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1TV 대하드라마 <정도전> 방송화면

KBS 1TV 대하드라마 <정도전> 방송화면 ⓒ KBS


한 사내가 불가능한 꿈을 가슴에 품었다. 그리고 그 꿈을 조선이라는 새 나라의 모습으로 현실화한 정도전(조재현 분)이 대업의 마지막 발걸음을 끝내 딛지 못한 채 이방원(안재모 분)의 칼에 최후를 맞았다.

차라리 밥버러지로 사는 편이 나았을 지도 모른다. '민본'의 나라, 재상 정치의 나라를 이룩한다는 이상을 제외하고 정도전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렸다. 친구도, 동료도, 스승도, 나라도, 심지어는 자기 자신까지도. 대업을 위해 괴물을 자처한 정도전 개인의 인생은, KBS 1TV 대하드라마 <정도전> 속에서 인간미 없는 '대업 기계'로 묘사된 것처럼 엉망이었을 것이 자명하다.

그는 왜 그렇게도 조급하게 굴었을까. 너무나도 거대했던 그의 이상을 담기에 인간의 육신이란 너무 작은 그릇이었을 것이다. 이성계(유동근 분)의 건강이 악화되며 정국이 불안해질 우려가 있는 상황에서도 정도전은 "대업의 끝"이라며 요동정벌을 강행하려 했다. 우선 사직의 안정을 도모하자는 남은(임대호 분)에게, 정도전은 "자네 앞에 있는 이 사람이 백 년을 살 것 같은가. 다음은 없네.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세"라고 잘라 말한다.

그러나 정도전의 대업은 그 조급함 탓에 점차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정도전의 육신이 약해질수록, 그는 손에 쥔 칼을 더욱 세게 고쳐 잡은 채 자신의 대업을 방해하는 이들을 사정없이 베어냈다. 희대의 간신 이인임(박영규 분)을 능가하는 잔혹함에 정도전의 지지자들도 혀를 내둘렀다. 군사 훈련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오랜 시간 자신의 우방이었던 이지란(선동혁 분)과 남은까지 문책한 정도전이었다.

 KBS 1TV 대하드라마 <정도전> 방송화면

KBS 1TV 대하드라마 <정도전> 방송화면 ⓒ KBS


갑자기 악화된 지병 탓에 자리를 보전하고 누운 이성계의 머리맡에서 정도전은 "우리의 대업은 끝나지 않았다"며 자기암시를 하듯 읊조리지만, 그는 이미 자신의 한계를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스스로의 영혼과 대업을 맞바꾼 정도전이었다. 정도전 자신과도 같은 대업을 남의 손에 맡길 수는 없었다.

정도전은 온갖 오물과 정적들의 피를 몸에 칠갑한 채로 타인들에게 티 없이 깨끗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모든 더러움을 정도전이라는 한 인간의 몸뚱이 안에 밀어 넣고 대업이 이룩된 새 시대로 환생하고 싶었다. 그렇게 맞이할 새로운 시대에는 누군가가 더러움을 품을 필요가 없기를 바랐다. 이는 아무도 알아줄 리 없는 그만의 삐뚤어진 배려였던 것이다.

그래서 <불씨잡변>의 발문을 핑계로 자신과 절연하겠다던 조준(전현 분)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던 정도전이 못내 안쓰럽다. 끝끝내 혼자 짊어지려 했던 악(惡)이었지만, 누군가의 조력이 필요함을 인정해야만 하는 순간이 왔을 때 정도전은 얼마나 힘에 부쳤을까. 칼의 힘을 믿는 이방원을 왕위 세습에서 배제시킨 그가, 죽기 전 강대한 조선을 보고 말겠다는 일념 하에 전쟁을 주장할 때는 얼마나 필사적이었을까. 그러나 자신이 꿈꿨던 그 어마어마한 혁명이 죽기 전에 완성된다든가, 자신만 악당으로 남으면 해결될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은 어찌 됐든 정도전의 판단 착오였음이 분명하다.

이방원 향한 정도전의 마지막 가르침..."임금은 백성 위한 도구"

 KBS 1TV 대하드라마 <정도전> 방송화면

KBS 1TV 대하드라마 <정도전> 방송화면 ⓒ KBS


이런 상황 속에서 대업 생각만으로도 바빴던 정도전이 방심한 사이, 그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해 온 이방원은 몰래 칼을 갈고 있었다. '이겼다고 생각했을 때가 가장 위기다'. 정도전을 숙부로 부르던 시절, 그에게 배운 그대로다.

그리고 이방원은 마치 '카노사의 굴욕'을 당한 하인리히 4세처럼 정도전 앞에 무릎을 꿇는다. 정도전으로부터 "소자 이방원, 다시는 권좌에 뜻을 두지 아니하고 동북면으로 낙향하여 여생을 마치겠사옵니다"라고 말한 뒤 앵무새처럼 그대로 읊을 것을 강요당하는 치욕까지 겪었다. 이때 이방원을 차마 죽이지 못해 속이 빤히 보이는 거짓 다짐을 받아낸 정도전의 모습은 이방원의 아버지 이성계보다도 훨씬 아버지다웠다.

결국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댄 이방원에게 정도전은 "대업의 제물이 되어 명예롭게 죽을 수 있는 순간이 눈앞에 왔었다. 헌데 내가 망쳐버렸다. 너를 죽였어야 했다"라고 말한다. 죽음을 목전에 둔 정도전의 화살은, 이방원이 아닌 스스로를 향하고 있었다. 그는 괴물처럼 살아왔으면서도 진짜 괴물이 되지는 못했던 자신을, 이방원을 죽이지 못했던 자신을 책망한 것이다.

그리고 정도전은, 자신에게 칼을 겨눈 채로 "그대를 진심으로 존경했고 아바마마 이상으로 믿고 따랐었다"고 말하는 이방원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선사한다.

"자존심 때문이 아니다. 재상정치 없이는 민본의 대업이 불가능하다. 임금은 이씨가 물려받았지만 재상은 능력만 있다면 성씨에 구애받지 않는다. 이 나라의 성씨를 모두 합쳐서 뭐라고 하는지 아느냐. 백성이다. 왕은 하늘이 내리지만 재상은 백성이 낸다. 그래서 재상이 다스리는 나라는 왕이 다스리는 나라보다 백성에게 더 가깝고 더 이롭고 더 안전한 것이다.(...)임금이란 백성을 위해 존재하는 도구다. 이제 내가 너의 신하가 될 수 없는 이유를 알겠느냐."

이방원이 정도전의 마지막 말에 수긍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방원의 행동을 틀렸다고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대업을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길 수 없었던 정도전도, 그런 정도전의 위세 아래 힘없는 왕자로 살 수만은 없었던 이방원도 나름의 생존 본능에 따라 발버둥치고 있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KBS 1TV 대하드라마 <정도전> 방송화면

KBS 1TV 대하드라마 <정도전> 방송화면 ⓒ KBS


정도전은 자신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비틀어 간신의 상징으로 만들겠다고 엄포를 놓는 이방원에게 "기억하거라. 이 땅에 백성이 살아있는 한 민본의 대업은 계속될 것이다"라고 말하며 숨을 거둔다. 그리고 그 순간, 정도전의 40년 지기이자 영원한 맞수였던 정몽주(임호 분)가 저승에서 그를 마중 나왔다. 평생을 누구 앞에서건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전달하던 정도전이 정몽주 앞에서 떼를 쓰듯 눈물을 흘린다.

포은은 "나는 정말이지 최선을 다 했다"고 말하는 삼봉의 손을 가만히 맞잡으며 "이제 됐네. 자넨 할 만큼 했어"라고 위로의 말을 건넨다. 어린아이처럼 정몽주에게 매달려 눈물을 쏟아내던 정도전의 마지막 모습은, 모두가 괴물이라 부르던 그에게 가장 따뜻한 변명과도 같았다.

"불가능한 꿈을 품어라...그것이 진정한 대업이다"

하지만 정도전은 극 중에서 영원히 고통 받는다. 그는 사극 역사상 가장 고독한 주인공임과 동시에, 가장 비참한 최후를 맞는 주인공이기도 하다. 야산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정도전의 시신은 이방원에게 그가 가장 두렵고도 대단한 존재였음을 반증하는 대목이다. 진창에 발을 담근 채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킨 탓에, 정도전은 그가 만든 조선에서 영혼조차 편히 쉬지 못했다.

그러나 <정도전>은 주인공의 유례없는 비참한 죽음만을 그리며 현실을 냉소하도록 만드는 것을 단호히 거부한다. 제작진이 '역대급 엔딩'이라 자부할 만했다. 조선시대의 정도전이 그 어떠한 은유도 없이 2014년의 우리에게 '돌직구'를 날린다. 조선의 하늘을 연 것은 백만 대군의 창검이 아니라,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이 가능하다는 희망, 꿈이었다고.

 KBS 1TV 대하드라마 <정도전> 방송화면

KBS 1TV 대하드라마 <정도전> 방송화면 ⓒ KBS


"나 정도전, 그대들에게 명하노라. 두려움을 떨쳐라. 냉소와 절망, 나태한 무기력을 혁파하고 저마다 가슴에 불가능한 꿈을 품어라. 그것이 바로 그대들의 대업, 진정한 대업이다."

정도전의 대업, 과연 어디까지가 이상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이었을까. 그 경계를 함부로 재단할 수는 없지만, 정도전이 이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누구보다도 치열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살아서 6년, 죽어서 600년을 조선과 함께 했던 정도전이 6개월간의 부활을 끝내고 다시 역사 속으로 돌아갔다. 아아, 정도전은 갔지만 아직 그를 보낼 수 없다. 이 지독한 여운을 달래기 위해 우리도 가슴 속에 불가능한 꿈을 꾸자. 당장 내일이면 그 꿈을 잊고 현실과 마주하더라도, 몽상을 현실로 만들 수 있음을 증명해낸 정도전의 당부처럼 불가능한 꿈을 꾸어 보자.

정도전 이방원 이성계 하륜 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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