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리그 레전드 골키퍼 최은성이 20일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은퇴식에서 관중을 향해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K리그 레전드 골키퍼 최은성이 20일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은퇴식에서 관중을 향해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


K리그의 '전설' 최은성이 정든 그라운드와 작별을 고했다. 지난 20일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K리그 클래식 2014' 16라운드 상주와의 경기에 선발 출전한 최은성은 무실점 선방으로 전북의 6-0 대승을 이끌며 선수로서의 마지막 피날레를 아름답게 장식했다.

만 43세의 최은성은 K리그 18년 동안 통산 532경기를 출전했다. 화려한 우승 경력은 없지만 기복 없이 안정적인 선방과 철저한 자기 관리로 후배들의 귀감이 되는 모범적인 선수였다. 한국이 4강 신화를 작성한 2002 한일월드컵에서는 대표팀 최종 명단에 포함되어 영광의 역사를 함께하기도 했다.

은퇴 무대 빛낸 전북과 최강희 감독의 배려

그의 마지막 은퇴 무대가 빛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현 소속팀인 전북과 최강희 감독의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K리그의 '레전드'인 최은성이지만 냉정히 말하면 그는 대전의 레전드이지 전북의 레전드라고 하기는 어렵다. 최은성은 18년의 프로 생활 중 단 두 팀에서만 활약했는데 그중 15년(1997~2011년)을 대전에서 활약했다.

532경기 중 464경기가 대전 유니폼을 입고 출전한 경기였는데, 이는 K리그 역사상 한 구단에서만 가장 많은 경기에 출전한 기록이기도 하다. 반면 전북에서 활약한 것은 3시즌도 되지 않는다. 은퇴식을 해야 한다면 전북보다는 대전에서 하는 게 더 어울렸다.

그러나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최은성과 대전의 결별 과정은 깔끔하지 못했다. 2012년 재계약 연봉 협상 과정에서 김광희 전 사장과 갈등을 빚으며 은퇴 기로까지 몰렸던 최은성에게 손을 내밀어준 구단이 바로 전북이었다.

선수 생활을 포기하는 것까지 고려했던 최은성은 전북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웠고 2년여간 68경기에 나서며 회춘에 가까운 활약으로 전북의 골문을 든든하게 지켰다. 최은성이 실질적인 전북의 주전 골키퍼로 활약한 것은 1년 정도였지만, 전북 구단은 최은성을 단지 소속팀의 자산만이 아닌 K리그의 레전드로 예우하는 차원에서 성대한 은퇴식까지 마련했다. 최은성 본인도 구단의 권유나 강압이 아닌 스스로의 의지로 물러날 시기를 선택하며 홀가분하게 아름다운 작별을 맞이할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최은성만이 아니다. 최은성에 앞서 지난해 전북에서 은퇴한 김상식도 전성기의 대부분을 성남에서 보낸 선수였다. 성남의 우승 주역이었던 김상식은 2008시즌 이후 원소속팀에서 방출 당하며 한물간 선수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이동국과 함께 전북에서 최강희 감독을 만나며 화려하게 부활했고, 2009년과 2011년 두 번의 K리그 우승을 합작하는 데 기여했고 2013년까지 5시즌 동안 선수생활을 이어가다가 유니폼을 벗었다.

K리그 역대 최고의 공격수로 손꼽히는 이동국은 포항에서 처음 축구 인생의 꽃을 피웠으나 2000년대 중반부터 슬럼프에 허덕이다가 2009년 전북에 입단한 이후 화려하게 부활했다. K리그 통산 득점왕 기록을 갈아치우고 우승을 차지한 것도 모두 전북 입단 이후의 일이었다. 이제는 전북의 레전드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중동 클럽 등에서 이동국에게 거액의 러브콜이 몇 차례 있기도 했으나 이동국은 전북과 최강희 감독과의 의리를 지키는 차원에서 소속팀 잔류를 선택했다. 이동국 역시 현재로서는 전북에서 은퇴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뿐만 아니라 전북은 올 시즌을 앞두고 김상식의 대체자로 또 다른 레전드인 김남일을 영입했다. 우리 나이로 거의 불혹을 바라보는 김남일은 지난 시즌 인천과의 계약이 불발되며 진로가 불투명했으나 최강희 감독의 적극적인 러브콜로 전북 유니폼을 입게 됐다. 이적 시장이 침체된 K리그에서 유난히 활발한 선수 영입을 단행하는 전북이지만, 젊은 선수들뿐만 아니라 노장급 선수들에 있어서도 개방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게 돋보인다.

최강희 감독과 전북의 방침은 분명하다. 능력있는 선수라면 나이에 대한 선입견에 구애받지않고 그 가치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강희 감독부터가 선수 생활 말년에 지도자 및 구단과의 불화 등으로 원치 않게 유니폼을 벗어야 했던 아픈 과거가 있기에, 베테랑 선수들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

그렇다고 전북이 단지 한물간 노장 선수들에 대하여 감정적으로만 접근했다가 손해를 본 것도 아니다. 이동국, 김상식, 최은성, 김남일 등은 모두 30대를 넘기고 한때 축구 인생의 기로에 있던 선수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전북에서 재기의 기회를 얻으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전북도 베테랑 선수들의 활약을 통해 투자한 이상의 실적을 거둬들였다. 결코 '의리'가 아닌, 비즈니스적인 면에서도 전북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또한 최은성과 김상식의 사례처럼, 떠날 시기가 된 선수들에게는 비록 짧은 시간 함께 했지만 그동안의 헌신과 선수의 위상에 걸맞은 대우로 아름다운 작별을 보여줬다. 그동안 K리그에서 쉽게 보기 어려웠던 풍경들이다.

성적보다 중요한 '레전드'의 브랜드 가치

굿바이 박찬호  18일 오후 광주 기아 챔피언스 필드에서 열린 2014 프로야구 올스타전 경기에 앞서 가진 박찬호 선수 은퇴식에서 박찬호가 팬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있다.

▲ 굿바이 박찬호 18일 오후 광주 기아 챔피언스 필드에서 열린 2014 프로야구 올스타전 경기에 앞서 가진 박찬호 선수 은퇴식에서 박찬호가 팬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


종목을 막론하고 많은 스포츠 스타들이 '떠나는 순간'이 깔끔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선수들의 잘못도 있겠지만, 그보다 한국 스포츠 문화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탓도 크다.

철저한 성과 지상주의 풍조 속에 활용도가 떨어진 노장 선수들은 하루 아침에 그저 귀찮고 다루기 어려운 용도 폐기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다. 10년 이상을 한 팀에서 헌신해온 프랜차이즈 스타도 그럴진데, 여러 팀을 전전한 '저니맨'이나 톱스타가 아닌 선수들은 변변한 고별식조차 갖지 못하고 등떠밀려 초라하게 은퇴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프로스포츠는 단지 승패만을 가리는 게임을 넘어, 대중들을 웃고울리며 감정을 이입하게 만드는 문화 콘텐츠다. 뛰는 이도, 보는 이도 감동을 느낄 수 있어야 스포츠의 매력이 있다.

흔히 프로의식이라고 하면 단지 경기장에서 좋은 기량을 선보여서 몸값을 높이고, 승부에서 많이 이기는 것만이 전부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진정한 프로의식은 선수만 아니라 구단과 팬들의 의식, 리그 고유의 문화까지 아우른다. 팀과 리그를 위하여 헌신한 선수들에 대하여 그에 걸맞은 '예우'를 해주는 문화도 넓은 의미에서 프로의식에 포함되는 것이다.

최근 프로야구에서 한국인 1호 메이저리거 박찬호의 은퇴식이 올스타전에서 열려 관심을 모은 바 있다. 사실 박찬호가 국내 프로야구에서 뛴 것은 선수 생활 막바지의 1년뿐이다. 그러나 박찬호가 한국야구에 남긴 업적과 상징성을 고려하여 선수협회와 KBO 주도로 사상 최초의 올스타전 은퇴식이 열렸다. 박찬호가 특정팀이 아니라 한국야구 공통의 자산이라는 공감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선진국일수록 스포츠 문화에도 고유의 역사성과 스토리텔링이 있다. 어떤 면에서는 우승컵 하나를 추가하는 것보다 그 클럽과 리그의 역사를 대표하는 레전드 한 명의 브랜드 가치가 더 클 수도 있다.

역사도 결국 사람에 의하여 창조되는 것이고, 훌륭한 선수의 역사는 곧 그 선수가 활약한 해당 구단과 리그의 전통이 된다. 선수와 팬, 구단이 서로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어야 K리그를 바라보는 대중의 인식도 높아진다.

이러한 존중심이야말로 장기적으로 K리그 전체의 품격을 높이는 선순환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최은성의 은퇴를 통하여 전북은 그 훌륭한 모범 사례를 다시 한 번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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