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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만 명 가량 남은 이산가족들의 이야기는 상봉 때마다 반짝 관심을 받다가 금방 잊히기를 수년째 반복하고 있다.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은 이산가족 현상은 상봉행사 때만 피상적으로 잠시 보여지다가 잊히기에는 너무 아쉬운 비극이다.

1953년 7월 27일 종전 이후 가족들과 완전히 헤어지게 된 수백만 명의 사연은 이미 지난 60년간 대부분이 사망하며 소리 없이 묻혔고, 남은 이들도 매년 수천 명씩 조용히 세상을 떠나고 있다.

점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는 그들의 기억을, 그 중 한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5편 연속 내러티브 형식으로 생생히 되살려 본다. 대부분의 이산가족처럼 일제시대, 남북분단, 6·25 전쟁과 같은 한국 현대사를 가로지르는 이 가족의 사연도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기록으로만 남을지 모른다. -기자 말

[첫 기사: "아빠, 이제 평양에서 제사음식 맛나게 드세요" ]

1942년 4월 12일, 경북 영주시 안정면 내줄리

수덕은 내줄리 마을 어귀의 철쭉나무 앞에 섰다. 옷가지와 노잣돈 6원이 든 괴나리봇짐이 열일곱 살 소년의 삐쩍 마른 등에서 할랑거렸다. 수덕이 경성으로 올라가 고학을 해보겠다고 하니 할머니, 어머니가 몇날 며칠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이웃들에게 어렵사리 빌린 거금이다.

집안의 자랑이던 장손이 소학교를 지나 보통학교까지 1등으로 졸업했지만 학비를 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6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와 보니 할 일은 농사뿐. 그러나 할머니부터 어머니까지 손을 휘휘 내저었다. 가난이 등짝에 철썩 붙어 떨어질 날이 없었던 집안에서 공부 잘하는 장손은 유일한 보물이자 희망이었다. 총명한 수덕이는 이 시골에서 우리처럼 썩으면 안 되는 거였다.

"니를 공부시켜 주지 못하는 것만 해도 가슴이 아픈데 벌써부터 호미자루를 쥐여주겠나?"

할머니가 울먹이며 말했다. 이웃들에게 6원을 빌어온 할머니와 어머니는 그 이후 몇 달간 낮이면 이웃들의 밭을 매고 밤이면 이웃들에게 줄 옷감 길쌈을 했다. 그 돈을 마련해준 것을 평생 후회하게 될 줄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할머니는 얼굴에 가득한 주름 사이로 흐르는 눈물을 무명 치맛자락으로 꼭꼭 찍어내고 있었다. 어머니, 아버지는 침울하게 먼 길을 떠나는 아들을 바라보고 있고, 남동생 팔성, 창덕과 여동생 순옥만 평소와는 다른 낯선 표정의 형과 부모님을 멀뚱멀뚱 올려다보고 있었다.

"수덕아, 니 부디 꼭 성공하고 돌아오라."

할머니가 말했다.

"늘 건강하고, 꼭 성공해라."

노파는 힘줄이 툭 튀어나온 삐쩍 마른 손으로 손자의 부드러운 손을 꽉 그러잡은 채 한참 동안 놓지 않았다. 할머니의 손이 풀어지자 이내 수덕은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돌아섰다.

봄마다 온 동네에 흐드러지는 철쭉꽃의 바다를 돌고 돌아 수덕의 모습은 저 산 아래로 사라졌다.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는지, 가족들의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았는지, 가족들이 마을 어귀에서 얼마나 오래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 있었는지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 누구도 그것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1943년, 경성 

1940년대 한국 거리를 행진하는 일본 군인들
 1940년대 한국 거리를 행진하는 일본 군인들
ⓒ Pitor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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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맞았을까?

일본말로 외치는 욕설과 고함소리가 귀를 때린다. 여러 개의 군화발이 머리로, 어깨로, 배로, 등으로, 팔로 쉴새없이 우박처럼 쏟아진다. 아까 연속으로 맞은 뺨이 얼얼한 건 느껴지지도 않는다. 옷이 찢어진 것도 같은데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고 군화발을 피하느라 살필 겨를이 없다. 한쪽에서 채인 몸이 저쪽으로 구르면 저쪽에서 또 채여 이쪽으로 구른다. 군화발에 차여 바닥의 흙이 매캐하게 일어난다. 입안에서 흙과 피 맛이 난다.

'엄마가 보고 싶다.'

수덕이 경성으로 올라온 지 꼬박 일년이 넘었다.

고학으로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 고향의 부모님을 호강시키고 싶었는데. 지금 원하는 건 그저 따뜻한 쌀밥 한 그릇. 그리고 매서운 일본 순사들을 피해 다니는 것뿐이다. 집도 절도 없이 시골에서 상경한 열일곱 소년이 고학으로 성공한다는 건 세상 모르는 망상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는 데 일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늘 배가 고팠다.

경성에 올라오자마자 한강 옆 흑석정에 있는 피복공장의 운반공으로 취직했다. 일반 자전거의 두 배 큰 운반용 자전거에 일감과 제품을 가득 싣고 경성 여기저기로 운반하는 일. 만짐을 지고 고개를 올라갈 때면 앞 바퀴가 허공에 뜨면서 뒤로 금방이라도 넘어갈 것 같고, 내려갈 때는 두발을 뻗치고 제동손잡이를 잡아도 목 뒤에 와 닿는 짐들이 금방이라도 와락 온몸을 덮칠 것 같았다.

무거운 짐을 가득 실은 철제 자전거를 몰고 종일 흑석정 고개를 수십 번씩 올라갔다 내려 갔다를 반복하다 보면 점심쯤 이미 녹초가 되지만 종일 먹는 건 곰팡이 낀 콩과 보리 한줌을 섞어 끓인 죽, 멀건 소금국 반 그릇. 일당으로 받는 85전을 한 달 내내 모아봐야 월 25원의 하숙비 내기에도 급급했다. 따뜻한 밥 한 그릇을 꿈꾸며 배고픔에 멀뚱멀뚱 지새웠던 수많은 밤들.

일본 순사도 잘 찾아오지 않았던 산골짝 고향마을과 화려한 도시 경성은 달랐다. 일제 말, 경성거리마다 흘러 넘쳤던 순사들은 수덕의 허름한 운반 자전거가 대로에서 걸치적거린다 싶으면 득달같이 따귀를 때리고 파출소로 끌고 갔다. 파출소에서 시시덕거리는 순사들 사이를 쉼 없이 오가며 장작도 패주고 물도 길어주며 며칠을 보내면 간신히 풀려나기를 십 수 번. 

지금도 그렇다. 일본군 행렬이 다가오는 앞길을 우연히 가로질러 가는 바람에 득달같이 달려온 군인 몇 명에게 돌아가며 따귀를 맞고, 이렇게 군화발로 맞고 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들은 가고 없다.

"으...."

온통 두들겨 맞은 몸을 도저히 금세 일으킬 수가 없다. 흙 바닥에 누워 무심코 쳐다본 하늘은 한없이 청명했다. 고향 내줄리에서 바라보던 파란 하늘 생각이 났다. 그러나 이대로 그냥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고향을 떠날 때 할머니가 몇 번이고 당부하던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꼭 성공해서 돌아오라.'

1944년 3월, 경성발 나진행 열차

         일제시대 증기기관차            .
 일제시대 증기기관차 .
ⓒ 아리랑 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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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액~ 증기기관차 소리가 요란하다. 아직 쌀쌀한 3월이지만 여객칸을 꽉 채운 사람들의 열기로 기차 안은 후텁지근하다. 아까부터 구름색이 뭉근하더니만 이내 부슬비가 추적추적 차창 유리를 때리고 흘러내린다. '뭐 내 마음 같구로...' 수덕은 차창 밖을 우울하게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는 지금 경성을 출발해서 고향 반대쪽으로 160km 떨어진, 북쪽의 흥남으로 가고 있다.

아무리 매일매일 열심히 일해도 돈이 모이지 않아 고민하던 열 아홉살 수덕에게 직장 동료가 흥남의 화약공장은 벌이가 더 좋을 거라고 조언해 주었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이었다. 자원이 풍부하던 북쪽에는 화약과 군수품 공장이 많았고, 전쟁 와중에 일손은 늘 부족했다.

흥남 화약공장에서의 벌이는 예전보다 좋아서 푼돈 모으는 재미가 쏠쏠했다. 일본인 반장들에게 수시로 얻어터지고 동료들도 그렇게 맞는 걸 묵묵히 볼 수밖에 없던 건 고역이었지만.

어쨌든 모은 푼돈으로 고향의 부모님에게 편지도 쓰고 동생들에게 보낼 선물도 샀다. 점잖고 차분한 둘째 동생 팔성이를 위해서는 연필과 공책을 샀고, 극성맞은 장난꾸러기 셋째 동생 창덕이를 위해서는 호루라기를 사서 보냈다.

그 후 몇 달간, 조용하던 내줄리 계곡에는 시도 때도 없이 호루라기 소리가 의기양양하게 울려 퍼지곤 했다. 놀란 산새들이 나무에서 푸드득 날아오르면 동네 어르신들 몇몇이 얼굴을 찌푸리며 "창덕이 저눔저눔..." 하고 혀를 차시곤 했지만 아무도 아이를 혼내지는 않았다.

(* 다음 회에 계속)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지난 4월부터 기자가 김순옥씨와 가족을 인터뷰한 내용, 그리고 김순옥씨의 오빠 김수덕 할아버지의 에세이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태그:#이산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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