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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송전탑 투쟁과 전기의 진실을 이토록 간명하게 표현할 수도 있을까?
▲ 밀양 여수 마을 어귀에서 밀양 송전탑 투쟁과 전기의 진실을 이토록 간명하게 표현할 수도 있을까?
ⓒ 윤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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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밀양은 내게 '마음이 무거워져 발길마저 무거워지는' 곳이 되었다.

지난 6월 11일, 행정대집행이라는 이름의 극악무도한 국가폭력이 자행되는 모습을 <오마이뉴스>를 통해 확인하면서 나는 '어떻게 질 것인가를 고민해 왔다'는 대책위 이계삼 사무국장의 말부터 떠올렸다. (관련 기사: 밀양 송전탑 반대 농성장 3곳 추가 개장, 5일 촛불집회)

경찰을 앞세운 정부와 한국전력은 과연 힘이 셌다. 밀양 어르신들의 전무후무할 '마을 지키기' 10년 투쟁은 허사로 돌아갔고, 마을 곳곳에 흉측한 고압 송전탑들이 그들의 욕망대로 들어선 것이다.

바람보다 먼저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 사람들

밀양의 사람들이 농성장을 다시 차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니 그토록 혹독하게 찢기고 짓밟히고도? 나는 만신창이가 되어 죽었던 사람이 언제 그랬냐는 듯 벌떡 일어나는 모습을 상상했다. 다시 일어서는 밀양 사람들을 보고 싶었다. 폭력과 탐욕과 악의 바람은 늘 승리해 왔을지라도 '바람보다 먼저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서'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 그 사람들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지난 6월 28일 '밀양 송전탑 시즌 2'의 첫 신호탄으로 부북면 평밭 마을을 비롯한 7개 마을에 농성장이 차려진다고 할 때 나는 가보지 못했다.

여수 마을 어르신들이 고사를 지낼 상 앞에서 정담을 나누고 있다.
▲ 여수 마을에 새로 단장한 농성장-사랑방 여수 마을 어르신들이 고사를 지낼 상 앞에서 정담을 나누고 있다.
ⓒ 윤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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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난 5일 오후 5시 나는 부산 교대 부근에서 출발하는 밀양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부산환경운동연합 활동가, 대학생들을 비롯한 35여 명의 연대자를 태운 버스가 여수 마을(거기에도 새로 단장한 컨테이너 앞에 고사상이 차려져 있었고 주민들은 두 팔을 들어 우리를 반겼는데 우리 일행은 반 정도만 거기에 내렸다)을 거쳐 고답 마을에 도착한 것은 저녁 7시경이었다.

'우리는 다시 시작한다'는 큰 글자와 그 바로 밑에 '고답 마을 사랑방 개장식'이라는 작은 글자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농성장이 아니라 '사랑방'이다. 살벌했던 농성장을 오손도손 사랑방으로 꽃피워 내고자 하는 마을 사람들의 마음과 결의, 그것이 바로 '다시 시작'인 것이다.

사랑방 마당에는 고답 마을과 이웃 고정 마을의 어르신들, 주민들, 경향 각지에서 찾아온 연대자들로 북적댔다. 부녀회 엄마들이 준비한 '세상에 가장 맛있는'(한 마을 어르신의 말) 추어탕, 오징어무침, 소고기볶음, 상추와 깻잎에 맛나게 밥을 먹고 나니 "밀양에 갈 때마다 할머니들에게 오히려 힘을 얻고 왔다"던 버스 속 한 대학생의 말이 절로 떠올랐다.

이계삼 대책위 사무국장이 진행한 개장식의 백미는 '밀양 송전탑 반대 상동면 고답 마을 주민 및 연대자 일동'으로 천지신명께 고한 말인 '고천문' 낭독 시간이었다. 이 고천문에는 '밀양시즌2'가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감동적이고도 소상히 담겨 있으므로 전문을 그대로 옮겨놓는다. (아래 박스 참고)

"우리는 다시 시작한다"는 마을 어르신들의 마음을 전하는 대책위 이계삼 사무국장
▲ 고답 마을 사랑방 개장식의 마당에서 "우리는 다시 시작한다"는 마을 어르신들의 마음을 전하는 대책위 이계삼 사무국장
ⓒ 윤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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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손잡고 어려운 시간을 지켜 나갈 우리를 굽어 살피소서"
▲ 고답 마을과 이웃 마을 어르신들이 천지신명께 업드려 고하는 모습 함께 손잡고 어려운 시간을 지켜 나갈 우리를 굽어 살피소서"
ⓒ 윤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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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개장식의 마당은 뒤이어 등장한 젊은 연대자들(평화캠프에 참여하고 있는 대학생들, 하자 작업장 학교의 북치는 밴드)의 노래와 공연으로 더욱 잔치 분위기로 달아올랐다. 마을 어르신들의 어깨가 들썩거리고, 웃음꽃이 더욱 만발했다.

그러나 그 흥성한 열기 속에서도 내 마음 한 구석으론 슬픔의 먹구름이 밀려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같은 잠깐의 축제 시간이 끝나고 연대자들이 뿔뿔이 자신의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고 나면, 혼자의 밤이 오고 아침이 온다. 그러면 밀양의 어르신들은 10년의 아뜩한 투쟁 세월 속에서 저 극악무도한 국가 폭력으로 몸과 마음에 깊이 박혔을 아픔과 상처와 절망을 또한 홀로 마주하게 될 것이었다.

밀양 송전탑 시즌 2... "저 철탑, 우리 손으로 뽑는 날이 올 것이다"

평화캠프의 젊은 대학생들이 노래 공연을 하기 앞서 마을 어르신들에게 '존경과 사랑'의 말을 전하고 있다
▲ 아름다운 얼굴들-1 평화센터의 젊은 대학생들이 노래 공연을 하기 앞서 마을 어르신들에게 '존경과 사랑'의 말을 전하고 있다
ⓒ 윤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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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자작업장학교에서 브라질 음악을 즐긴다는 청년들의 신나는 공연
▲ 아륻다운 얼굴들-2 하자작업장학교에서 브라질 음악을 즐긴다는 청년들의 신나는 공연
ⓒ 윤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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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0시경, 부산으로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나는 깜박 잊고 있던 한 목소리를 다시 들었다.

"우리 마음에 꽂힌 철탑은 아닙니다……!"

이계삼 사무국장도 이 말을 했고, 어느 마을의 이장님인가도 이런 말을 했다. 놀랍고도 감동적인 말이었다.

한전과 정부가 수많은 송전탑을 땅속 깊이 때려 박아 고향을 무너뜨리고, 마을 사람들의 평화를 무너뜨리고, 상부상조해 온 미덕도 무너뜨렸지만, 반대투쟁에 나선 사람들의 다시 시작하려는 마음까지는 끝내 무너뜨리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밀양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이대로 물러서지 않는다면 저 철탑을 우리 손으로 뽑아버리는 날도 올 것입니다!"

그날은 과연 올까? 그러나 듣건대 최근 타이완에서는 100% 가까이 공사가 완료된 원자력 발전소를 주민들이 끈질기게 싸워서 막아낸 '기적'도 일어났다. 그날 개장식에 참여한 일본인이자 타이완의 한 대학 교수는 그걸 증언해 주기도 했다.

그 날을 오게 해야 한다는 과업은 밀양 주민들만의 몫도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밀양의 투쟁을 통해 더욱 분명히 알게 되었다. 대책위는 이렇게 말했다.

"잡은 손 놓지 않겠다는 약속이 바로 '밀양 송전탑 시즌 2'입니다."

고천문
유세차~ 갑오년 7월 5일 밀양시 상동면 고답마을 송전탑 반대 주민들은 우리들의 보금자리를 새롭게 꾸민 뒤에 심신을 정결케 하옵고 천지신명께 고합니다.

고답마을은 앞으로는 맑은 강이 흐르고, 뒤로는 과수원과 푸르른 산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고장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전력이라는 괴물이 우리 마을 바로 뒤에 114번, 115번 철탑을 세우려 하면서 지금 우리는 이 고통 속에 내던져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아무 욕심 없이 오직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가기만을 원하였느나 그 뜻을 이루는 일이 왜 이리도 어려운 것입니까? 우리는 지금 너무 힘들고 괴롭습니다.

지난 6월 11일, 수천명의 경찰이 몰려와 마지막 4개 농성장에 있던 주민들을 짐승처럼 끌어냈습니다. 우리는 울부짖었습니다. 우리는 아무 지은 죄가 없습니다. 우리가 강도짓을 했습니까? 우리가 도둑놈입니까? 지금 이 나라에서 누가 도둑놈이고 누가 강도입니까?

우리는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분한 마음 서글픈 마음 억누르고 다시 이곳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우리는 행정대집행도 당했고, 손해배상소송도 당했고, 공사방해금지가처분도 당했고, 업무방해로 고발도 당했고, 도로교통법 공무집행방해 집시법 위반으로 경찰 검찰 문턱을 넘나들었고, 판사님 앞에서 고개 조아리기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싸움의 과정에서 또한 소중한 것을 배웠습니다. 진실과 정의를 외면하지 않는 수많은 전국의 연대자들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공무원도, 국회의원도 우리를 버렸지만, 우리를 외면하지 않는 이웃들을 만나게 되었고, 우리가 틀리지 않음을 알았으며, 원전의 위험도 깨닫게 되었고, 진실과 정의는 언젠가는 만천하에 밝혀지고 말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천지신명이시여!

우리의 소망이 있다면, 우리의 분함과 억울함을 만분의 일이라도 푸는 것입니다. 이 사태가 정의의 궤도 위에서 진실이 밝혀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억울하게 입은 고통과 피해에 대해 정부와 한국 전력이 무릎 꿇고 사죄하고 정당한 조치를 해 주는 것입니다. 송전탑을 뽑아내고 원전을 해체하는 것입니다. 한전과 정부 때문에 멀어졌던 이웃들과 화해하고 다시 마을 공동체가 복원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날을 기다리며 오늘 이곳 사랑방에 보금자리를 칩니다.

그날까지 우리는 이곳 사랑방에서 함께 손님을 맞으며 함께 기도하고, 먹고 마시고, 이야기 나누며 따뜻한 시간을 일구어갈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손잡고 이 어려운 시간을 지켜갈 것입니다.

부디 이 사랑방을 호시탐탐 노리는 공무원 귀신, 경찰 잡귀, 한전 아귀새끼들은 싹싹 밟아 변소깐에 쳐 넣어주시고, 우리들 넉넉하고 따뜻한 웃음살만 번져 가는 사랑방이 되도록 천지 신명께서 도우소서. 오늘 우리가 차린 이 음식 함께 흠향하옵소서. 상향.



태그:#밀양, #송전탑 저지 투쟁, #탈핵, #원자력 발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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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오랫동안 고교 교사로 일했다. <교사를 위한 변명-전교조 스무해의 비망록>, <윤지형의 교사탐구 시리즈>, <선생님과 함께 읽는 이상>, <인간의 교사로 살다> 등 몇 권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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