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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 2003년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님의 사인을 조사하는 조사관으로 일했다.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재야인사 장준하. 광복군으로, 언론인으로, 그리고 다시 민주투사와 야당 정치인으로 박정희 유신독재에 맞서 싸워온 장준하. 나는 우리 시대 진정한 영웅인 그 분의 진짜 사인을 반드시 밝히고 싶었다.

그래서 시작된 조사 기록과의 싸움. 나는 수천 쪽에 달하는 조사 기록을 수없이 들춰보며 장 선생님의 사인을 규명할 수 있는 단 한 줄의 실마리라도 찾고자 몸부림쳤다. 그렇게 해서 마치 퍼즐 게임의 조각을 찾듯 그 비밀에 접근해 가던 어느 날, 나는 매우 의심스러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바로 박정희 독재 권력의 유지를 위해 앞장섰던 당시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전신 기구)가 작성한 장 선생님의 '동향 일지'중 한 대목이었다.

1975년 7월 29일, 장준하와 김대중 '의문의 만남'

1973년 12월 24일 서울 YMCA 2층 총무실에서 개헌 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발표하는 장준하 선생
 1973년 12월 24일 서울 YMCA 2층 총무실에서 개헌 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발표하는 장준하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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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독재 권력이 가장 무서워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 시대 많은 이들은 크게 두 사람을 꼽는다. 한 명은 1971년 자신과 대통령 선거에서 맞섰던 김대중 전 대통령님이었고, 다른 한 명은 재야의 대통령으로 불리던 장준하 선생님이었다.

중앙정보부는 이 두 사람을 철저히 감시했다. 누가 집을 방문했고 누구를 만났는지, 그래서 어떤 대화를 나눈 후 언제 돌아갔는지 세세히 기록하여 이를 '중요 상황보고'라는 제목의 비밀문서로 남겼다.

당시 의문사위는 이러한 기록 중 일부를 국정원에게 협조 받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가 노무현 정부였기에 어느 정도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 같은 시대에서 그때가 언제였나 싶다. 바로 그 기록 중 1975년 7월 29일, 장준하 선생님에 대한 동향 기록이었다.

당시 중정은 장준하 선생님의 전화는 물론이고 모든 접촉 대상에 대해 전부 동향 일지에 기록했다. 이중에는 이런 정보를 제공할 정보원을 포섭하는 과정에 대한 기록도 담겨 있었다. 예를 들어 Y에 대한 이야기다.

Y는 1973년 당시 유명한 정치인은 아니었다. 그저 김 전 대통령의 동교동 집을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는 측근 중 한명이었다. 바로 이런 Y에게 중정이 접근하여 정보원으로 활동할 것을 요구했다. "만약 협조하지 않으면 구속시키겠다"는 협박도 당연히 곁들였다. 그러자 Y는 중정에게 고민하더니 "3일만 시간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나는 Y가 그 시간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안타까웠다. 하지만 그로부터 3일 후, 중정이 다시 작성하여 보고한 동향일지를 보며 경악했다.

내가 상상했던 Y의 고민은 전혀 달랐다. '차라리 나를 죽여라'. 뭐 이런 것을 상상했는데 그는 "명동에 있는 다른 사람 소유의 4층 빌딩을 내 명의로 해 주면 정보원 활동에 협조하겠다"며 역제안을 했다는 것이 중정의 보고였다. 참으로 경악할 만한 결말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제안을 받은 중정은 어찌 했을까. 더 놀랍게도 중정은 Y의 요구대로 해 줬다고 쓰여 있었다. 정말이지 유신독재가 얼마나 부도덕했는지, 얼마나 극악한 무소불위의 '도둑 정권'이었는지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한편 Y는 이후 3선 국회의원을 지낸 중진급 정치인이 되었다. 나는 그가 방송에 나와 '민주주의 어쩌구'하는 말을 할 때마다 역겨움을 참을 수 없었다.

이렇듯 전화 도청과 측근 포섭을 통한 공작으로 중정은 이 두 분을 철저히 감시했다. 그만큼 이 두 분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는 반증이다. 그런데 1975년 7월 29일에 대한 기록은 여느 때와 달랐다. 내가 기록을 보다가 의문을 느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처럼 철저히 동향일지를 기록하던 중정이 그날은 누구를 만났다는 사실만 적혀 있을 뿐 무슨 대화를 했는지는 한 줄도 쓰여 있지 않은 것이었다. 더구나 그날 장준하 선생님이 만난 이를 보면 더욱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다름 아닌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다.

각자가 누구를 만나 무슨 말을 했는지도 철저히 감시하던 중정이 정작 이 중요 감시 대상자 둘이 만나 3시간 30분간 밀담을 나눴는데 '아무것도 확인하지 않았다'는 것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아직도 이 문서가 우리에게 제공되지 않았을 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고 믿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 중정 핵심 간부 역시 '이 둘이 도대체 무슨 대화를 했는지' 나처럼 궁금했을 것이고, 따라서 확인해서 보고하라고 지시했을 것이라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문서 말미 조치사항에 어떤 비밀이 담겨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였다. 나는 중정 동향일지의 빈 내용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즉시 의문사위 김희수 상임위원 방을 방문했다. 그리고 김 위원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며 김대중 전 대통령의 면담 조사를 추진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김 위원님은 "만나면 좋은데 과연 만나 주겠냐"며 우려했다. 나는 빙긋 웃으며 답했다.

"한번 여쭤나 보죠. 뭐. 안 되면 할 수 없지만 뭐 면담하자고 묻는 것도 안 되겠습니까?"

"나도 꼭 할 말이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뜻밖 답변

1975년 10월 장준하의 49재를 맞아 열린 ‘장준하 추모의 밤’에 참석한 함석헌과 이희호, 김대중(앞줄 왼쪽부터).
 1975년 10월 장준하의 49재를 맞아 열린 ‘장준하 추모의 밤’에 참석한 함석헌과 이희호, 김대중(앞줄 왼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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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정말 의외였다. 면담 요청 공문을 보내면서도 성사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나 역시 생각했는데 불과 3일 만에 그쪽에서 돌아온 답은 뜻밖이었다. "공문을 보고했더니 대통령님도 하실 말씀이 있다며 가급적 빠른 시간 내에 방문하시면 좋겠다고 하신다"는 비서실의 전언이었다.

그야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소식이었다. 사실 성사 가능성이 그리 크지 않다고 여겨 별반 준비도 하지 않았던 나는 그제야 정신없이 면담 조사를 준비했고 그렇게 해서 의문사위 위원장님 등 핵심 간부와 내가 동교동 김대중 도서관으로 찾아간 날은 2003년 12월 18일이었다.

이날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면담은 약 1시간 정도였다. 먼저 김 전 대통령은 인사 말씀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거 독재정권하에서 저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고, 또 목숨도 바쳤습니다. 그런 분들에 대해서 우리가 지금 민주 유공자로서 명예를 회복하고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희생자들 중에 가장 억울한 분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확인되지 못하고 진상이 밝혀지지 못해 '의문사'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는 사실은 돌아가신 당사자 영혼도 그렇고, 가족과 친구들 국민 전부가 참 통탄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면담 조사가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알고 싶었던 것은 처음 장준하 선생님과 알게 된 인연부터였다. 김 전 대통령은 예상보다 더 명료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은 "처음 그분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자유당 치하에서 사상계를 하실 때였고, 그러다가 좀 더 적극적으로 알게 된 것은 6대 국회 때 사상계가 어려워서 주식을 발행한다고 할 때 나도 많이 사들이고, 국회에서 다른 사람한테 권해서 사들이고, 돕고 하면서 자주 접촉하게 됐다"며 "그 후 1969년 '한비 밀수사건' 당시 그 양반이 '밀수 왕초는 박정희'라는 발언으로 잡혀 들어갔을 때 우리들이 석방운동을 하면서 친해졌다"고 말했다.

가장 핵심인 '그 날'에 대해 질문했다. 1975년 7월 29일, 장 선생님이 김 전 대통령의 집을 방문하여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 30분까지 한 3시간 반에 걸친 비밀 회동이었다. 놀랍게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 회동에 대해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간략한 진술이다.

김대중 前 대통령 : "7월 달에 장준하 선생이 찾아 오셨어요. 나는 그때 연금당해서 못 나가 가지고, 그때는 장준하 선생쯤 되면, 미행, 도청, 감시 이런 것은 당연지사니까 그렇게 됐었고. 내 기억에는 오찬을 같이 했는데 그때 유신 철폐에 대해 서로 심도 있게 얘기를 했어요. 장준하 선생이 이런 말을 한 것이 지금도 기억에 있어요.

자기가 이제 희생을 각오하고 싸우겠다. 그리고 당신한테 얘긴데, 사실은 나도 지금까지 어떤 대망을 가지고, 그래서 당신에 대해 라이벌 의식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포기했다. 대신 민주회복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겠다. 당신이 지금 연금 상태라서 움직일 수 없으니까, 나라도 움직여서 내가 하겠다. 우리가 힘을 합쳐서 이 일을 해내자. 그런 얘기를 했던 것이 기억에 있습니다.

그러면서 각계각층을 규합해 가지고, 민주화 운동을 하자. 그때는 유신체제하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성명서 한 장도 전부 불법으로 처리될 때고, 툭하면 사형선고 내리고 투옥되고, 장준하 선생도 그때 참 비장한 각오로 나섰다고 생각됩니다. 장준하 선생이 생명을 걸고, 민주주의 회복에 나섰고, 자기 목숨을 버리겠다는 그런 각오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에요. 그리고 그 모든 실무를 장준하 선생이 다 하기로 했습니다."

"장준하 등산, 말리지 못한 것 안타까워..."

그러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면담 말미에 장 선생님 사건을 예감했던 당시 기억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며 안타까워 하기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난 후 요즘은 소일로 무엇을 하냐고 물으니 그 양반이 하는 말이 산에 다닌다고 하는 겁니다. 등산하면 건강이 좋아지고, 여러 가지 재밌다고 그런 얘기를 하길래. 그렇게 으슥한 산 속 다니다가 신변이 위험하지 않냐. 그렇게 얘기했더니, 사람들하고 같이 다니고, 지 놈들이 나를 어떻게 하겠냐고. 그러는데, 그때 속으로 께름찍 하더라구요. 그때 장준하 선생을 둘러싼 분위기로 봐서는. 그래 가지고 한 달쯤 가니, 그런 사고가 생겼어요."

김 전 대통령은 자신이 그때 보다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은 것은 안타깝다는 뜻도 비췄다. 장준하 선생님 사후 이처럼 결과론적으로 안타까움을 표시한 이들이 참 많았다. 조사팀은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확인하고 싶었다. 장준하 선생님의 사망에 대한 김 전 대통령의 개인적 판단이었다. 특히 장 선생님 사건 이전에 벌어진 그 일, 1973년도 8월 8일 김 전 대통령이 일본에서 납치되어 암살당할 뻔 했던 당사자로서 장 선생님 사망사건을 바라보는 눈이 남 다를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예상보다 김 전 대통령의 말씀은 더 강했다. 매우 확고했다. 그 전문이다.

"그 분이 평소에 어떤 사람보다도 박정희 정권에 대해 과감하게 투쟁했고 언동을 서슴지 않아 그것이 국민이나 지식인들에게 상당히 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때 박 정권은 자기네 집권 계속에 지장이 되면 서슴지 않고 죽이는 거니까, 많은 사람 있지 않습니까, 인혁당 사건이라든가 여러 가지 있고, 나도 그 대상에 들어가고. 그러니까, 장준하씨가 그쪽에서 제거의 대상이 됐다고 해서, 하나도 이상할 일이 없어요."

김 전 대통령은 말을 이어갔다.

"좌우간, 그때 사회 분위기, 정부 태도로 봐서 나나 장준하 선생은 제거의 대상인 것은, 말살의 대상인 것은 틀림없어요. 나는 구사일생으로 살았고, 장준하 선생은 희생이 됐는데, 저것이 꼭 기관에 의해서 했냐하는 것은 내 사건같이 확실한 증거는 없거든요. 내 사건은 확실히 나왔으니까. 여하튼, 그 시대에 장준하 선생에 대한 박해, 음모, 이런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것이 되겠다하는 생각을 가지고, 내 개인으로서는 이것이 그러한 독재정권에 의한 희생이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돌아 가셨을 때도 내가 집에 가서 여러분들하고 얘기했는데...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나는 김대중 전 대통령님이 공인으로서, 그리고 한 국가의 대통령을 지낸 분으로서 이렇게 장준하 선생님의 사망 의혹에 대해 단호하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리라 예상하지 못했었다. 나는 김대중 전 대통령님이 "나도 꼭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신 말씀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바로 '장준하의 죽음은 타살'이라는 확신이었다.

2012년 8월 발견된 장준하 타살 증거, 반드시 밝혀야

지난 1일 검사한 고 장준하 선생의 유골. 오른쪽 귀 뒤쪽 두개골에 원형으로 함몰된 흔적이 있다.
 지난 1일 검사한 고 장준하 선생의 유골. 오른쪽 귀 뒤쪽 두개골에 원형으로 함몰된 흔적이 있다.
ⓒ 장준하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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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면담이 있고 9년 세월이 흐른 2012년 8월 1일, 마침내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의심했던 그 타살의 일부 증거가 명백히 드러났다. 묘지 이장 과정에서 드러난 장준하 선생의 외부 가격에 의한 두개골 상흔이었다.

나는 장 선생님의 두개골 상흔을 확인한 순간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순간 장 선생님의 의문사를 조사하며 내가 느꼈던 몇 가지 의문 사실이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나는 진실을 알게 되었다.

만약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도 그때까지 생존해 계셨다면 뭐라고 하셨을까. 그렇다. 장준하 선생님의 사인 의혹은 반드시 밝혀야 한다. 장준하 선생님의 두개골에서 확인된 상흔이 어떤 경위로 왜 발생했는지 이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지난 의문사위 조사를 통해서 이미 확인된 의혹과 이 의혹 중 하나였던 둥그런 직경 6cm 외력 상흔이 발견된 지금, 장준하 선생의 사인 의혹은 반드시 재조사되어야 한다.

이는 장준하 한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다. 불의한 시대에 맞서 싸우면 억울한 죽음을 당한다는 야만적인 기록을 남겨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설령 야만적인 독재 권력에 의해 그 시절 억울한 죽임을 당할 지라도, 진실은 수십 년 세월 이후에도 반드시 밝혀진다는 정의 실현을 위해 장준하 선생님의 사인 의혹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

2014년 8월 17일. 다시 찾아온 장준하 선생님의 39주기 기일. 나는 오늘 파주 장준하 선생님 묘역을 찾아 참배한다. 그리고 내년 40주기가 되는 2015년 8월 17일 이전에는 장 선생님의 사인 의혹을 비롯한 모든 억울한 이들의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진상규명법이 제정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모두가 다 위대한 민주 투사로, 정의롭게 살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온 정의로운 이들을 기억하고 그들이 어떻게 죽어갔는지 그 진실을 밝히는 일마저 외면하는 사람은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님의 의문사, 39년이면 이미 지나치게 넘치는 시간이다. 그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의문사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에 함께 해 주실 것을 기대한다.

장준하 선생님의 39주기 기일을 엄숙히 추모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고상만 기자는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펴냄)의 저자입니다.



태그:#장준하, #김대중 전 대통령, #의문사 진상규명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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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운동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조사하는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등 군 사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오마이북),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다시 사람이다(책담) 외 다수.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 등 다수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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