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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안산 단원고 생존학생들이 'remember 0416'이 새겨진 노란 팔찌를 차고 이준석 선장 등 승무원 재판에 증인으로 나서기 위해 28일 오전 안산 수원지법 안산지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 법정 들어가는 세월호 생존 학생들 '세월호 참사' 안산 단원고 생존학생들이 'remember 0416'이 새겨진 노란 팔찌를 차고 이준석 선장 등 승무원 재판에 증인으로 나서기 위해 28일 오전 안산 수원지법 안산지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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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가 바뀔 때마다 '혹시 해경이나 선원 중에 탈출할 때 도와준 사람 있냐'는 검사의 질문이 나왔다. 6명의 답은 늘 똑같았다.

"아니요."

단원고 학생이 세월호 참사 104일 만에 '그날'을 증언했다. 28일 학생 6명은 수원지방법원 안산지원 401호 법정 증인석에 앉았다. 세월호 선원들의 공판을 심리하는 광주지방법원 형사합의11부(부장판사 임정엽)가 따로 마련한 기일이었다.

공판 초반부터 생존학생들의 증언 필요성을 강조해온 재판부는 이날부터 1박 2일 일정으로 안산지원에서 증인 신문을 시작했다. 재판부는 학생들이 이준석 선장 등 선원을 보면 불안감을 느낄 것을 고려해 피고인들은 출석시키지 않았다. 또 증언 과정을 공개하는 대신 취재진의 방청을 제한했고, 기자들에게 비실명 보도 약속을 지켜달라고 거듭 당부했다.

'화상 증언' 역시 단원고 학생들을 배려한 것이었다. 하지만 딱 한 명 빼고는 모두 증언석에 앉기로 했다. 법정에 나와 설명해주는 것이 더 재판진행에 좋다는 재판부의 요청을 받아들인 결정이었다.

다소 긴장한 모습이었지만, 아이들은 차분히 '그날'을 복기했다. 이날 증언한 학생들은 모두 1반 학생으로 숙소가 같고(4층 좌현 선미 쪽 다인실, SP-1번방) 사고 당시 대부분 방에 있었기 때문에 탈출경로가 비슷했다. 아이들은 긴박한 상황에서도 서로를 배려하며 차례대로 탈출했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만 믿었어요"

4월 16일 오전 제주도 수학여행길에 오른 안산 단원고 학생을 비롯한 459명을 태운 여객선 '세월호'가 전남 진도군 조도면 병풍도 북쪽 20km 해상에서 침몰했다. 사진은 해양경찰청이 공개한 구조작업.
 4월 16일 오전 제주도 수학여행길에 오른 안산 단원고 학생을 비롯한 459명을 태운 여객선 '세월호'가 전남 진도군 조도면 병풍도 북쪽 20km 해상에서 침몰했다. 사진은 해양경찰청이 공개한 구조작업.
ⓒ 해양경찰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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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증인 A학생은 '신뢰관계인' 자격으로 함께 증인석에 앉은 친구의 손을 꼬옥 잡고 진술했다. 맞잡은 두 사람의 손목에는 노란팔찌가 걸려 있었다. A학생은 4월 16일 아침식사 후 선실로 돌아와 잠을 자고 있었다. 그는 '가만히 있으라'는 대기방송을 믿고 기다렸다. 하지만 오전 9시 58분쯤 바라 본 선실 창문 밖은 이미 바닷물 속이었다. 방에도 순식간에 물이 차버렸다. A학생은 친구들이 위에서 끌어주고 밑에서 받쳐준 덕분에 복도로 올라왔다. 그는 좌현 선미 쪽 비상구로 나가 해경 구명보트에 올라탔다.

이날 유일하게 화상증언을 한 B학생은 사고 당시 "저희 반이 좀 구석진 데에 (숙소가) 있어서 앞쪽 방부터 구하는 것 같아서 그냥 애들이 기다리자고 했다"고 말했다. 긴박한 상황인데도 아이들은 질서를 유지했다. 자신들의 판단으로 방에서 빠져나온 뒤에도 복도에 줄을 서서 인원을 파악하며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B학생 차례가 됐을 때 그는 순간 물에 빠졌다. 다행히 누군가 물에 건져줘서 해경보트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비상구를 거쳐 밖으로 나올 때까지 복도에 들어와서 도와준 해경이나 선원은 없었다.

C학생을 살린 건 공포였다. 그는 사고가 나자마자 "무서워서" 친구들에게 구명조끼를 입자고 소리 질렀다. C학생은 "배가 기울어진 게 창문 밖으로 보이는데 다시 제자리로 돌릴 순 없을 것 같았고, 믿을 건 구명조끼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방에 물이 차는 바람에 캐비닛이 뒤집어져 그 안에 갇혔을 때도 "진짜 살고 싶다"는 생각에 그는 빠져나올 수 있었다. 미리 구명조끼를 입어둔 덕분에 몸도 자연스레 떠올랐다.

- 검사 : 사고가 나자마자 배가 침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친구들에게 구명조끼 나눠주고 입으라는 말까지 했는데, 왜 당시에 바로 탈출하지 않았나요?
"저희는 아무 지식이 없고, 그런 사람도 없고, 처음에 배에 탈 때 '이러면 어디로 나가라 어떻게 하라'는 교육이 없는 상황에서 '기다리라'는 방송이 나왔잖아요. 아무래도 승무원이나 선장이 저희보다 지식도 많고 하니까 믿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 말 믿고 계속 기다렸던 것 같아요."

선원들 처벌보다 원하는 것은...

28일 수원지방법원 안산지원에서 세월호 참사 생존 단원고 학생들의 증인신문이 진행된 가운데 화상장치가 연결된 법정이 공개되고 있다.
▲ 세월호 생존 학생 증언 위한 법정 28일 수원지방법원 안산지원에서 세월호 참사 생존 단원고 학생들의 증인신문이 진행된 가운데 화상장치가 연결된 법정이 공개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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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학생처럼 D학생도 선원들을 믿었다. 믿고 기다렸다. 하지만 선원들은 끝내 오지 않았다. 이 대목을 증언하던 D학생은 끝내 눈물을 흘렸다. 그는 사고 당시 방에서 가장 먼저 빠져나와 친구들의 탈출을 도왔다. 마지막 순간에는 어민의 도움을 받아 어선에 올랐다. D학생은 가끔 친구들과 선생님들이 떠오르고, 배 안에 있던 꿈을 꾼다며 울먹였다. 하지만 '선원들의 엄벌을 원하냐'는 말에는 모두 "네"라고 답한 친구들과 다르게 말했다.

"그런 것보다는 왜 친구들이 그렇게 돼야 했는지 근본적인 이유를 알고 싶어요."

E학생은 세월호에 탔을 때 비상탈출 시 대피로나 구명조끼 착용법 등을 교육받은 적이 없다고 진술했다. 그는 "기울어지고 하니까 나갈까 말까 했는데 때마침 방송에서 가만히 있으라 해서 애들도 '가만히 있으라잖아'하면서 있었다"고 말했다. E학생도 선원들을 믿었고, 해경이 오면 배안으로 들어와 자신들을 구해주리라 생각했다. 그는 "초반에 (탈출하라고) 방송했다면 아이들이 캐비닛 등을 밟고해서 더 많이 탈출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이날 마지막 증인은 '파란바지 아저씨' 김동수씨 덕분에 가까스로 탈출한 F학생이었다. 그는 원래 SP-1번방을 배정받았지만 4월 16일 아침에는 밥을 먹고 앞쪽의 B-22번방에 묵던 친구 6명과 함께 있었다. 그는 복도에 있던 친구들이 구명조끼를 건네주고, 방 밖으로 나오도록 끌어준 덕분에 선실을 빠져나왔다. 그 다음에는 맞은편 B-28번방(우현 쪽) 앞까지는 "아저씨들이 커튼을 묶어 내려준 것을 잡고" 올라왔고, 여기서 우현 갑판으로 올라올 때에는 고무호스를 몸에 묶었다. 곧 누군가 그를 끌어올려줬다. 김동수씨였다.

증언 내내 F학생은 많이 긴장한 모습이었다. 그는 복도에 함께 있던 친구들은 어떻게 됐느냐는 질문에 어렵게 입을 뗐다.

"아뇨… (복도 쪽에서 나온 건) 제가 마지막이었는데 물이 차서…"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옆에 앉은 선생님은 그의 손을 꼭 잡아줬다. F학생이 있던 B-22번방 생존자는 그를 포함해 단 두 명이었다.

[관련기사]
[생존 학생 증언 ①] "비상구 문 열어준 사람은 해경이 아니라 친구였다"
[생존 학생 증언 ②] "왜 친구들이 그렇게 됐는지 근본적인 이유 알고 싶다"
[생존 학생 증언 ③] "파란바지 아저씨가 나를 끌어올렸다"
[생존 학생 증언 ④] "애들도 '가만히 있으라잖아' 하면서 대기했다"
[생존 학생 증언 ⑤] "4월 16일 9시 58분, 창문 밖은 바다 속이었다"
[생존 학생 증언 ⑥] "선원들 엄벌에 처하길 원하는가" - "네"


태그:#세월호, #단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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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정치부. sost38@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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