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도>와 함께 <명량: 회오리바다>(아래 명량)이 여름 극장가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7월30일 개봉한 <명량>은 첫날 무려 6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군도>가 기록한 개봉일 최대 관객 동원 기록을 일주일 만에 갈아 치워 버렸다.

관객의 평가가 엇갈리는 <군도>와는 달리 개봉 이후 각종 포털 사이트에서 8점대 후반의 높은 관객 평점을 기록하고 있어 <명량>의 돌풍은 주말을 거치면서 더욱 거세질 것으로 예상된다. <군도>로 시작된 올 여름 사극 돌풍은 회오리바다를 지나면서 초특급 태풍으로 전화되고 있다.

흥미진진한 해전의 스펙타클, 그러나... 

 <명량>은 7월30일 개봉했다

<명량>은 7월30일 개봉했다 ⓒ CJ엔터테인먼트


<명량>은 마치 축구처럼 전반부와 후반부가 뚜렷이 구분되는 작품이다. <명량>의 전반부 1시간은 '성웅'이 아닌 인간 이순신의 고뇌와 갈등을 보여준다. 하지만 인간 이순신을 재조명하는 것은 김한빈 감독의 궁극적인 예술적 목표가 아니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명량해전이다. 그는 후반부 61분을 해전의 스펙타클을 보여주는 데 집중시킨다.

전반부 인간 이순신의 고뇌는 후반부 해전의 스펙타클을 극대화하기 위한 극적 장치일 뿐이다. 김한빈 감독에게 중요한 것은 해전 그 자체이다. 그리고 후반부에 자신의 연출적 기량을 모조리 쏟아 붓는다. 그 결과, <명량>의 전반부는 다소 맥이 빠진다. 하지만 후반부는 기대 이상으로 파괴력이 있다.

단지 해전 장면만 놓고 본다면 <명량>은 바다를 무대로 한 그 어떤 영화보다도 흥미진진하다. 지금까지 <명량>처럼 해전을 박진감 있게 묘사한 한국 영화는 없었다(할리우드 영화를 포함해도 손에 꼽힐 정도다). <최종병기 활>에서 입증된 바와 같이 사극과 활극을 결합시키는 김한빈 감독의 기량은 탁월하다.

해전의 스펙타클을 극대화하기 위해 김한빈 감독이 선택한 전술은 백병전(직접 몸으로 맞붙어 싸우는 전투)이다. <명량>은 해전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백병전의 비중이 상당히 높다. <명량>의 이순신은 마치 활극영화의 주인공처럼 긴 칼을 휘두르며 일본군과 직접 맞선다.

 백병전 중심의 연출은 지나친 역사의 변형이라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백병전 중심의 연출은 지나친 역사의 변형이라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 CJ엔터테인먼트


하지만 이러한 설정은 역사적 사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비록 중세시대라고 할지라도 해전의 특성상 총사령관이 직접 백병전에 뛰어드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런 극적 변형은 활극의 쾌감을 극대화하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지나친 역사의 변형이라는 지적을 피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이순신은 포격전으로 수적 우세를 극복했다. 거북선도 포격전을 위한 병기이다. 이순신은 포화력의 우세를 극대화 하려고 '학익진'을 창조했다. '학익진'으로 적선을 포위하고 원거리 집중포격으로 적들을 섬멸했다. 명량해전에서 '일자진'을 선택한 것도 울돌목의 조류를 활용해 철선으로 적들을 한곳에 몰아놓고 원거리포격으로 집중타격하기 위한 것이었다. 때문에 이순신은 근접전, 백병전을 선호하지 않았다.

하지만 <명량>에서 이순신은 적선과 뒤엉켜 백병전을 벌인다. 심지어 백병전 와중에 대장선을 자폭시키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설정이 역사의 왜곡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백병전이 전혀 없다는 것을 입증할 만한 근거는 없다. 하지만 백병전이 명량해전의 주전술은 아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김한빈 감독은 지나친 활극에 대한 욕심(혹은 연출적 편의주의) 때문에 탁월한 전략가, 지략가였던 이순신을 마치 활극영웅처럼 만들었다. 만일 포격전을 중심으로 명량해전을 재연했다면 <명량>은 역사적으로 뿐만 아니라 시각적으로 더 만족스러운 결과에 도달했을 것이다. <최종병기 활>에서 활싸움의 시각적, 청각적 쾌감을 효과적으로 구현한 김한빈 감독이라면 포격전의 묘미도 충분히 매력적으로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

 <명량>에서 류승룡의 활용법은 아쉽다

<명량>에서 류승룡의 활용법은 아쉽다 ⓒ CJ엔터테인먼트


누구나 지적하는 것처럼 <명량>에서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류승룡의 활용법이다(이 점은 <군도>의 강동원과 극적으로 대비된다). 김한빈 감독은 류승룡, 김명곤(도도 역), 조진웅(와카자키 역) 등을 적군의 수장으로 배치했다. 영웅물에서 비중 있는 연기자들을 악역으로 배치하는 것은 매우 효과적인 연출법이다. 위대한 영웅은 강력한 적에 의해 더욱 빛이 난다. 

하지만 구루지마에 대한 평면적 묘사는 이러한 배역의 효과를 반감시켰다. <명량>의 구루지마와 같이 단순한 인물을 재연하기 위해 류승룡과 같은 뛰어난 배우를 소모한 것은 도끼로 모기를 잡는 것처럼 비효율적이다. 

일부 아쉬운 설정과 몇 가지 영화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명량>은 상업영화로서 손색이 없다. 한마디로 한국 관객들이 열광할 만한 영화다. 김한빈 감독은 자칫 따분해지거나 지나치게 교훈적으로 흐를 수 있는 '성웅'의 이야기를 흥미진진한 오락영화로 만들어냈다. 아마도 여름 '사극대전'의 최종 승자는 <명량>이 될 듯하다.

임진왜란, 무능정부의 외교적 참사

명량해전은 1597년 9월 16일에 있었다.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이순신은 단 12척의 전선으로 133척의 적선과 맞서 31척을 격파했다. 아군 사망자는 단 2명에 불과했다(백병전 중심의 연출 때문에 <명량>에서는 더 많은 아군 희생자가 발생한 듯한 인상을 준다).

이순신은 수적, 기술적 열세를 정신적, 전술적 우세로 극복하고 절대적인 열세에서 압도적인 승리로 거뒀다. '필사즉생, 필생즉사'의 정신과 유리한 지형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탁월한 전술로 '승리가 불가능한 전투'에서 승리했다.

명량해전은 임진왜란 중에서도 정유재란 시기에 있었다. 1592년 4월 13일 조선을 침공한 일본군은 부산성, 동래성을 차례로 격파하며 파죽지세로 북상했다. 일본군의 기세에 겁을 먹은 선조는 결국 서울을 버리고 의주로 도주했다(한국 전쟁 때 이승만의 행태와 유사했다). 전쟁 개시 불과 20일 만에 일본군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서울에 무혈 입성했다.

그러나 1592년 8월부터 이순신의 선전과 의병의 활약 그리고 명나라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특히 행주대첩의 패배로 일본군은 더 이상 북상하지 못하고 서울에 고립됐다. 서울 수복 작전이 개시되고 궁지에 몰린 일본군은 퇴각을 시작하고 2차 진주성 전투의 패배 직후 강화협상을 제안했다. 그리고 1597년 1월까지 휴전상태가 지속됐다.

그렇다면 5년여의 휴전기간 동안 선조정부는 무엇을 했을까? 물론 국가를 재건하기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먼저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상비군을 강화했다(임진왜란 전 조선에는 상비군이 없었다). 해군을 총괄하는 삼도수군통제영이 설치되고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이 기간 중 30여 개의 성이 신축·증축되고 1593년에는 일본군이 맹위를 떨친 조총 제작에 성공하기도 했다. 

하지만 선조는 국가의 재건보다 '정권의 안보'에 더 주목했다. 휴전 중에도 조정은 음모와 당쟁에만 몰두하였다. 의병장으로 이름을 날린 김덕령과 정문부가 누명을 쓰고 반역죄로 처형되었고 곽재우도 반역죄로 몰려 죽을 뻔하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정부는 반란이 두려워 관군에 편입되지 않은 의병 부대를 모두 해산시켜 버렸다.

이순신이 투옥된 것도 정유재란 직전인 1597년 1월이었다. 이순신은 왕명을 거역했다는 혐의(선조는 이순신에게 출정하도록 명령했지만 이순신은 일본군의 계략에 빠져 큰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해 출정하지 않았다)로 1597년 4월 11일 수군통제사직에서 해임되어 원균에게 직위을 인계하고 서울로 압송되어 투옥되었다. 우의정 정탁의 상소로 겨우 사형은 모면했지만 이순신은 두 번째로 백의종군을 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이순신은 원균의 모함 때문에 투옥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궁극적인 배경은 선조의 시기와 질투, 두려움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간신들이 아무리 모함을 해도 선조가 이에 동조하지 않았다면 이순신을 투옥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선조는 왕명을 거부하는 전쟁영웅의 오만한(?) 태도에 두려움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만일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적탄에 사망하지 않았더라도 결국 반역죄로 처형됐을 것이라는 흥미로운 주장도 있다. 

선조는 임진왜란 직전에도 이이를 비롯한 충신들의 경고를 무시했다가 결국 화를 자초하였다. 전쟁 중에도 왕권을 지키기에만 급급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오직 정권의 안위만을 추구하는 무능정부가 빚어낸 외교적 참사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은 돌아오고 있는데...

 일본이 돌아오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이순신도, 거북선도 없다.

일본이 돌아오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이순신도, 거북선도 없다. ⓒ CJ엔터테인먼트


<명량>이 대중의 폭발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은 물론 영화의 완성도가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적 상황이 앞서 기술한 것처럼 임진왜란 당시의 동아시아 정세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도 무관하지는 않다. 어쩌면 국민들은 무의식적으로 이순신과 같은 '구국의 영웅'을 갈망하고 있는지 모른다(아마도 <군도>가 폭발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일 것이다).

지난 7월 1일 일본의 아베정권은 국내외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하는 것이 헌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이로써 2차 세계대전 이후 60여 년 만에 일본은 소위 '정상(전쟁)국가'가 됐다.

아베 정권은 '일본과 밀접한 관계의 다른 나라에 대한 무력 공격이 발생, 일본의 존립이 위협받고 국민의 생명과 권리가 전복될 명백한 위협이 발생할 경우 무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이른바 '무력행사의 신3요건'을 결정했다. 

일본은 이미 군사대국이다. 2013년 4조6804억 엔(46조6884억 원)의 국방비를 지출해 세계 6위를 기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베 정권은 2014년 국방비를 지난해보다 2.8% 늘어난 4조8848억 엔(48조7273억 원)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채택된 '신 방위대강'에 따라 향후 10년간 지속적으로 국방비를 증액할 계획이다.

'밀접한 관계의 다른 나라'라는 모호한 표현이 한국과 미국을 의미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즉 한반도에서 '명백한 위협'이 발생할 경우 이제 자위대가 개입할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명백한 위협'이 무엇인지는 아베 정권이 임의로 판단한다.

오바마 정부는 이러한 아베 정권의 위험한 행보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며 은근히 동북아의 군비경쟁을 부추기고 있다. 이렇듯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지만 박근혜 정부는 "(한국) 정부의 용인 없이는 일본군의 파병이 불가능하다"는 실없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임진왜란 직전 조선통신사로 일본을 방문한 황윤길은 선조에게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하지만 정략적 이해관계 때문에 조정은 "그러한 정상이 없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민심을 동요시킨다"는 부통신사 김성일의 주장을 따랐다.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결정을 자신의 구미에 맞게 임의로 재해석하는 박근혜 정부의 태도는 마치 임진왜란 직전 선조 정부의 안일한 태도를 연상시킨다.

지금 일본에 대한 '명백한 위협'은 북한, 중국, 러시아다. 그 중에서도 북한이 첫 손가락에 꼽힌다. 아베 정부는 북한의 핵개발을 가장 심각한 위협으로 여기고 있으며 중국과 센가쿠열도(다오위다오), 러시아와 북방4개 섬 반환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다.

이제 한반도에서 서해교전이나 연평도포격전과 같은 사태가 벌어진다면 자위대가 개입할지도 모른다. "일본 식민 지배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인물을 총리로 지명하는 박근혜 대통령이 일본에 대해 얼마나 원칙적인 외교를 펼칠 수 있을지 미지수이다.

현 정부의 안일한 외교는 임진왜란 직전 조정의 모습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는 이순신도, 거북선도 없다는 것이다. 역사에서 교훈의 찾지 못하는 민족에게 역사는 반드시 되풀이된다. <명량>을 단지 오락영화로 즐기기에는 우리의 현실이 너무나 절박하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필자의 블로그 http://blog.naver.com/silchun615 에 중복 게재됩니다.
명량 김한빈 최민식 류승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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