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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나 인물의 기록을 뜻한다. 시사는 당시에 일어난 여러 사회적 사건이다. 여기서 당시란 현재의 개념으로 쓰인다. 오늘의 역사인 셈이다. 흔히 역사를 과거의 일로 박제시키곤 한다. 그러나 시사와 역사는 단절된 별개가 아니다. 그렇기에 역사를 현재와 연결지으려는 시도는 중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E.H.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 정의했고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명언을 남겼다.

<정도전> 마지막회 중 이방원(안재모 분)의 칼에 죽는 정도전(조재현 분).
▲ <정도전> 마지막회의 한 장면 <정도전> 마지막회 중 이방원(안재모 분)의 칼에 죽는 정도전(조재현 분).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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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9일, 50회를 끝으로 종영된 사극 <정도전>은 '역사'와 '시사'를 연결 짓는 드라마다. '역사'를 소재로 했음에도 오늘날 한국사회에 필요한 정치개혁적 메시지를 화두로 던졌기 때문이다. <정도전>은 기획의도부터 시사성이 드러났다. 정현민 작가는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고려 말)당시에도 민생 문제가 팽배했다. 오늘날 사회 양극화와 부의 편중이 심각해져가면서 민생 정치가 사라졌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정도전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사회가 오버랩 될 거라 생각했다"며 정도전을 극의 소재로 선택한 이유를 밝혔다.

시사성 갖춘 개혁사극의 등장과 한계

시사성이 강한 사극은 <정도전>이 처음이 아니다. 특히 '정치개혁'을 소재로 다룬 사극 중 비슷한 작품이 많다. 대부분이 기득권 세력에 맞서 민중을 위한 정치개혁의 과업을 달성하려는 내용을 담는다. <정도전>과도 일치하는 대목이다. 이를 '개혁사극'이라 임의로 정의한다면 다음과 같은 작품이 개혁사극의 범주에 든다.

고려 공민왕과 신돈의 개혁정치를 소재로 한 MBC <신돈>. 조선 정조 시기 개혁정치를 담은 KBS <한성별곡>. 조선 세종이 저항 속에서 한글창제를 단행한다는 내용의 SBS <뿌리깊은 나무>. 영화로는 조선 광해군의 개혁정치를 담은 <광해>와 조선 정조시기 노론세력과 정조의 갈등을 담은 <역린>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역사'를 통해 '시사'적 의미부여를 하고자 한 점에서는 의의가 있으나 '역사' 자체를 충실히 구현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문제가 있다. 시사성에 함몰되어 사극 본연의 역할에 소홀했기 때문이다. <신돈>은 비교적 공민왕의 개혁정치를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 충실히 담았으나 주인공 신돈(손창민 분) 및 주변 인물과 관련한 대부분의 사건이 허구적 내용이다. <뿌리깊은 나무>는 극의 중추인 밀본세력 설정 자체가 창작이다.<광해>와 <역린> 역시 군주가 표방하는 큰 틀의 개혁정치의 성격을 제외한 세부적 내용이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참여정부 말 기획된 이 드라마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정조를 동일시하는 예고편 구성으로 논란이 됐다.
▲ <한성별곡> 예고편 참여정부 말 기획된 이 드라마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정조를 동일시하는 예고편 구성으로 논란이 됐다.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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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별곡>은 노골적인 노무현 코드가 문제였다. 드라마 예고편에서부터 노무현 전 대통령과 정조(안내상 분)를 교차편집해 논란이 일었다. 실제 방영분에선 편집됐지만 "막가자는 게로구나"라는 대사도 있었다. 또, "병조판서가 타국에 원병 청할 궁리부터 하다니 부끄러운 줄 아시오", "이러니 보위를 내어놓겠다는 것이 아닌가" 등  노 전 대통령을 연상시키는 대사가 잦았다. 과도한 노무현 코드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경우가 있었다. 정조(안내상 분)가 수원으로 수도이전을 추진하려다 노론세력에 의해 저지당하는 설정은 세종시 수도이전 논란과 빼닮았다. 그러나 실제 정조가 수원으로 천도를 강행하려 했다는 역사적 근거는 없다.

<정도전>, 정치개혁 사극 장르의 완성

물론, 드라마의 특성상 허구적 내용을 가미하는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하다. 사극은 극의 장르이지 다큐멘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시지에 함몰되어 창작이 극의 전반을 차지하거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해당 시대를 충실히 구현해야 하는 사극 본연의 의미를 퇴색시킨다. 무엇보다 사극 속 인물과 사건이 시청자의 역사인식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이는 <기황후>를 통해 불거졌던 픽션사극에 대한 비판과도 일맥상통한다. 요컨대, '역사'와 '시사'의 균형이 중요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도전>은 역사상의 시대 구현과 시사적 메시지가 적절한 균형을 이룬 작품이다. 허구적 인물과 사건을 찾아보기 힘들다. 가공인물로 민중의 순수함과 비극성을 상징하는 양지(강예솔 분)가 있었으나 극의 개연성을 위한 장치로 작용했으며 그 비중은 크지 않았다. 전반적인 사건과 인물에 대한 고증 수준이 우수했다.

물론, 정도전의 비장한 최후 장면은 이방원에게 살려달라고 빌었다는 역사기록과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는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비판적 접근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재해석은 책 <정도전을 위한 변명> 등에서 평소 정도전의 성품과 관련한 기록을 통해 제기된 문제다. 

1화에 마암 영전 공사에 쓰일 망새 운반장면이 나오는데 마암 영전의 망새를 거금을 들여 화려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고려사절요>에 나오는 내용이다. 시청자가 일일이 알기 힘든 점 까지도 세밀하게 고증한 흔적이 엿보인다.
▲ <정도전> 1화 속 마암 영전 '망새' 1화에 마암 영전 공사에 쓰일 망새 운반장면이 나오는데 마암 영전의 망새를 거금을 들여 화려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고려사절요>에 나오는 내용이다. 시청자가 일일이 알기 힘든 점 까지도 세밀하게 고증한 흔적이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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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역사의 충실한 재현은 복식과 소품까지도 사료에 입각해 비교적 충실한 고증할 정도였다. <정도전> 1화에 마암 영전 공사에 쓰일 망새(지붕 끝에 달린 기와의 일종) 운반장면이 나오는데 일반 건축에서 쓰이지 않는 황금색이다.

<고려사절요>에 마암 영전의 외관과 관련한 기록을 찾아봤더니 "8월에 영전(영전)의 망새가 이루어졌는데, 그 장식에 황금 6백 50냥과 백은 8백 냥이 들었다"는 기록이 있었다. 마암 영전 건축에서 망새의 장식이 특출나게 화려했던 것인데, 시청자가 역사서를 뒤지지 않는 한 알아내기 힘든 점까지 고증해낸 제작진의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또, 극이 담지 못한 역사적 사실을 나레이션과 마무리 다큐멘터리를 통해 보완하기도 했다.

KBS <정도전>은 일요일마다 방영 직후 마무리형식의 다큐멘터리를 내보낸다. 중인물과 관련한 사적지 및 사건설명이 주된 내용이다. 이는 NHK 대하드라마의 전통인 다큐멘터리 구성을 과감히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 KBS <정도전> 마무리 다큐와 NHK <료마전> 마무리 다큐 비교. KBS <정도전>은 일요일마다 방영 직후 마무리형식의 다큐멘터리를 내보낸다. 중인물과 관련한 사적지 및 사건설명이 주된 내용이다. 이는 NHK 대하드라마의 전통인 다큐멘터리 구성을 과감히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 금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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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속 정도전이 정치인과 국민에 던지는 메시지

그렇다면 <정도전>이 정도전과 여말선초 시대를 통해 시청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정치인을 향한 메시지로 정치가 민생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근원적 질문이다. 다음은 정도전(조재현 분)이 이성계(유동근 분)에게 역성혁명을 권유하며 이야기한 '이상'이다.

"덕을 갖춘 왕이 인과 예를 몸소 실천하는 왕도정치의 나라. 한줌의 귀족이 아니라 백성이 근본이 되는 나라. 가문과 혈통이 아니라 능력만 있다면 누구나 사대부가 되어 벼슬을 할 수 있는 나라. 백성이라면 누구나 자기 땅을 갖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나라. 그것이 내가 꿈꾸는 나라요."

마지막회에서 정도전(조재현 분)은 이방원(안재모 분)에게 임금의 역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라의 주인은 백성이다. 임금은 백성을 위해 존재하는 도구다."

본래 정치란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민생을 저버리고 정치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려 전도된 현실이다. 한국사회의 기득권 정치세력만의 문제가 아니다. '민생'을 표방하며 노동자와 농민을 대표한다는 정당마저 노동자, 농민 국회의원은 찾아보기 힘들다.

더욱이 NL과 PD의 정파적 갈등으로 서로를 적대시하고 분열을 거듭한 것이 진보정치의 현주소다. 이런 점에서 정도전이 말하는 민생 국가의 모습은 우리 진보정치를 향한 물음이기도 하다. 진정 민생이 목적이고 정치가 수단인지, 아니면 권력욕과 정쟁만 남고 민생이 사라져 주객이 전도된 것인지를 묻는 것이다.

<정도전>의 두 번째 메시지는 시청자를 향한다. 마지막회 마지막 장면에서 정도전(조재현 분)은 시청자에게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극 중 군사들에게 말하는 장면이지만 시선이 카메라를 응시한다는 점이 이례적이다. 보통 극에서 연기자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경우는 드물다. 병사들에게 연설하는 장면임과 동시에 시청자에게 직접적으로 대사를 건네고자 하는 의도가 담긴 것으로 보인다.

<정도전>의 마지막 장면은 정도전의 연설로 채워졌다. 병사들에게 하는 연설이지만 사실상 시청자에게 전달하는 직접적 메시지인 셈이다. 정도전(조재현 분)이 카메라를 응시하는 점이 특징이다.
▲ <정도전> 마지막회 마지막 장면 <정도전>의 마지막 장면은 정도전의 연설로 채워졌다. 병사들에게 하는 연설이지만 사실상 시청자에게 전달하는 직접적 메시지인 셈이다. 정도전(조재현 분)이 카메라를 응시하는 점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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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의 백성들이여. 이제 다시 꿈을 꾸자. 민본의 이상을 실현하고 백성 모두가 군자가 되어 사는 대도의 세상을 만들자. 그대들에게 명하노라. 두려움을 떨쳐라. 냉소와 절망. 나태한 무기력을 혁파하고 저마다 가슴에 불가능한 꿈을 품어라. 그것이 바로 그대들의 대업. 진정한 대업이다."

정도전(조재현 분)은 불가능하더라도 각자의 '대업'을 품으라고 말한다. 정치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더라도 좌절하지 말고, 사회를 등한시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참여하라는 의미가 아닐까. 궁극적으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현실에 부딪히기를 마다하지 않는 정도전의 삶. 21세기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가 600년전 그에게 배워야할 점이다.



태그:#정도전, #KBS, #정통사극, #고증, #조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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