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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에 부처를 새기니 가치가 높아지네

계유가 새겨진 아미타불비상(국보 제106호)
 계유가 새겨진 아미타불비상(국보 제10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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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모든 박물관에는 간판이 있다. 루브르 박물관의 간판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다. 대영 박물관의 간판은 로제타스톤이다. 그리고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간판은 렘브란트와 마티스의 그림이다.

그럼 국내 박물관은 어떨까? 국립중앙박물관의 간판은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다. 그리고 국립고궁박물관의 간판은 천상열차분야지도와 백자 달항아리다. 그럼 이번에 소개할 국립청주박물관의 간판은 무엇일까?

나는 단연코 불비상(佛碑像)이러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불비상이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비상의 조각이 정교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이곳의 불비상 중 '계유가 새겨진 아미타불'(국보 제106호)과 '기축이 새겨진 아미타불과 보살'(국보 제367호)이 국보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미륵보살반가사유비상'(보물 제368호)은 보물로 지정되었다.

미륵보살반가사유비상(보물 제368호)
 미륵보살반가사유비상(보물 제3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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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불비상은 도대체 어떤 유물인가? 말 그대로 비석에 새긴 불상이다. 그럼 이 불비상은 언제 어디서 만들어졌으며, 그것을 만든 이유는 뭘까? 불비상은 통일신라 초기 현 세종시 일대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비상이 발견된 곳은 세종시 비암사(碑岩寺)다. 곱돌로 불리는 납석(蠟石)에 정교하게 조각을 했는데, 조각의 정교함이 다른 불상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장인의 기술이 뛰어났기 때문이기도 하고, 납석이 부드러워 조각하기 쉽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들 불비상에는 조성한 이유를 기록한 조상기(造像記)가 있다. 그에 따르면, 백제의 유민들이 백제의 국왕과 조상을 위해 아미타불을 조성한 것으로 되어 있다. 아미타불이 주재하는 극락정토를 묘사함으로써 백제의 조상들이 극락왕생할 것을 염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비암사 불비상은 백제 유민들의 염원과 한을 담은 특별한 문화유산이다.  

중원문화의 중요 유물이 모두 이곳에...

충주 금릉동에서 출토된 손잡이 달린 항아리
 충주 금릉동에서 출토된 손잡이 달린 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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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박물관에는 충청북도에서 출토된 중요한 유물이 전시되고 있다. 충북은 전통적으로 중원문화권으로 분류되고 있으며, 그 중심에 충주와 청주가 있다. 충주는 남한강 중류에 위치한 수운의 중심지로, 경상도와 강원도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다. 그 때문에 사람이 모이고 생필품과 토산품이 모여 마을을 형성하고 도시를 형성했다. 최근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남한강 중류 충주에서 단양에 이르는 지역의 역사가 구석기까지 거슬러 올라감을 확인할 수 있다.

구석기 유물로는 단양 수양개에서 발굴된 주먹도끼, 슴베찌르개, 긁개가 있다. 신석기시대 들어 사람들은 수렵어로에서 농경으로 삶의 방식을 바꾼다. 뗀석기로 땅을 파는 도구를 만들고, 간석기로 목재를 다듬는 도구를 만들었다. 또 이들은 토기를 만들어 곡물을 저장하고 생활용품으로 시용했다. 단양 상시동굴에서 발견된 덧띠무늬 토기, 충주 조동리와 청원 쌍청리에서 발견된 빗살무늬 토기가 이 시대를 대표한다.

청동기 시대에는 민무늬 토기와 돌화살촉, 돌검, 돌칼 등이 발견된다. 철기 시대에는 청동과 철이 공존한다. 한국식 동검이 나타나고, 마구와 무기류 제작에 철이 사용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소위 삼한으로 불리는 고대에는 토기, 청동기, 철기를 사용해 생산력이 급격하게 증대된다. 이를 통해 고대문화가 형성된다. 이러한 고대문화는 삼국시대로 이어져 국가간에 경쟁하는 체제로 발전하게 된다.

충주 고구려비
 충주 고구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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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문화권은 4세기 무렵 백제의 세력권에 들어간다. 충주, 청주, 진천 등에서 양질의 철제 마구와 무기 등이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5세기 고구려의 남진으로 중원문화권 중 남한강 유역은 고구려 세력권으로 편입된다. 그 증거가 충주 용전리에 있는 고구려비다. 비문을 보면 장수왕이 소백산 지역까지 고구려 영토를 넓히고 신라와 형제관계를 맺는 내용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충주 고구려비는 척경비, 회맹비, 송덕비의 성격을 가진다.
      
중원문화권은 6세기 중엽 신라 진흥왕 때 신라의 영토가 된다. 이것을 증명하는 비석이 단양 적성비다.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인 남한강 중상류 지역을 점령한 후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적성에 세운 비석이다. 적성비에는 신라의 영토 확장을 돕고 충성을 바친 적성인의 공훈을 표창하고, 장차 신라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포상을 내리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단양 출토 동관
 단양 출토 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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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 땅이 신라 지역이 되었음을 알 수 있는 또 다른 유물이 단양 하리에서 출토된 동관이다. 동관은 둥근 관대에 출(出)자 모양의 장식 네 개를 동실(銅絲)로 묶어 고정시켰다. 동관에 붙인 달개장식, 맞새김기법, 찍어 새긴 점선무늬 등이 신라시대 금동관과 그 맥을 같이 한다. 그러므로 이 동관은 6세기 중반-7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충북 지역이 중원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신라 때다. 충주지역을 차지한 신라는 557년 충주를 국원소경이라 불렀고, 통일 후인 757년에는 중원경이라 불렀다. 현재 충주에는 국보 제6호인 중앙탑이 있다. 이 이름을 통해 남한강 중류 충주 지역이 통일신라 시대 국토의 중앙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청주박물관에 전시된 중원문화권의 유물로는 충주 탑평리에서 출토된 연화문 수막새, 청주 운천동 사적비, 불상과 범종 등 불교문화재가 있다.

흥덕사지 유물도

흥덕사 출토 쇠북
 흥덕사 출토 쇠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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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박물관에서 가치 있는 또 다른 문화재로는 흥덕사지 출토유물이 있다. 1984년 청주 운천동 지역의 택지조성 과정에서 청동쇠북(金鼓)이 발견되었는데, 그곳에서 '갑인년 오월 서원부 흥덕사(興德寺) 금구 일좌'라는 명문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직지심체요절>을 인쇄했던 흥덕사가 이곳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곳 운천동에서는 금구 외에도 망새, 도깨비 얼굴무늬 기와, 범종, 금강저 등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운천동에서 멀지 않은 사직동에서는 1993년 460점이 넘는 엄청난 불교유물이 발굴되었다. 그 중 청동쇠북에서 역시 사뇌사(思惱寺)라는 명문이 확인되어 이곳이 사뇌사임을 알 수 있었다. 사뇌사에 대한 기록은 <조계 진각국사 어록>, <송광사지>, <보한집> 등에 나오며, 이를 통해 사뇌사의 실체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사뇌사 출토 불교문화재는 고려시대 사원의 성격과 경제를 아는 데 아주 중요하다.

사뇌사 출토 금강령
 사뇌사 출토 금강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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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출토된 대표유물로는 향로, 금강령, 범종, 청동 항아리, 명문 향완, 청동 주전자 등이 있다. 이들은 대부분 의식구들로 그 수준이 높아 고려시대 공예기법을 아는 데 대단히 중요하다. 그 중에서도 매다는 향로, 금강령, 범종의 조각이 정교하고 아름답다. 청정한 향기를 담아 경건한 공간을 만드는 향로, 종소리를 내 사람을 모이게 하는 향로, 사악한 마음을 털어내는 금강령은 사찰 의식에 사용되는 중요한 법구(法具)다. 

충청도 양반고을의 학맥을 찾아서

충청도 고지도
 충청도 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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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가 양반고을이 된 것은 언제 부터일까? 또 누구에 의해 그 맥이 이어졌을까? 충청도가 양반 고을이 된 것은 조선 후기다.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학맥이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을 통해 충청도로 넘어왔기 때문이다. 사계 김장생은 경학과 예학에 밝은 영원한 선비로 알려져 있다. 그는 한양에서 공부하던 김계휘(金繼輝)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계휘는 1549년 과거에 급제해 벼슬이 대사헌에 이르렀고, 벼슬하는 동안 박순, 기대승과 가까이 지냈다. 그리고 기대승, 이이와는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어 뜻을 같이 했다. 그런 연유로 김장생은 나이 스물에 이이의 문하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김장생은 이미 열세 살 때 구봉 송익필의 문하에서 [사서]와 [근사록]을 공부한 바 있다. 그러나 사계는 학문에만 전념했지,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우암 송시열 초상
 우암 송시열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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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이 사십사 세에 정산현감에 부임했고, 임진왜란이 끝나고는 안성군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벼슬을 하지 않을 때 향리인 연산으로 돌아와 후학을 가르치곤 했다. 이때 만난 제자들이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동춘당(東春堂) 송준길(宋浚吉)이다. 이런 송시열의 학맥은 청풍에 은거한 수암(遂菴) 권상하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충청도 양반고을의 학맥은 한양-연산-청천-청풍으로 옮겨 간다.
   
이곳 청주박물관 전시실에 송시열, 권상하(權尙夏), 정호(鄭澔), 윤봉구(尹鳳九)의 초상이 걸려 있다. 우암 송시열은 숙종 때 정치를 좌지우지한 노론의 영수다. 우암 초상의 위쪽에는 '우암 선생의 74세 때 모습(尤庵先生之七十四歲眞)'이라는 화제가 적혀 있다. 이를 통해 이 그림이 1680년에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권상하는 우암의 수제자로 남한강변 청풍에 한수재(寒水齋)를 짓고 후학을 가르쳤다. 그의 초상은 18세기 초반 궁중 화원이었던 김진여가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암 정호 초상
 장암 정호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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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는 호가 장암(丈巖)으로 영조 때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이곳에 전시된 그의 초상은 표정에서 의연함과 꼿꼿함이 느껴진다. 권상하가 초야에서 학문으로 노론을 이끌었다면, 정호는 조정에서 노론의 정치적 이해를 대변했다. 그 때문에 오히려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이러한 그의 정치관과 삶의 자세는 [조선왕조실록]에 있는 졸기(卒記)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정호는 문청공(文淸公) 정철(鄭澈)의 후손인데,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몸가짐이 강직하고 방정하였는데, 언론이 과격하였기 때문에 오랫동안 조정에서 편안히 있을 수가 없었다. 지위가 삼사(三事)에 이르렀으나, 집에서는 죽으로도 끼니를 잇지 못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 그 고장(충주)에 살면서 청신(淸愼)하다는 것으로 이름이 났었다."

병계 윤봉구 초상
 병계 윤봉구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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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계 윤봉구는 남당 한원진과 함께 권상하의 수제자다. 병계와 남당은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의 같고 다름을 논한 호락논쟁에서 인물성상이론의 입장에 섰다. 이들의 초상화는 원래 황강영당에 있는 것으로, 이곳에는 복제품이 걸려 있다. 이들 초상화를 통해 우리는 조선 유학의 큰 맥인 기호학파 유학자들의 면모를 조금은 파악할 수 있다. 이들의 유학은 화서 이항로(李恒老)를 거쳐 조선 말기 의병장 의암 유인석(柳麟錫)에게로 이어진다.


태그:#국립 청주박물관, #불비상, #중원문화권, #흥덕사와 사뇌사, #충청도 양반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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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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