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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사고는 한국 사회의 여러 병폐를 되돌아보는, 뼈아픈 성찰의 기회를 제공했다. 300여 명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길은 이번 사고의 책임자를 처벌하는 데에만 있지 않다. 지금 우리가 직면한 여러 부조리를 바로잡아 다시는 이런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사회의 체질을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중 하나는 교육일 것이다. 과정이야 어떻든 목적만 달성하면 그만임을 가르치는 교육, 좋은 대학, 좋은 직장을 갖는 게 지상 최대의 목적으로 전락한 우리의 교육, 공동체보다는 개인만을 생각하는 교육을 바로잡아야 한다.

지난 6·4 지방선거에서 다수의 진보교육감이 선출돼 공교육을 바로잡는 혁신학교가 확대될 것이라는 전망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의 교육 시스템에서(구체적으로는 대학의 소수 정원제 입학 제도 아래에서) 혁신학교가 우리 사회의 교육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씨앗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수능점수 1점으로 당락이 결정되는 '살얼음판' 입시제도를 그대로 유지한 채 과연 혁신학교가 얼마나 혁신적일지 의문이다. 즉, 대학 입학 시스템을 개혁하는 것이 과열된 사교육을 잠재울 것이고 공교육을 보다 공교육답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정보다는 성적이 우선인 한국의 교육

헌법 31조에는 교육의 '권리'가 명시돼 있다.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 어디에도 내신성적이나 수능성적이 좋은 학생만 대학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적혀 있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성적순으로 교육의 권리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을 줄 세우고 있다. 한 반에서 1·2등을 다투는 두 학생이 모두 서울대 법대를 가고자 할 경우, 이들은 결국 하나의 목표를 두고 경쟁을 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대학 서열이 계급으로까지 비화되는 현재의 분위기는 다른 학생보다 내가 더 뛰어나야만 하는, 그리고 다른 학생은 나보다 못나야만 하는 비인간적 풍조를 낳는다. 소위 명문 대학에 다닌다는 학생들이 자신들보다 '서열'이 낮은 대학 학생들을 무시하는 경향은 최근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정원제에 기반한 대학의 입시 시스템이 만들어낸, 한국 사회의 오래된 악습이다.

이 문제의 해법은 상당히 간단할 수도 있다. 바로 우리나라의 여러 국립대학을 정원 제한이 없는 개방대학 형식으로 통합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한국방송통신대학교의 오프라인 버전이라 할 수 있다.

얼토당토않은 생각 같지만, 독일의 공립대학은 오랜 기간 동안 이 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독일의 대학은 의대·법대 등의 특수한 학과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학부에 정원 제한이 없다.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수학 능력(학과마다 차이가 있다)이 검증된 수험생이면 인원 제한에 따른 경쟁 없이 자신이 원하는 대학 원하는 학과에서 공부하는 것이 가능하다. 한 학과의 신입생이 수백 명에 이르는 경우도 허다하다.

정원 제한 없는 대학의 효과

베를린자유대학교 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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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별로 분산된 국립대학이 하나로 통합된 후 지역 캠퍼스로 운영될 경우, 서울 중심의 지역 불균형을 해소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에는 인재가 넘쳐나지만 지방에서는 사람이 없어 고민하는 문제를 '대학 도시' 육성을 통해 해결하는 게 가능하다. 지역별로 특정 학과 거점 도시를 만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또한 엄청난 수의 고학력 실업자를 위한 일자리 창출도 가능할 것이다. 정원 제한 없는 대학이 등장할 경우 일시적으로 입학생이 증가하는 현상이 벌어질 것이다. 학생들에게 차질 없이 대학 수업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교직원의 수도 증가해야 한다. 박사학위를 받고도 일자리가 없는 이들은 좋은 강사가 될 수 있고, 대학의 학사 운영을 위한 행정직은 대졸 실업자에게 취업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제도는 대학의 구조조정에도 도움을 줄 것이다. 대학이란 학문을 닦는 상아탑이다. 대학이 상아탑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그 만큼의 실력이 담보돼야 한다. 대학 입학이라는 엄청난 '수요' 덕분에 돈벌이 수단으로 만들어진 실력 없는 사립대학은 하루빨리 문 닫는 것이 학생들을 위해서도 그리고 우리 사회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다. 정원 제한 없는 통합 국립대학이 만들어진다면 경쟁력 있는 몇몇 사립대학을 제외한 영양가 없는 사립대학은 자연스레 퇴출될 것이다. 교육은 돈벌이 수단이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교육의 부담을 줄일 수 있다. 대학 교육을 위한 수학능력을 향상시키기에 공교육보다 좋은 것은 없다. 수업을 듣고, 이를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이해한 내용을 다른 학생들과 토론하고, 부족한 내용에 대해서는 스스로 찾는 노력, 이것이 대학 교육을 위한 수학능력의 전부 아니겠는가.

독일의 입시 수험생들은 다른 학년과 마찬가지로 오후 2~3시면 하교한다. 고등학교에서 제공하는 수업을 따라가는 것만으로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수학능력 함양이 충분하기에, 밤늦게까지 사설 학원에서 기출 수능문제를 달달 외우는 반교육적인 행위를 할 필요가 없다.

대신 독일의 수험생들은 학교 후 친구들과 록밴드를 구성해 연습을 하거나, 수영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정당이나 시민단체에서 봉사 활동을 하면서 오후 시간을 즐긴다. 말 그대로 '전인교육'이다.

비용 문제와 대학 경쟁력

정원 제한 없는 대학 입학제도가 한국 사회에 도입된다면 시행 초기 몇 년간은 혼란이 발생할 수도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신입생뿐만 아니라 이미 대학을 다니던 재학생도 새로운 국립대학으로 학적을 옮길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비용이 발생할 것인데, 이는 최근 들어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된 '반값 등록금'에 들어갈 예산으로 어느 정도 보완될 것이다. 시간이 지나 새로운 대학 시스템이 자리를 잡는다면, 독일과 같은 공립대학 무상 등록금 시대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정원 제한을 없애자고하면 대학 경쟁력이 떨어질 것이라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는 불필요한 걱정이다. 독일의 의대는 실습 여건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인원 제한을 두고 있다. 의대에서 요구하는 수학능력 이상의 성적을 얻지 못한 학생의 경우 지금 당장 입학은 못하지만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면 2~3년 후 입학이 허용된다. 그렇다고 독일 의대의 수준이 다른 나라에 비해 형편없다거나, 독일 의대가 돌팔이 의사를 양산한다고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

입학 문턱과 졸업의 자격은 결코 동일하지 않다. 학생들의 실력은 대학에서 공부하는 중에 자연스레 가려진다. 독일 대학은 전공 필수 과목을 3회 낙제한 학생을 해당 과에서 제적하는 규칙을 갖고 있다.

학생들의 도덕적 해이를 막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적성에도 맞지 않는 공부를 억지로 하는 비효율성을 예방하는 제도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대학 교수들 스스로 자신들의 명예를 위해 학점을 남발하지 않는다. 이러한 규칙과 자정 노력이 함께 조화를 이뤄, 대학을 졸업했다는 것 자체로 학생의 학문적 성과와 생활의 성실성을 검증받는 문화가 독일 사회에 뿌리내린 것이다.

한국 대학의 적폐, 늦기 전에 바로잡아야

높은 대학 진학률에도 불구하고 학문적 성과는 다른 나라에 비해 한참 뒤떨어지는 한국의 현실은 우리의 대학 시스템이 얼마나 비효율적인지 보여준다. 대학 입학 자체로 한 사람의 인생이 결정되는 입시 위주 시스템의 폐해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공교육이 진정한 공교육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대학의 입학 문턱이 낮아져야 한다. 공부를 원하는 누구에게든 내가 낸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립대학에 들어갈 자유와 권리가 제공돼야 한다.

단, 들어가는 것은 쉬우나, 졸업은 쉽지 않다는 사실 또한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학과 정원이 폐지된 무상 국공립대학이 우리 사회에 도입돼야 공교육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고, 과열된 사교육 열풍도 줄어들 것이다. 독일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독일에서 생활하면서 듣는 얘기 중 하나는, '한국 사람들은 매우 똑똑한데 함께 일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무한 경쟁에서 살아남은 이들이니 오죽 똑똑하겠냐마는, 문제는 혼자서는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또, 무한 경쟁에서 과연 몇 명이나 살아남을 수 있는지도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엄청난 청소년 자살률은 어쩌면 세월호 사고보다 더 무서운 재앙이다.


태그:#독일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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