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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부모님은 일 년에 두 번씩 부부 동반 여행을 떠나셨다. 부모님은 여행 떠날 채비를 하시다 말고 나를 부르셨다.

"이번에는 1박2일 아이다. 2박3일이거든. 3일 동안 이 돈으로 맛있는 거 사 묵으라."

내 손에 쥐어진 일만 원. 5학년이었던 내게 만 원은 엄청나게 큰돈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손에 쥐어 본 거금이었다. 신이 난 나는 만 원 권 지폐를 주머니에 넣고 수시로 손을 넣어 만져보곤 했다. 큰 액수의 돈을 써 본 경험이 없었다. 만 원이 내 것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그해 여름, 날은 더웠고 냉장고를 수시로 열어도 혼낼 사람은 없었다. 나는 수박이며, 차가운 생수를 먹기 위해 부엌을 자주 드나들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다음 날 아침부터 설사를 하기 시작했다. 배를 움켜쥐고 현관문을 열고 마당을 내달려 화장실로 갔다.

집을 수리하기 전 화장실은 마당 한 구석에 있었다. 화장실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밑이 뻥 뚫려 똥이 그대로 보이는 일명 '푸세식'이었다. 여름이면 암모니아 냄새로 코와 눈이 매울 정도였다. 그 날도 푸세식 화장실은 암모니아 냄새가 진동했고, 똥차를 부를 때가 다가올 때여서 똥이 가득 쌓여 있었다. 화장실을 나와 선풍기 앞에 앉으면 다시 복통이 찾아왔다. 한 시간 가량, 화장실과 마루를 몇 번이나 오갔는지 모른다.

[1차 시도] 연탄집게로 세종대왕을 구하라

바지를 벗고 시원하게 일을 보고 나자 통증이 조금 누그러졌다. 나는 급히 바지를 올려 입었다. 변기 속에서 올라오는 암모니아 냄새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내 바지 뒷주머니에 있어야 할 만 원 권 지폐가 흔들리는 요람처럼 좌우로 움직이며 똥 무더기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놀란 나는 두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숙인 채 똥 위에 떨어진 지폐를 한참동안 내려다 보았다. 코 속으로 들어오는 암모니아 냄새는 신경 쓰지 않았다.

화폐박물관을 찾은 관람객들이 위조방지홍보관에 설치된 대형 만원권 지폐에서 은화, 미세문자, 부분노출은선 등 위조방지 마크를 살펴보며 자신의 만원권과 비교해 보고 있다. (자료사진)
 화폐박물관을 찾은 관람객들이 위조방지홍보관에 설치된 대형 만원권 지폐에서 은화, 미세문자, 부분노출은선 등 위조방지 마크를 살펴보며 자신의 만원권과 비교해 보고 있다. (자료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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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과 인중을 따라 긴 선을 그으며 콧물이 흘러내렸다. 암모니아 냄새 때문인지 돈을 잃은 슬픔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흐르는 눈물과 콧물이 멈추지 않았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멍했지만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똥통에 빠진 나의 '세종대왕'을 구출해야 한다.

세수를 하고 마루에 걸터앉은 나는 여러 방법을 생각하다 다시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세종대왕의 상태를 다시 확인하고 싶었다. 똥 속으로 들어가 버리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에서였다.

똥 무더기 위에 세종대왕이 반듯이 누워 있었다. 그의 얼굴 한쪽에는 검은 수박씨가 달라붙어 근엄한 얼굴 표정이 우스워 보였다. 세종대왕은 태연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그 모습을 보자 빨리 그곳에서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첫 번째로 생각해낸 방법은 팔을 뻗어 직접 세종대왕을 구하는 것이었다. 정화를 해야 할 때여서 변기 입구와 그리 멀지 않은 곳까지 똥이 차 있었다. 변기 입구와 세종대왕의 거리는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손을 집어넣고 그것을 직접 꺼내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준비가 필요 했다.

방으로 들어가 옷장 속에 있는 마스크를 꺼냈다. 부엌으로 가 고무장갑을 들고, 눈이 따가울 것을 대비해 물안경도 준비하고, 무릎에 두를 비닐도 챙겼다. 이 모든 것을 착용하면 완벽할 것이라 생각했다. 화장실로 들어가기만 한다면 금세 세종대왕을 내 손으로 구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깊은 숨을 여러 번 쉬고 나서 챙겨 온 것들을 착용한 후에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상체를 숙여 변기 속으로 팔을 집어넣었다. 그러나 어린 나의 팔은 짧았다. 손가락 끝이 닿을 듯했지만 세종대왕과 내 손가락 사이의 간격은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이러다 내가 도리어 변기 속에 빠질 것 같다는 공포가 밀려왔다.

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화장실 밖을 나와야 했다. 첫 번째 시도가 실패로 끝난 뒤 마당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수박을 먹고, 돈을 바지 뒷주머니에 넣은 것과 이런 일이 생기기 전에 돈을 다 써버리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내가 널 구하면 맛동산, 고소미, 카라멜, 요구르트, 뽀빠이... 어엉. 다 사 먹어버릴 거야. 엉엉. 엄마아... 엉엉..."

한참을 울다 마당 한 쪽에 놓인 연탄집게를 보곤 두 번째 방법을 떠올렸다. 연탄을 집듯이 지폐를 집는다면 세종대왕을 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연탄집게를 들고 다시 화장실로 들어갔다. 옷이 땀으로 다 젖었다. 돈만 되찾을 수만 있다면 이런 더위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연탄집게를 변기 속으로 집어넣었다. 기다란 집게는 지폐에 닿았다. 내가 지폐를 잘 집는다면 이번에는 꼭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연탄집게를 아무리 쪼여 잡아도 지폐를 집을 수 없었다. 그래서 연탄집게의 끝을 지폐의 중앙에 찔러 넣고 들어 올렸다. 팔의 힘을 조절하고 상체를 천천히 일으켰다. 바닥을 집고 있던 손으로 돈을 잡으려는 순간 중심을 잃고 말았다. 손에 들고 있던 연탄집게가 똥 속으로 떨어져 모습을 감추었고, 검은 수박씨를 얼굴에 붙인 세종대왕은 몸을 흔들며 다시 똥 위에 내려앉았다.

'엄마가 연탄집게를 찾으면 나는 어쩌지. 돈도 잃어버리고 연탄집게까지 잃어버렸으니 큰일 났다. 어쩌지...'

나는 화장실 밖으로 나올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물안경에 눈물이 고여 앞이 흐려질 때까지 울고 또 울었다. 점점 더 일이 커지는 것 같았다. 더 일이 커지기 전에 세종대왕을 잊어야 했다. 그런데 나는 쉽게 포기 하지 못했다.

[2차 시도] 집게로 세종대왕을 구하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시도하기로 했다. 실패한다면 세종대왕을 절대 생각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 시절, 내 방은 다른 방과 달리 연탄보일러 대신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어 군불을 땠었다. 아궁이 옆에는 항상 긴 집게가 놓여 있었다. 그 집게는 나무를 아궁이 깊숙이 집어넣을 때 사용하던 것이었다. 집게를 사용하면 너무 쉽게 지폐를 집을 수 있을 터. 이제야 집게를 생각하다니... 내가 너무 바보 같았다. 나는 집게를 들고 당당한 걸음으로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집게를 잡은 팔을 변기 안으로 뻗었다.

집게 끝에 매달린 세종대왕을 곧바로 수돗가로 데려갔다. 얼굴에 붙은 수박씨를 떼어내고 세제를 풀어 통 속에 담갔다. 긴 시간이 걸릴 것 같아 몸에 차고 있던 것들을 하나씩 벗었다. 땀에 젖은 옷을 벗고 씻기도 했다. 몸에 물을 끼얹으며 통 속에 들어 가 있는 세종대왕을 보았다. 반가운 마음에 세종대왕 얼굴에 뽀뽀를 할 뻔 했다.

세 시간이 넘도록 세종대왕 구출에 힘을 썼더니 피곤이 밀려왔다. 샤워를 끝내고 마루에 큰 대자로 누워 잠을 청했다. 잠에서 깬 나는 급히 수돗가로 달려 가 통 속에 있는 세종대왕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냄새를 맡았다. 심한 암모니아 냄새는 나지 않았지만 쾌쾌한 냄새가 아직 남아 있었다. 지폐를 물에 헹구고 나서 다시 섬유유연제에 담갔다.

유연제의 장미향이 지폐에 스며들자 방으로 가져갔다. 수건 위에 지폐를 올리고 다리미질을 했다. 세종대왕 얼굴에 있던 물기가 마르며 장미향을 풍겼다. 방긋하며 내게 웃는 것 같았다. 그날 저녁 만원을 들고 슈퍼로 향했다. 먹고 싶었던 과자를 비닐봉지 안에 가득 담았다. 세종대왕이 다시 나를 곤경에 빠뜨리기 전에 그를 내 가까이 두지 않기로 했다.

돈을 지나치게 안 쓰는 친구를 만나면 이날의 일이 떠오르곤 한다. 그때 나는 친구에게 말하곤 한다.

"돈도 써야 돈이지. 안 쓰면 똥 된다."

덧붙이는 글 | 더러운 이야기 응모글



태그:#변기, #화장실, #지폐, #세종대왕, #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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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경의로움에 고개를 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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