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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1일 오전 9시 16분]

"참 기구한 운명이죠. 어머니는 미군에 총 맞아 죽고 난 미군에 구조받고. 이런 게 있어요?"

인권여행에서 만난 채상준(74) 할아버지는 끔찍했던 노근리 민간인 학살 사건과 자신의 삶을 단 한 줄로 표현해냈다. 머리가 멍해졌다. 나는 그동안 인권을 '글'로 배웠다. 1년 반 동안 대학생 동아리 '인권더하기법률'에서 활동하며 책을 읽고 토론을 했지만, 그저 글로 옮겨진 '사건'을 기억할 뿐이었다. 내가 기억한 것은 그 사건의 주체가 되는 누군가의 생생한 '삶'이 아니었다.

인권, 즉 '사람의 권리'를 공부하면서 사람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을 마주하기 위해 인권여행에 참가했다. 인권여행은 인권더하기법률에서 글로 배웠던 인권침해 현장을 직접 방문하고, 인권을 체현하는 과정이다. 여행 프로그램 또한 노동과 인권, 환경과 인권, 역사와 인권 파트로 나누어 참가자들이 직접 기획했다.

이 글은 7월 21일부터 25일까지 4박 5일간 인권여행에서 만난 사람과 삶에 대한 기록이다.

"가족 사진이 SNS에 올라오는데, 진짜 행복했어요"
-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라두식 수석부지회장, 곽형수 남부부지회장

인권 여행.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간담회. 라두식 수석부지회장과 곽형수 남부부지회장.
 인권 여행.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간담회. 라두식 수석부지회장과 곽형수 남부부지회장.
ⓒ 김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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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노조 경영 76년. '초일류' 기업 삼성을 설명하는 말은 많지만 이것만큼 노동자들을 압박하는 말도 없을 것이다. 그런 삼성에 간접적으로나마 노조가 생겼다. 7월 14일은 그 노조가 첫 돌을 맞은 날이었다. 많은 노조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이제 첫 발을 내딛은 이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이제야 노동자의 권리를 깨우쳐가고 있는 우리와 그들이 닮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한편으론 삼성이라는 거대 기업과 싸우는 이들의 이야기가 궁금하기도 했다. 인권'여행'이었지만, 노동자들과 간담회를 잡았다.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아래 지회)와 인권여행 참가자들의 간담회는 7월 22일 서울 정동 금속노조 사무실에서 진행되었다. 라두식(42) 수석부지회장과 곽형수(38) 남부부지회장이 우리와 마주했다. 검게 그을린 피부와 짧은 머리, 무표정한 곽형수 부지회장의 첫 인상은 무거웠다. 그의 첫 마디도 마찬가지였다.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삼성하고 저희가 알고 있는 삼성하고는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어요."

분급제도·마이너스 성과급과 같은 불안정한 임금체계, 업무실적과 감정노동에 대한 스트레스. 곽형수 부지회장은 운전을 하며 김밥, 햄버거로 점심을 때우는 것이 일상이었다고 했다. 심지어 그에게 있어 졸음운전은 '특기'였다. 그들은 그때를 "이대로 살기엔 죽을 것만 같았던" 때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중년 남성처럼 잘 울지 않는다는 라두식 수석부지회장은 유독 그때를 떠올릴 때마다 울먹인다고 했다. 자연스레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의 굳은 표정은 노조 출범 이후의 삶을 이야기할 때 비로소 풀어졌다. 지회는 지난 6월, 파업 1년여 만에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사들과 노사 단체협약을 맺었다. "집사람을 남편 없는 아내로 만들었고, 아이들을 아빠 없는 자녀로 만들었던" 라두식 수석부지회장은 얼마 전 처음으로 가족사진을 찍었다고 했다.

"여러분들이 보기엔 당연한 것이잖아요. 저희한테는 몇 십 년간 그런 일이 없었기 때문에 (조합원들이) 가족과 주말을 같이 보낸 사진이 (SNS에) 올라오는데, 진짜 행복했어요."

"세상이 아무리 힘들어도 어딘가에 내 편이 있고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절망적이지 않은 것 같아요. 아무리 깊은 동굴에서도 한 줄기 빛이 있으면 그 빛을 보고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예전에는 그게 없었던 거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곽형수 부지회장이 처음으로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그들은 이제야 당연한 일상을 되찾고 있었다. 언젠가는 그들이 더 활짝 웃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여러분들이 많이 와야 돼, 그래야 왕따 안 당하는 거라"
- 밀양시 단장면 태룡마을 주민 하승기씨

인권여행. 밀양 농활. 좌측 끝이 하승기씨.
 인권여행. 밀양 농활. 좌측 끝이 하승기씨.
ⓒ 김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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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고장에서 쓸 전기도 아닌 서울과 수도권으로 전해지는 전기 때문에 9년째 투쟁을 해오고 있는 이들이 있다. '비밀스런 햇볕'이라는 아름다운 도시의 이름 옆에 '투쟁'이나 '반대'와 같은 거친 수식어가 붙어 언론을 오르내린다. 밀양의 이야기다. '생명을 앞서는 이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곳이 바로 이곳일 것이다.

인권여행 3일 차였던 7월 24일, 경남 밀양으로 갔다. 본래 밀양 송전탑 투쟁을 함께하고자 했지만, 지난 6월 11일 행정대집행으로 농성장이 철거된 이후 지금 함께할 수 있는 마땅한 활동이 없었다. 결국 하루 동안이나마 농활로 밀양 주민들의 일손을 거들기로 했다.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그날, 우리는 단장면 태룡마을로 향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은 한약재로 쓰이는 맥문동 밭의 잡초를 제거하는 것. 마을 할머니들이 공동으로 경작하는 밭이지만 한동안 관리를 하지 못한 탓에 잡초가 무성했다. 일은 고되지 않았으나 아침부터 몰려오는 더위에 금세 진이 빠졌다. 주민 하승기(49)씨는 우리를 틈틈이 비닐하우스에서 쉬게 했다. 그의 티셔츠 반 이상이 땀으로 젖을 만큼 더운 날이었다.

그 와중에도 송전탑 건설 자재를 나르는 헬기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우리가 일하는 밭에서도 2개의 송전탑이 보였다. 하나는 완성된 듯 보였고, 나머지 하나는 건설 중이었다.

"다음 주 되면 (송전탑이) 다 서겠네. 공구리(콘크리트)도 다 치고. 완료 발표 나오겠네."

하승기씨가 수박을 들고 찾아온 김정회(44)씨와 송전탑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승기씨는 그를 동화전마을 반대대책위 위원장이라고 소개했다.

"(동화전마을이) 싸움을 제일 먼저, 제일 치열하게 했어. 그리고 합의도 제일 먼저 했고. 웃기는 일이지. 동장만 두 번 쫓겨났어. 저 친구(김정회씨)가 한 명 쫓가내고, 새 동장 세웠더니 열심히 싸우다가 갑자기 한전 직원이랑 술 한잔 먹더니 내려와서 '그만합시다' 하고…."

하승기씨는 쉬는 시간 틈틈이 밀양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물어보라며 재촉하기도 했다.

"근데 전반적으로 밀양(송전탑 건설 반대투쟁)에 대해서 우호적이지 않잖아. 전부 다. 학생들도. 그지?"

문득 그가 물었다. 마땅한 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이들은 계속해서 싸우고 있다. 하승기씨는 며칠 전 밀양과 같이 송전탑이 들어서는 청도 삼평리에 연대 투쟁을 다녀왔다. 그는 탈핵과 농촌문제, 협동조합에 관심이 있기도 하다. 어느새 그는 '밀양'의 문제를 넘어서 시야를 넓히고 있었다. 하루 동안의 짧은 농활을 마치고 하승기씨의 트럭에 올라탔다.

"우리는 밀양을 사랑하기 때문에 765kv 송전탑을 반대합니다."

그의 트럭 뒤편에 붙은 스티커의 글귀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어머니는 죽어서 쌍굴 안에 있던 사람들 총알받이가 된 거지"
- 노근리 민간인 학살 사건 생존자 채상준 할아버지

인권 여행. 노근리 채상준 할아버지.
 인권 여행. 노근리 채상준 할아버지.
ⓒ 김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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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죄 없이 죽어간 민간인들이 있다. 자신이 죽어간 이유조차 몰랐다. 그저 하얀 옷을 입고 피난을 간 것이 죄라면 죄였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민간인 속에 숨어 있는 적을 죽이기 위해 민간인을 사살한 곳이 바로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쌍굴이다. 7월 25일, 인권여행의 마지막 일정으로 그곳을 방문했다. 노근리 민간인 학살 사건이 일어난 지 정확히 64년이 지난 날이었다.

쌍굴은 총탄 자국을 표시한 하얀 도형과 이 장소를 소개하는 현수막이 없었더라면 특별히 눈에 띄지 않을 것 같았다. 아무렇지 않게 차와 사람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이곳에서 200여 명이 죽었다. 답사를 기획한 회원들의 설명을 들으며 쌍굴을 둘러보았다. 그때 뒤에서 가만히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할아버지 한 분이 다가왔다. 그는 왼쪽 가슴에 검은색 추모 리본을 달고 있었다. "내가 진짜 거기(노근리) 사람이여" 하며 말을 시작한 채상준(74) 할아버지는 '그날'의 기억을 되짚었다.

"갑자기 (1950년) 7월 25일 날 미군하고 경찰이 와가지고 전부 끄잡아내는 거예요. 전부 피난 가라고. 그래가지고 하천에다가 강제로 재우고. 포 소리가 진짜 무서웠어요. 우스운 일이지만 난 무서워서 어머니 치마폭에서 잤어요. 하도 무서워서."

노근리 사건을 다룬 영화 <작은 연못>에 나온 것처럼,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어머니는 철길 주변 아카시아 나무 밑에서 미숫가루를 먹으며 은신해 있었다. 그러다 포 소리에 놀란 할아버지가 어머니 손을 놓쳤다. 할아버지는 사람들 속에서 길을 잃었고, 인파에 밀려 쌍굴로 왔다. 당시 10살이던 할아버지는 총격 때문에 머리가 깨진 소녀를 생생히 기억한다. 미군은 그 소녀와 할아버지를 데려갔다.

"우리 어머니는 내 찾으려고 여기(쌍굴)에 들어왔어요. 다른 사람들이 (쌍굴에서) 많이 죽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가만히 있는데, 유난히 내 어머니는 날 찾으려고 막 나오다가 총알을 맞아서…."

할아버지는 뒤늦게 쌍굴로 온 어머니가 숨을 거두던 순간의 이야기를 마을 사람으로부터 전해 들었다고 했다. 너무나도 담담히 자신의 기억을 되짚던 할아버지는 말을 마치고 인사도 받지 않은 채 쌍굴 옆으로 난 길로 올라갔다. 순간적으로 성함이라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를 따라갔다. 할아버지는 이름 모를 사람들을 기리기 위한 조그만 추모비 앞에서 절을 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의식이 끝날 때까지, 짧은 묵념을 하고 우두커니 기다렸다. 할아버지는 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 담담하게 눈물을 닦았다. 이런 눈물에 익숙할 그가, 이곳으로 오기 전에 두루마리 휴지를 둘둘 뜯어 주머니에 넣는 모습이 그려졌다.

"우리 엄마도 시체가 됐겠죠? 사람들이 (쌍굴 안에서) 시체를 가져다가 자기 살려고 총알받이로 앞에 쌓아놨대요. 그 시체를. 어머니는 이제 죽어서 (쌍굴 안에 있던) 사람들 실탄받이가 된 거지. 그래서 나중에 동네 사람이 그 송장을 가져다가 여기다 다 묻었대요. 여기다 다 묻었는데 피가 올라와가지고 (땅이) 막 질퍽질퍽하더래요."

그곳에 서서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에게 노근리 사건 이후의 삶은 "진짜 기억도 하기 싫은" 날들의 연속이었다. 겨우 돌아온 집에는 어머니 대신 미군이 놓고 간 실탄과 포탄이 가득했다. 할아버지는 피난을 가지 않은 두 형의 집을 전전하다가 제 발로 고아원에 들어갔다. 그 뒤로 심장병 약을 달고 살았다. 그를 서울에 있는 병원에 보내준 것은 미국인 선교사였다.

할아버지는 지금까지 어머니의 유해조차 찾지 못했다. 국가에서 나온 보조금은 거절했다. 그는 60여 년 전의 사건을 돌이키며 몇 번이고 울먹였다. 그의 상처는 여전히 치유되지 않은 듯했다.

'일상'을 지키는 것, 그게 바로 인권

4박 5일은 턱없이 짧은 시간이다. 그럼에도 '사건'에 가려진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발견해내기에는 충분했다. '삼성전자서비스지회 간부'는 우리 아빠처럼 가족이 전부인 평범한 40대 아저씨였다. 밀양의 할매들과 더불어 밀양을 사랑하는 젊은 농사꾼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노근리학살사건 생존자'는 그저 당시의 아픔을 기억하고 있는 어린 소년과 여전히 다를 바 없었다.

이들을 마주하며 인권이란 거창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일상을 잃어버리는 것, 그것이 인권침해가 아닐까. 가족과 밥을 먹거나 사진을 찍을 시간을 가지는 것, 작은 땅덩어리 위에 별 탈 없이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것, 어머니와 함께한 소중한 유년시절의 기억을 간직하며 사는 것. 이것을 지키는 것이 인권 아닐까.

덧붙이는 글 | 김예지 기자는 오마이뉴스 대학통신원입니다



태그:#삼성서비스, #밀양송전탑, #노근리, #인권더하기법률, #인권더하기법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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