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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지하철 2호선 개통 이전의 일이니 지금부터 20년이 넘은 일이다. 내가 사는 집(해운대)에서 출판사(중앙동 인쇄골)에 가려면 길이 항상 막혀 2시간 넘게 걸렸다. 그래서 나는 해운대역에서 출발하여 구포역까지 다니는 통근기차 (1989년부터 2002년까지 다님) 를 많이 이용하였다.

그 당시 통근 기차 횟수가 많지 않았고, 기차 시간에 맞추어 타야 하기 때문에 승객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불편해도 나는 좋았다. 먼 여행을 떠나는 기분을 낼 수 있어서였다. 무엇보다 만원 버스와 달리 기차는 붐비지 않아 책을 읽거나 바깥 풍경에 취하는 재미가 쏠쏠하였다.

<중앙동 복사점>이란 시는 이 무렵에 쓰인 시다.

그러니까 바야흐로 만추였다. 오래도록 '부산 시청'이 존재했던 중앙동은 역사가 깊은 거리라고 하겠다. '일본인 거리'가 있는 이 거리에는 유난히 키 큰 가로수가 많았다. 바다가 가까워서 평소에도 바람이 세찬 편이었다. 바닷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이 허공에 날리다가 우수수 땅바닥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흩날리는 풍경이 마치 중앙동이 무수히 내 안에서 복사되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중앙동은 6·25 당시를 회상케 하는 '사십 계단', '자갈치 시장', '영도다리' 인근 지역으로, 남포동 다음으로 번화가였다. 부산 시청이 연제구로 이전하기 이전이었다. 인쇄소와 출판사들이 줄이어 모여 있었다. '서울 인사동'과 분위기는 사뭇 다르지만, 중앙동은 '서울의 인사동'이라고 할 만큼 고풍적인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어서, 부산지역 예술인들이 즐겨 찾는 다방과 주점들이 많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 그 시절은 PC 보급이나 인터넷 사용이 참 미미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당시 부산 시단(부산시인협회)의 이런 저런 행사나 잔심부름(간사)을 맡아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부산의 유일한 시전문지 <시와 사상>이 창간되었는데, 나는 그 잡지의 편집장 일도 함께 보고 있었다. 해서 거의 매일 중앙동으로 출근을 했다.

 시와 사상, 창간호
 시와 사상, 창간호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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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부산시인협회'도 '시와 사상'도 사무실이 없었다. 전화도 출판사 소유였다. 남의 사무실 한 귀퉁이에서 편집 일을 봐야 했다(출판사에 손님이 많으면 복사점이나 다방이나 음식점에서 일을 했다).

사무실이 없으니 전화기도 복사기도 사무집기도 없었다. 나는 그래서 출판사 직원들에게 눈치 보지 않아도 되는 복사점에서 주로 편집 일을 많이 했다. (당시 복사점에서 PC도 시간당 대여해 주었다.) 요즘 같이 메일로 원고를 받는 게 아니라서, 혹시 원고를 분실할 까봐서 원고가 접수되면 원고를 2부씩 복사해 두곤 하였다.

지금은 모든 것이 인터넷으로 쉽게 처리되지만, 그때는 집에도 인터넷이 되지 않아서, 잡지 만드는 일은 퍽 힘들었다. 아무튼 이런 연고로 나는 <중앙동 복사점>란 시편을 창작케 된 셈이다.

그 '중앙동 복사점' 옆에는 인테리어가 근사한 레코드가게가 있었다(차도 팔았다). 그 레코드 가게에는 참 좋은 음반(녹음테이프도)들이 많았다. 가끔 복사점 옆 레코드 가게에 들어가서 음반을 고루거나 음악을 듣곤 했는데, 그 가게 주인이 자주 틀어 놓은 곡은 알비노니의 '현과 오르간을 위한 아다지오'란 음악이었다.

레코드 가게의 창에서 보면 맞은편 거리에 보험회사와 은행들이 즐비하였다. 입구가 대개 자동회전문이었다. 그때만 해도 부산에 자동회전문을 가진 건물은 그리 흔하지 않았다. 나는 레코드 점 안에서 바깥을 구경하는 걸 좋아했는데, 빌딩안의 사람들이 자동회전문을 밀고 나오는 것이 마치 복사점에서 서류가 복사되는 것 같았다.

어떨 때는 가로수들도 하나 둘 복사되어 줄지어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때 그 레코드 가게 주인은 굉장히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커피 한 잔 시켜 놓고, 제 사무실처럼 볼 일을 보는 나를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러나 난 그 가게 주인에게 별 미안한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 그것은 당시 <시와 사상> 발행인이었던 고 정영태 시인이 그 가게의 단골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 아름다운 레코드점의 창을 통해 허공을 올려다보면 용두산 타워가 보이는 용두산 공원이었다. 마치 지구의 송곳같이 생긴 용두산 타워는, 창마다 복사되어 흐르는 하늘의 구름장들을 한 장 한 장 서류철처럼 철하는 것 같이 보였던, 그 중앙동. 그곳은 내 젊은 날의 시창작의 산실이자, 왕성한 문학 활동에의 무대였다고 말 할 수 있겠다.

내가 중앙동을 헤매 일 때 중앙동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문을 빠져나와 가로수를 저 만큼 세워 놓았을 때 그는 보였다 '중앙동' 전철(電鐵)의 표시탑이 보이고 성냥갑 속의 사람들이 차례로 쏟아졌다. 머리에 하나같이 모자를 눌러 쓰고 회전문을 돌고 돌아 복사되어 나온다. 얼굴은 백지처럼 하얗고 머리는 까맣다. 가로수들이 복사되어 줄을 선다. (중략) 생각도 배고픔도 복사되어 어느 것이 원본인지 알 수 없는 삶, 사람들은 제 그림자를 수정액으로 지우고 한 잔의 소주로 제 그림자 적신다. 아, 중앙동 바람 복사되어 삐라를 날리고 원본을 찾을 수 없는 실족된 중앙동을 빠져나올 때, 저만큼 용두산 타워가 송곳처럼 중앙의 하늘을 찌른다.
<중앙동 복사점> 일부

"송유미의 시 <중앙동 복사점>은 현대철학의 주요한 관심사인 '실재상실'이라는 테마를 손에 잡힐 듯이 이미지화내고 있다. (중략) 원본 실재와의 접촉이 어려워지고 모방되거나 짜깁기된 파생실재들이 양산되는 체제는 시나 인문학적 지혜의 정신을 망각한 정보사회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 사회에서는 삶과 자연의 고유한 인간성과 자연스러움이 체계적으로 벗겨지고 단위와 비율, 그리고 등가성(等價性)이라는 수량적 매개항을 통해서 재단되고 복제된 문화상품들만이 범람한다. 이 인조 상품들은 익명인데다 언제라도 폐기 가능한 것이므로 부담이 없고 또 양산되기 때문에 값싸고 쉽게 구할 수 있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의 모방과 복제, 그리고 리메이크란 문화나 정보의 빈자(貧者) 자리를 피하기 위해 사용되는 가장 편리하고 간단한 방식이다. 근대의 사상과 철학은 '실재의 원본' 혹은 '세상의 중앙'을 찾는데 주력했다. 그러나 근대 이후, 변죽의 한 켠을 돌고 있는 송유미는 "바람마저 복사되어 원본을 찾을 수 없는 실족된 중앙동을 빠져나오면서" 송곳처럼 중앙의 하늘을 찌르는 첨답을 본다.
 <문학 속의 철학 이야기>에서, 김영민 철학자

시인 송유미의 <중앙동 복사점>에서 강조되는 것은 주체와 객체의 상실이다. 주체로서의 사람들도, 객체로서의 '중앙동'도 '원본'을 잃고 복사될 뿐이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자신하는 것들은 사실 어떻게 보면 모르고 있는 것들의 아주 작은 한 부분일 것이다.

모르고 있는 것을 알면 알수록,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한 무력감과 상실감 혹은 자신 없음으로 인해서 오히려 '모르고 지내기'가 마음 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제는 불가능한 전제일 뿐이다. 원본을 잃고 복사되는 세계에서는 '흔적'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해체 시대의 시쓰기와 시읽기>에서, 윤호병 문학평론가

그렇다. 오늘의 우리는 수없이 재빠르게 복제되어 떠도는 인터넷 정보들을 따라가기도 버겁다. 그러나 복제 문화 상품은 접하기 쉽고, 편리 할 만큼 사람의 영혼과 정성을 느낄 수 없다 하겠다. 복제 되고 복제 되어서 쏟아지는 복제 문화 상품 속에서 어떤 것이 원본이고 사본(짝퉁)인지 논의도 무색하게 복제된 문화는 계속 '짝퉁'들을 복제하고 있다. 

불과 20년 남짓 사이 인터넷과 PC 대량 보급으로, 문학 판도 많이 달라졌다. 그때 '부산시인협회' 사무실에는 컴퓨터(요즘에는 너무 흔한) 한 대 도 없었다. 계간 <시와 사상>도 마찬가지였다. 해서 책이 발간되면 정기구독자들의 주소를 일일이 수기로 기입해서 우편 발송했다. 재정이 어려워서 알바생도 둘 수 없어서, 발송할 책을 내가 손수레에 직접 싣고 우체국까지 가야 했다. 물론 몇몇 시인(지인)의 도움이 있기도 했다.

세월은 그냥 흐르는 것이 아닌 듯, 지금은 부산시협도 사무실도 있고, 사단법인체가 되었다. 계간 <시와 사상> 잡지도 한국을 대표 시전문지로 발전했다. 그때 힘들었던 일들이 달콤한 열매로 돌아오는 것 같아 보람된다.

당시 그렇게 힘든 일을 내 일처럼 기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시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었지 싶다. 그랬기에 아무런 보수도 없는 일을 동인 회비(<시와 사상>은 당시 동인들의 회비로 제작되었다)까지 내면서 4년 여 간이나 즐겁게 일을 할 수 있었다 싶은 것이다. 정말 물불을 가리지 못한 시에 대한 짝사랑이었다.   

이제 뒤돌아보면 시간은 물처럼 저 멀리 흘러갔다. <시와 사상> 창간호 발행과 함께 기획 및 편집을 맡아주셨던 문학평론가 김준오 교수님과 정영태 선생님도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은 <중앙동 복사점> 옆 레코드 가게의 커피향이 그립다.

늘 진중하시던 故 김준오 교수님과 유머가 항상 넘치던 故 정영태 시인님도 그립다. 은행잎처럼 노랗게 날리던 행복의 음표들이 허공을 한참이나 맴돌다 사라지는 창밖은 가을이 오고 있다. 나에게 몇 번 남은 가을인지 알 수 없지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문학지 심상에도 송고하였습니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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