의 1 이상이 생애 마지막 해에 수술을 받으며, 10분의 1에 가까운 이들이 생의 마지막 달에 수술을 받고, 5분의 1이 집중치료실에서 죽는다고 한다.
 메디케어(미국의 사회보장제도) 환자 중 3분의 1 이상이 생애 마지막 해에 수술을 받으며, 10분의 1에 가까운 이들이 생의 마지막 달에 수술을 받고, 5분의 1이 집중치료실에서 죽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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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들의 과잉진료 문제는 저자의 아버지가 단 심박조율기 사례를 통해서도 방증된다. 미국 심장 의료 관련 협회들은 1984년부터 심박조율기 치료지침을 발표해왔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심박조율기 권고 증세는 1984년 56가지에서 2008년 88가지로 크게 늘어났다. 그 대다수는 확실한 근거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더 심각한 문제도 있다. 2008년 지침을 작성한 심장병전문의 17명 중 11명은 심장의료기 제조업체로부터 직접 기금을 받았거나 기금을 받는 기관에서 일하고 있었다고 한다. 뚜렷한 과학적 근거도 없는 시술법이 관련 업계와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 의사들 손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셈이다.

의사들의 과잉진료는 노화와 죽음에 대한 그들 자신의 왜곡된 시각이 큰 작용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책을 추천한 서울대 의대 정현채 교수는 의사들이 죽음을 의료의 패배로 여기는 점을 지적한다. 환자와 그 가족들이 현실적으로 겪게 되는 고통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로 말이다.

아버지의 병이 처음에는 엄마를 더 수용적인 사람으로, 나를 더 열린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랬는데 이제 나는 간병이 엄마의 도덕성을 파괴하고 영혼을 부식시켰다는 현실 앞에서 망연자실한 채 계단에 서 있었다. 생명윤리학자들이 연명의료에 관해 토론할 때 그들은 그것이 엄마 같은 사람들에게 어떤 도덕적·육체적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250쪽)

이 모든 문제의 밑바탕에는 죽음을 바라보는 현대인의 삐뚤어진 관점이 자리 잡고 있다. 저자는 과잉진료를 포함한 여러 가지 문제의 근원은 죽음이 눈앞에 닥칠 때까지 죽음과 얽히는 것을 꺼리는 오늘날 미국 문화 내부에 있다고 말한다. 이는 죽음에 무관심하고, 그것을 외면하거나 부정하며 혐오하는 태도를 갖는 우리나라의 현실에도 그래도 적용되는 문제다.

죽음을 적대시하는 문화 속에서 과잉진료는 갈수록 그 규모가 커지면서 사회 전체에 큰 부담이 되고 있다. 저자의 추정에 따르면 과잉진료로 인해 미국 의료체계가 지는 부담액은 한 해 1580억~2260억 달러에 이른다. 메디케어(미국의 사회보장제도) 환자 중 3분의 1 이상이 생애 마지막 해에 수술을 받으며, 10분의 1에 가까운 이들이 생의 마지막 달에 수술을 받고, 5분의 1이 집중치료실에서 죽는다고 한다.

현대의학에 빼앗긴 '죽을 권리'를 되찾아와야 할 때

그렇다고 마냥 자연사를 선택하기도 어렵다. 또한 우리는 조상들이 가진 '좋은 죽음'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전혀 갖지 못했다. 위급한 상황에 처해 급히 병원으로 옮겨진 가족에게는 의사가 권한 최후의 시도를 받아들이는 걸 남은 가족이 마땅히 해야 할 도리로 여긴다. 저자의 말마따나 나쁜 죽음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면서도 그것을 애정과 보살핌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죽음을 향한 느린 의학의 길은 수용의 길이다. 그 길은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는다. 고통은 확연하게 눈에 보인다. … 부모가 독립에서 의존으로, 죽음을 생각하는 것에서 실제로 죽어 가는 과정으로 향하는 길을 곁에서 인도하는 데는 몇 년이 걸릴 것이다. 그것은 영적 시련이다. 첫 타격이 왔을 때, 당신의 부모가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고 당신이 처음 인식한 그날부터 수용의 길을 찾기 시작하라. … 명확한 불치병 진단이 나온 때다. … 임시적 불별에 대한 환상은 이때 막을 내린다. 당신은 부모가 죽는 것을 막을 수 없다. 하지만 죽음의 방식에는 영향을 미칠 수 있다. (359~360쪽)

저자는 더 많은 선물이나 더 많은 의학적 치료 등과 같이 더 많이 주는 것을 사랑으로 여기는 오늘날의 세속적 문화를 꼬집는다. 앞으로는 더 많이 주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 되는 시기가 올 것이라면서 말이다.

사랑하는 부모가 죽기를 바라는 자식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차라리 '좋은 죽음'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것이, 오만한 현대의학이 강요하는 첨단 의료 시술 때문에 무의미한 삶의 고통을 떠안아야 하는 부모를 진정으로 위하는 길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극심한 도덕적 딜레마와 인간적인 고통을 느끼겠지만 말이다.

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죽음을 원할 자유'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 어떤 현대의학이나 첨단 의료기술도 인간의 노화와 이에 따른 자연스러운 죽음을 결코 막을 수는 없겠기에 말이다. 책의 부제가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현대의학에 빼앗긴 죽을 권리'를 되찾아와야 할 때다.

덧붙이는 글 | * <죽음을 원할 자유>(케이티 버틀러 지음, 전미영 옮김 / 명랑한 지성 / 2014. 8. 4. / 383쪽 / 18,000원)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싣습니다.



죽음을 원할 자유 - 현대의학에 빼앗긴 죽을 권리를 찾아서

케이티 버틀러 지음, 전미영 옮김, 명랑한지성(2014)


태그:#<죽음을 원할 자유>, #케이티 버틀러 지음, #전미영 옮김, #명랑한 지성, #과잉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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