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구름위를 날고 있는 비행기. 현실과 이상의 중간지대를 날고 있었다.
 구름위를 날고 있는 비행기. 현실과 이상의 중간지대를 날고 있었다.
ⓒ 송성영

관련사진보기


5개월의 인도-네팔 여행기간 중에 최소 사나흘 정도는 인도 여행 경험자를 따라 나설 작정이었는데 처음 만난 사람들 모두 첫 여행길이라니 난감했다. 일단 비행기를 탈수 있는데 까지 왔다. 그것만 해도 어디인가. 그래도 이들의 영어 실력은 나보다 낫겠지 싶어 한결 든든했다.

20여분 앞당겨 출발한다던 에어 인디아는 제 시간에 하늘을 날았다. 좌석표에 따라 카카오톡(이하 카톡) 친구들과 저 만치 따로 앉았다. 내 좌석 주변에는 불교 성지 순례객들이 우르르 앉았는데, 옆자리는 60대 초반의 부부였다.

어찌 하다가 근대 한국 선불교를 중흥시켰던 경허스님 얘기가 나왔다. 지난해 가을 <오마이뉴스>에 경허스님에 관한 기사를 썼기에 어느 정도 경허스님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 높은 산사에서 세상을 내려다 보지 않고 낮은 저잣거리 민초들과 더불어 계율에 걸림 없는 삶을 살다간 경허스님 덕분에 그 노부부와 쉽게 친분을 쌓았다.

중간 기착지인 홍콩에 도착한 비행기 안은 마치 시장 바닥 같다. 일부 승객들이 내리자 곧바로 승무원들이 기내 물품에 일일이 꼬리표를 매달고 사람의 몸에도 번호표를 붙여 준다.

밖으로 나갈 수 없었기에 기내 안에서 아마 한 시간 정도 대기하고 있었나 싶다. 그 사이 홍콩에서 새로운 승객들이 탑승했다. 하지만 비수기라 그런지 마지막 칸은 반도 채 차지 않았다. 불교 성지 순례팀의 안내자 말로는 성수기인 11월에서 2월 인도행 비행기는 빈 틈 없이 자리가 꽉 찬다고 한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늘 꿈을 꾸고 있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타고 움직인다. 큰 날개에 붙어 있는 깃털처럼 생긴 아주 작은 금속 날개가 슬며시 움직인다. 홍콩에서 비행기 안내원도 바뀌었다. 무표정의 안내원들은 수신호로 비상시 대피 요령을 알려 준다. 하지만 그 기계적인 동작과 무표정이 "비행기 사고 나면 이런 요령 필요 없으니 다들 알아서 생존 하슈"라고 말하는 듯하다.

비행기 창밖으로 흰구름이 깔려 있다. 꿈속 같은 풍경들, 날개에 일부가 가려 아쉽긴 했지만 구름 깔린 창밖 풍경이 숨 막히게 다가왔다. 비로소 하늘을 난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피터팬이나 손오공처럼 구름 위를 날고 있다. 솜털처럼 부드럽게 깔린 구름 위로 기차게 난다. 비행기는 현실과 이상의 중간층을 날고 있다. 나는 그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늘 꿈을 꾸었다.

깃털이 무거우면 날 수가 없다. 최소한의 것으로 생활하는 소박한 삶. 자본의 노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그 소박한 삶이야말로 나를 바꾸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첫걸음이라 믿어왔다. 그 생활 속에서 부조리한 세상에 큰 걸림없이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었다.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바탕으로 그 삶의 방식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자유로운 삶을 향한 날개를 달고 싶었다.

티격태격 아이들 엄마와 그 길을 함께 걸으며 나름 행복을 찾아나갔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분명 힘든 여정이었다. 결혼생활 18년째 접어들 무렵, 그 길을 함께 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남들처럼 물질적으로 누리고 싶은 것을 누리며 자신만의 길을 자유롭게 걸어가고 싶어 했다. 나는 소박한 일상이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는데 가벼운 깃털이 될 것이라 여겼지만,  그녀에겐 그 삶의 방식이 해가 거듭 될수록 오히려 무거운 짐이었다.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할까? 답이 보이지 않았다. 1년이 넘는 갈등과 심한 다툼 끝에 나는 결국 그녀가 원하는 대로 집을 나왔다. 집을 나서는 순간, 농사짓고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며 글 쓰는 일 등, 내가 그동안 누렸던 모든 걸 버려야 했다.

입바른 소리만 하다가 쫓겨난 고집불통 유배자처럼 산중에 처박혀 수없이 되물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작은 연못에도 우주가 있듯 모든 해법이 내 안에 있다고 믿었기에 나는 결혼 이후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모든 것을 찾으려 했다.

몇몇 주변 사람들은 그녀가 원하는 대로 이혼하면 모든 게 해결된다고 했지만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그 아픔을 떠안겨 줄 수는 없었다. 내 삶을 바꾸더라도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깨뜨릴 수는 없었다.

10여 년 동안 그녀가 내 삶의 방식대로 살았으니, 이제 그녀의 삶에 내가 맞춰 살겠노라 타협을 했다. 하지만 집을 나서기 전 다툼 끝에 서로가 내뱉은 험한 말에 상처 입은 그녀는 내 고집스런 생활 방식이 하루아침에 바뀔 거라 믿지 않았다. 나와 한 지붕 밑에서 살기를 원치 않았다.

진퇴양난이었다. 대체 내 삶에서 뭐가 문제일까. 나는 저만 바르고 옳다고 핏대 세우다가 몰락한 얼치기 진보주의자와 다름없었다. 이제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할까? 은산철벽의 화두처럼 앞이 보이지 않았다. 가진 걸 털어 인도 행을 결심한 것도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기위함인지도 모른다.

기내에서 받은 영어론 된 문서, 너무 낯설다

산생활을 하면서 펄펄 끓는 가마솥에 데인 손등. 옆자리에 앉은 한의사가 사혈을 하고 침을 놔 주었다.
 산생활을 하면서 펄펄 끓는 가마솥에 데인 손등. 옆자리에 앉은 한의사가 사혈을 하고 침을 놔 주었다.
ⓒ 송성영

관련사진보기


나는 태연한척 의자 등받이에 허리를 깊이 파묻고 있지만 출국 전 펄펄 끓는 가마솥 물에 덴 손등의 화상처럼 몸과 마음은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내 옆자리에 앉은 사람은 한의사였다. 화상 입은 내 손등을 보더니 침구를 꺼냈다.

"아이구 이렇도록 아무 조치도 안 했슈? 먼저 화기부터 뽑아내야겠슈."

화기를 빼내기 위해 사혈을 하고 여기 저기 따끔한 침을 놓는다. 그 맘씨 좋은 한의사 아저씨 말에, 나는 화기를 뽑아낼 곳이 어디 손등뿐이겠는가 싶었다. 정작 뽑아내야 할 것은 지난 1년 동안 아이들 엄마와 심한 갈등으로 생긴 내 안의 '화'였다.

충남 청양에서 3대째 한의원을 대물림 하고 있다는 한의사 아저씨와 '인류가 만든 가장 큰 욕망의 덩어리는 핵발전소'라는 것에 동감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기내에서 용지를 나눠 준다. 인도 입국 관련 간단한 설문지다. 온통 영어로 된 문서가 낯설다. 문서를 받아든 순간 '플라이트(비행)'라는 그 쉬운 단어조차 해석이 되질 않았다.

인도 행을 결심 할 무렵 큰 아들 송인효 녀석이 스마트폰에 번역기를 다운 받아 주었다. 하지만 비행기 탑승과 동시에 정지됐으니 번역기는 쓸 수 없다. 설문지는 정확한 답을 요구했지만 나는 대충 적었다. 입국 심사대에서 지적당하면 다시 쓰면 될 일이다.

드디어 인도 시각으로 자정을 넘긴 시간. 델리, 마하트마 간디 공항에 도착했다. 입국심사대에서 결국 설문지를 다시 작성했다. 진땀을 뻘뻘 흘리며 두 차례에 걸쳐 퇴짜를 맞았다. 마치 영어시험 받아쓰기에 나머지 공부하는 꼴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일이든 닥치면 해결되기 마련이다.

입국심사장에서 빼져 나와 나보다 영어 실력이 월등할 수밖에 없는 젊은 카톡 친구들을 다시 만났다. 그들이나 나나 공항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에 델리 숙소로 찾아갈 계획이었다. 카톡 친구들과 함께 공항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나눠 먹을 요량으로 기내에서 나눠주는 빵 몇 개를 '꼬불쳐' 놓기까지 했다.

인도 델리 공항
 인도 델리 공항
ⓒ 송성영

관련사진보기


공항에서 밤을 보내기로 한 것은 이런저런 인도 여행안내서와 인도 여행자들 사이에 떠도는 좋지 않은 소문 때문이었다. 배낭 여행자들의 숙소가 몰려 있는 델리 빠하르간지를 늦은 밤에 찾아가면 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사람들 행렬을 따라 공항 밖으로 나왔다. 인도에 첫 발을 딛는 순간부터 인도여행 안내서에서 벗어난 셈이다. 공항 밖에서는 수많은 인도 사람이 큰 눈을 굴리며 길 안내자가 돼주겠다고 손을 내밀었다. 그냥 공항 대합실에 쪼그려 자빠져 잘 것을 대체 어쩌겠다고 빠져 나왔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후회할 겨를도 없이 앞만 보고 공항 밖으로 걸어 나왔다. 세 명의 카톡 친구 역시 내 뒤를 따라 나섰다.

나는 그 겁 없는 세 여자들에게 내 뒤에 바싹 붙어 오라며 인도인들의 눈을 피해 앞만 보고 걸었다. 방패막이처럼 앞장선 내게 끈질기게 접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마 인도여행에 익숙한 여행자, 혹은 현지인처럼 생긴 내 겉모습 때문이기도 했으리라.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나는 공항 입구 길 건너 택시 승차권 판매소로 당당하게 다가갔다. 인도다람살라에서 오랫동안 생활했던 티벳 승려이기도 한 막내 동생, 중연스님(티벳명 텐지 랍뗀스님)에게서 귀동냥한 영어로 말했다.

"트레인 스테이션, 빠하르간지 바자르 사이트!"

사실 '사이트'는 운전기사에게 해야 했을 말이었다. 그만큼 긴장하고 있었다. 뉴델리 역까지 4백 루피. 다행히 말이 통하는 인천공항에서 환전해온 루피라는 지폐를 난생처음 사용했다.

인도 관련 온갖 악 소문들이 떠오른 이유

나는 초짜로 보이지 않기 위해 무덤덤하게 여자 셋과 함께 혼란스럽게 대기하고 있는 인도 택시, 오토 릭샤를 잡아타고 다시 한 번 "빠하르간지 바자르 사이트!"를 두 차례나 반복해서 말했다. 중연스님이 잘못하면 운전기사가 여행자 숙소 쪽이 아닌 뉴델리 역 반대편에 내려줄 수도 있으니 '사이트'를 강조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운전기사는 "오케이, 노 프라블럼"을 되풀이했다.

택시가 출발한다. 두 눈에 잔뜩 힘이 들어간 인상이 그리 좋지 않아 보이는 운전기사는 출발하면서 "인도 택시는 아주 빠르다, 걱정하지 마라"라고 일러준다. 오토릭샤가 급회전을 해가며 시내 중심지로 접어들었다. 수많은 자동차들 사이를 곡예하 듯 빠져 나간다. 여기저기서 빵빵거리는 소리, 몇 센티미터 사이로 아슬아슬 빠져 나가는 차량들... 하지만 총알택시의 곡예운전은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또다시 인도에 관련 온갖 악소문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늦은 밤에 택시를 잘못 타면 기사가 목적지와는 전혀 다른 곳에 내려 주거나, 자신의 패거리들이 있는 으슥한 곳으로 데리고 가 송두리째 털어간다는... 앞자리에 앉아 있던 나는 검은 피부에 번들거리는 운전기사의 눈빛을 훔쳐보다가 비로소 나 혼자가 아님을 깨달았다.

외국인 배낭 여행각 숙소가 몰려 있는 인도 빠하르간지 밤거리
 외국인 배낭 여행각 숙소가 몰려 있는 인도 빠하르간지 밤거리
ⓒ 송성영

관련사진보기


비상 상황이 발생하면 '썩어도 준치'라고, 특수부대 출신인 나 혼자 몸은 어떻게 위기를 모면할 수 있겠지만 아, 저 뒤의 '혹'들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곡예 운전에 잔뜩 겁에 질린 저 세 명의 여자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내가 책임져야만 했다.

공항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나올 것이지 어쩌자고 낯설고 낯선, 그것도 모두가 초행길인 험악하기 이를 데 없다는 자정이 훨씬 넘은 인도 밤길을 나섰단 말인가. 비로소 후회가 몰려왔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인도 여행 경험자를 따라가면 되겠지' 하는 막연한 심정으로 시작한 인도행.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다. 누군가의 혹이 되고 싶었는데 인도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오히려 내가 인도여행 초보자들, 그것도 여자 셋을 혹처럼 달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이츠대전인터넷 방송 블로그에도 올립니다.



태그:#인도행 비행기, #소박한 삶, #델리 공항, #곡예운전
댓글9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