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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 포스터 영화 <명량>의 포스터
 영화 <명량>의 포스터
ⓒ CJ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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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자위권을 발판으로 군사대국을 꿈꾸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보다 훨씬 더 큰 꿈을 꾼 인물이 있다. 주인공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다. 관백이라는 총리급 지위로 일본열도를 통치한 히데요시의 꿈은, 일본을 벗어나 조선과 명나라는 물론이요 동남아시아까지 정복하는 것이었다.

임진왜란(임란) 발발 7년 전인 1585년, 히데요시는 서양 선교사인 루이스 프로이스를 만난 자리에서 "조선을 점령한 뒤 중국까지 공격하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일본 나라현의 승려들이 합작해서 작성한 <다문원일기>라는 일기에 따르면, 1587년에는 히데요시가 조선·명나라뿐만 아니라 동남아까지 침공할 것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그런 히데요시의 원대한 야망을 거친 물속으로 침몰시킨 것이 조선 수군과 이순신의 작품인 명량해전(명량대첩)이었다. 히데요시의 야망이 명량해전을 계기로 수중에 침몰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 이 글의 목표다.

왜구 활동에도 여전히 취약했던 일본 수군 군사력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센고쿠 시대(1467년경~1573년경)라는 분열의 시대를 극복하고 일본열도를 통일했다. 약 100년간 계속된 센고쿠 시대에 일본인들은 열도의 바깥보다는 안쪽에 더 신경을 썼다. 외국보다는 일본 내의 경쟁 세력과 싸우는 데 집중했던 것이다.

이러다 보니 이 시대에 일본의 전쟁은 해상이 아닌 육상에서 주로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이 시기의 일본에서는 해상보다는 육상에서의 전쟁수행능력이 훨씬 더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그러했지만, 센코쿠시대의 일본에서는 이런 이유 때문에 육군과 육상 전투능력이 한층 더 발전했다. 

왜구라는 해적을 대거 배출한 일본이 해상보다는 육상에서 더 강했다는 사실이 쉽게 믿기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왜구는 정부 차원의 해적이 아니라 지방이나 민간 차원의 해적이었다. 따라서 왜구의 군사력이 곧바로 일본의 해군력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왜구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일본 수군은 여전히 취약했다. 일본에서 수군 즉 해군이 집약적으로 발전한 것은 19세기 후반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초상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초상화.
ⓒ 위키피디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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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육군이 훨씬 더 강한 상태에서 히데요시는 1592년에 임란을 일으켰다. 그는 육상 전쟁에서의 우위를 바탕으로 조선을 점령한 뒤 명나라·동남아까지 진출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선조 25년 4월 13일(양력 1592년 5월 23일)에 부산을 침공한 일본 육군은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갔다. 조선 육군의 기둥인 이일과 신립은 각각 상주와 충주에서 격파됐다. 이때만 해도 히데요시의 꿈이 머지않아 실현될 것처럼 보였다. 당시 명나라가 내란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히데요시는 '조선만 점령하면 명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런데 히데요시의 꿈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생각지도 못한 바다에서 일본군이 치명타를 입은 것이다. 전쟁 발발 3주 뒤인 5월 7일(양력 6월 16일)부터 조선 수군과 이순신이 옥포·적진포·사천·당포·당항포에서 일본 수군을 격파했다. 이로 인해 일본군의 해상 보급로가 위협을 받으면서 히데요시의 계획이 꼬이기 시작했다.

조선 수군이 원래부터 우수하다는 사실을 히데요시가 몰랐을 리는 없다. 조선은 연안에 침투하는 왜구를 오랫동안 격퇴하는 과정에서 우수한 전함 및 해상전투력을 갖추었다. 왜구는 여러 세력으로 나뉜 데 반해 조선군은 단일한 군대였기 때문에, 대결이 장기화될수록 조선군의 역량이 상대적으로 더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점을 모르지는 않았겠지만, 개전 당시만 해도 히데요시는 양국 수군 간의 대결은 크게 고려하지 않았다. 육군 대결에서 승리하고 한성을 점령하고 선조를 생포하면 전쟁이 끝날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는 조선 수군이 물밑에서 일본군의 발목을 잡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히데요시가 조선 수군이라는 변수를 깊이 고려하지 않은 것은 조선과 일본이 정식으로 수군 대결을 벌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열도에서 벌어지는 육상 전쟁에만 익숙했던 그의 입장에서는, 해상 전투라는 게 부차적인 요소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 수군 정예부대에 내려진 임무, '이순신 격파'

잘 나가던 전쟁이 해상에서 뒤틀어지자, 히데요시는 조선 수군의 사령관이 누구인지 궁금해 했다. 그가 이순신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제1차 당항포 해전이 끝난 6월 5일(양력 7월 13일) 이후였다. 이순신을 그냥 두고서는 꿈을 성취할 수 없다고 판단한 히데요시는 자신의 직할 수군에게 이순신을 상대하도록 명령했다. 일본 수군의 정예부대에게 이순신 격파라는 임무를 준 것이다.

일본 수군의 역량이 조선 수군에게 뒤지는 상황에서, 히데요시의 직할 수군이라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을 리는 없었다. 일본의 최정예 수군인 히데요시의 직할 수군은 7월 8일(양력 8월 14일)과 10일에 벌어진 한산도대첩 및 안골포 해전에서 조선 수군과 이순신에게 대패를 당했다. 직할 수군의 3분 2가 두 차례의 전투에서 와해되었다.

두 해전에 관한 보고를 받은 히데요시는 조선 수군을 상대하는 것은 무익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그는 일본군을 상대로 "조선 수군을 만나면 무조건 피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조선 수군과 이순신을 아예 상대도 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이때부터 일본 전함들은 조선 전함만 만나면 무조건 도망가기에 바빴다.

이로 인해 이순신은 일본 전함을 바다로 끌어내느라고 무진장 애를 썼다. 선조 25년 7월 10일(1592년 8월 16일)의 안골포 해전 이후부터 선조 30년 9월 16일(1597년 10월 25일) 이전까지의 근 5년 동안에 이순신의 승전이 부산포 해전·제2차 당항포 해전·장문포 해전 등 몇 건 밖에 안 됐던 것은, 이 기간 동안에 전쟁이 소강 국면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본군이 조선 수군만 보면 무조건 달아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집념'의 히데요시, 정유재란으로 2라운드 돌입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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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조선 수군과 이순신이 맹활약을 거듭하면서, 히데요시의 계획이 실패할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조선 의병이 봉기하고 조선 육군이 기력을 회복하고 명나라 군대까지 조선 땅에 들어왔다. 벽에 부딪힌 히데요시는 명나라와 휴전협상을 벌여 전쟁을 소강 국면으로 만들었다. 1593년 중반부터 일본군은 회담 결과를 지켜보면서 부분적인 철군 작업을 진행했다.

일본이 조선이 아닌 명나라와 휴전협상을 벌인 것은, 명나라가 조선의 상국(황제국)이기 때문이 아니라 당시 작전통제권이 명나라에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임금인 선조가 작전통제권을 넘기고 외국 군대를 끌어들였던 것이다.

장기간의 휴전 협상에서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한 히데요시는 1597년에 14만 대군을 파견해서 전쟁의 불길을 다시 지폈다. 임란의 제2라운드인 정유재란을 일으킨 것이다. 일본은 더 이상 바다에서 패배하지 않겠다는 목표 하에, 수군 전력을 강화한 상태에서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조선 수군을 제압한 뒤 남해안과 서해안을 돌아 한성을 점령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임란을 일으킬 당시만 해도 '조선·중국·동남아를 정복하겠다!'던 히데요시의 포부는 이때쯤에는 '조선 삼남 지방만 점령해도 좋다'는 쪽으로 하향되어 있었다. 충청·전라·경상도만 점령해도 좋겠다는 쪽으로 꿈이 소박해진 것이다. 그의 꿈이 소박해진 데는 조선 수군과 이순신의 공로가 매우 컸다.  

꿈이 작아진 히데요시는 이순신부터 제거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일본이 이순신과 원균의 갈등, 이순신에 대한 선조의 경계심을 이용해서 이간작전을 벌인 것은 바로 이런 계획에 근거한 것이다. 

일본의 이간작전은 의외로 쉽게 성공을 거두었다. 선조는 이순신을 불신하여 삼도수군통제사 자리를 원균에게 넘겼다. 하지만 선조가 놓은 바둑알은 패착을 초래했다.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를 당했고, 조선 수군의 전력은 사실상 궤멸되고 말았다. 이제 조선은 사실상 육군밖에 없는 나라가 되었다.

명량해협 급물살 이용해 일본 수군 요리한 이순신

 조선 수군의 훈련 모습을 담은 <수군 조련도>. 서울 용산구 용산동의 전쟁기념관에서 찍은 사진.
 조선 수군의 훈련 모습을 담은 <수군 조련도>. 서울 용산구 용산동의 전쟁기념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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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천량해전을 계기로 히데요시와 일본군은 조선 수군에 대한 콤플렉스를 말끔히 씻어버렸다. '이제는 바다에서도 자신감이 있다'는 게 당시 일본군의 분위기였다.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뒤에도, 이순신이라는 석 자에 대한 부담감은 있었지만 '이순신이라고 별 수 있겠나?'라며 여유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전라도 진도와 육지 사이의 급물살 위에서 벌어진 선조 30년 9월 16일(1597년 10월 25일)의 명량해전에서 일본 수군은 어이없는 대패를 당하고 만다. 압도적으로 우세한 숫자를 보유한 일본 수군이 조선 수군에게 완패를 당한 것이다. 열한 명인 일본팀이, 열 명이 레드카드를 받아 골키퍼 밖에 없는 한국팀에게 대패를 당한 것이다.

이때의 양쪽 군함 숫자를 놓고 그 후 논란이 많았다. 조선 군함의 숫자가 12척이라는 말도 있고 13척이라는 말도 있다. 또 일본 군함이 300여 척이라는 말도 있고 133척이라는 말도 있다.

당시의 현장을 들여다보면, 이 문제는 간단해진다. 이순신이 선조에게 제출한 서한에서 "제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라고 보고했지만, 명량해전 직전에 1척이 추가됐기 때문에 조선 수군의 군함은 13척이었다.

또 일본 학계에서는 일본 군함의 숫자가 300여 척이라는 견해가 우세하고 한국에서는 133척이라는 견해가 우세하지만, 실상은 양쪽 다 맞는 말이다. 왜냐하면, 명량해전을 위해 출동한 일본 군함은 300여 척이었지만 실제로 명량해협에 들어온 군함은 133척이었기 때문이다. 명량해협이 좁고 물살이 세서 일본 함대 전체가 들어오지 못하고 그중 일부만 들어왔던 것이다.

조선군이 보기에는 일본 군함이 133척만 보였기 때문에, 그 후 한국에서는 133척이라는 이야기가 우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본 측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133척이 아닌 300여 척을 출동시켰기 때문에, 그쪽에서는 300여 척이라는 이야기가 우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양쪽 군함이 몇 척이든 간에 중요한 것은, 조선 수군이 최소 10배나 되는 일본 수군을 격퇴했다는 점이다. 일본 수군은 31척의 전함을 잃고 명량해협을 빠져나갔다. 영화 <명량>에서 과장되게 묘사되기는 했지만, 조선 수군과 이순신은 명량해협의 급물살을 이용해서 일본군을 마음껏 요리한 뒤 돌려보냈다.

결국 '물고기 밥'이 돼버린, 히데요시 총리의 꿈

명량해전을 계기로 조선 수군은 자존심을 되찾는 동시에 한반도 해역의 제해권을 재장악했다. 이를 계기로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의 기를 확실하게 꺾어놓았다. 명량해전 뒤에 노량해전이라는 대형 전투가 또 있었지만, 양쪽 수군의 대결은 명량해전에서 사실상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노량해전은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한 전투였으므로, 양쪽 수군의 대결은 명량해전이 사실상 마지막이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 삼남 지방만이라도 정복하면 좋겠다던 히데요시의 꿈은 이렇게 명량의 물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한반도와 중국은 물론 동남아까지 정복하겠다던 그의 꿈은 명량의 거친 물살 속에 수장되고 말았다. 이웃나라들을 불행으로 몰아넣으면서까지 군사대국화를 추진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총리'의 꿈은 그렇게 물고기의 밥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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