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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년 만에 드러난 민간인 희생자 유해. 두개골 파편(가운데)과 정강이뼈(오른쪽)로 추정된다.
 64년 만에 드러난 민간인 희생자 유해. 두개골 파편(가운데)과 정강이뼈(오른쪽)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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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를 수습하고 있는 유가족들
 유해를 수습하고 있는 유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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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잠깐...! 멈춰요!"

굴삭기를 이용 흙을 파내기 시작한 지 15분 쯤 흘렀을 때였다. 현장을 지켜보던 노용석 부산외국어대 교수(중남미지역원 HK연구교수, 전 진실화해위원회 유해발굴팀장)가 손을 높이 들며 '중지'를 외쳤다.

노 교수가 가리킨 흙바닥에는 희생된 사람들로 추정되는 정강이뼈와 요추뼈, 두개골 등 사람의 뼈가 박혀 있었다. 이어 흰 고무신 조각 등 희생자의 유품들이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을 암매장할 때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녹슨 괭이도 발견됐다. 64년 만에 땅 속에 묻혀 있던 국가범죄의 물증이 파헤쳐진 것이다.

'청주 청원 보도연맹유족회'는 23일 오전 11시 충북 보은군 내북면 아곡리에 있는 민간인 희생자들이 묻혀있는 곳으로 추정되는 암매장지를 시굴했다.

청주 청원 보도연맹유족회 소속 유가족들이 유해발굴을 요구하고 있다.
 청주 청원 보도연맹유족회 소속 유가족들이 유해발굴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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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희생자 시신을 직접 매장했다고 밝힌 마을 주민인 신덕호씨(86, 당시 22살)
 당시 희생자 시신을 직접 매장했다고 밝힌 마을 주민인 신덕호씨(86, 당시 22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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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25 전쟁발발 직후 청주경찰서는 상급기관의 지시에 따라 청주 청원지역 보도연맹원들을 소집했다. 보도연맹원들은 청주경찰서(무덕관)와 청주형무소, 국민보도연맹 충북도지부사무실 등에 감금됐다. 며칠 후 청원군 남일면 쌍수리, 고은리 분터골, 가덕면 피반령, 내북면 아곡리 등에서 각각 총살됐다. 이날 시굴한 아곡리 야산 3곳의 암매장지에는 최소 수 십명에서 많게는 150여 명이 묻혀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날 유해시굴현장에는 유가족 등 50여 명이 참석했다. 하지만 유족들은 발굴된 유해를 다시 흙속에 되묻었다.

이에 대해 노 교수는 "오늘은 유해의 존재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시굴작업이었다"며 "고고학적 방법으로 제대로 유해발굴을 하려면 최소 수 개월이 소요된다"고 말했다. 박만순 충북역사문화연대 대표는 "유해발굴은 유족회의 일이 아닌 정부와 지방자치가 해야 할 일"이라며 "오늘 이 자리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무관심과 직무유기를 재차 확인하고 꾸짖기 위해 마련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청주 청원 보도연맹유족회장도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유해발굴을 외면하고 있어 유해가 실제로 묻혀 있는지를 확인한 것"이라며 "유해가 드러난 만큼 충북도와 통합 청주시가 나서 유해발굴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만순 충북역사문화연대 대표(왼쪽)와  청주 청원 보도연맹유족회장이 드러난 유해를 들여다 보며 한숨을 쉬고 있다.
 박만순 충북역사문화연대 대표(왼쪽)와 청주 청원 보도연맹유족회장이 드러난 유해를 들여다 보며 한숨을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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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 정부 조직인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지난 2008년 "전시였지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하는 국가가 수감된 재소자들과 좌익전력이 있거나 인민군에 동조할 것이 우려된다는 이유만으로 적법한 절차 없이 사살한 것은 명백한 불법행위"라며 "이에 대한 책임은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국가에 귀속된다"고 밝혔다.

이어 국가와 지방자치에 대해 ▲유족에게 사과할 것 ▲위령사업 지원 ▲전쟁이나 비상사태시 민간인 보호조치 등에 관한 규정 정비 ▲평화인권교육을 강화 등을 권고한 바 있다.

당시 희생자 시신을 직접 매장했다고 밝힌 마을 주민인 신덕호(86, 당시 22살)씨는 "군인과 경찰들이 도라꾸(트럭) 2~3대에 흰옷입은 사람들을 실어온 후 암매장지 인근에서 총을 쏴 죽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어 "군인들이 '마을 청년들에게 빨갱이를 잡아 놨으니 파묻으라'고 하고 모두 가버렸다"며 "현장에 가보니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널브러져 있었다"고 말했다.

청주 청원 보도연맹유족회는 우선 조만간 통합 청주시장을 면담하고 유해수습을 다시 한 번 요청할 예정이다.

한 유족은 "진실화해위원회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는 위령사업에 대한 지원과 유해발굴사업을 중단했다"며 "자치단체마저 유해수습에 응하지 않을 경우 항의시위를 벌이는 등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당신 비 맞으면 안 된다'면서  비맞고 떠난 남편은?
청주상고 교사였던 강해규씨의 묘
아곡리 마을 앞산에 묻힌 희생자 고 강해규씨의 묘비
 아곡리 마을 앞산에 묻힌 희생자 고 강해규씨의 묘비
ⓒ <충청리뷰> 권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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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주민들은 군인들이 총살한 희생자들의 시신을 수습했다. 아곡리에서만 3곳에 나눠 매장했다. 인근 야산에 살짝 구덩이를 파고 묻는 정도였다. 이후 희생된 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하러 왔지만 부패가 심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이중 유일하게 시신을 찾아 수습한 가족이 있다. 아곡초(폐교) 맞은 편 야산중턱에 있는 묘로 희생자는 강해규씨(당시 30세)다.

<충청리뷰> 보도에 따르면 숨진 강씨는 사망당일 청주경찰서 앞에서 부인과 만났다.

강씨의 부인(이숙용씨)은 당시 청주상고 교사였던 남편이 전날 밤 학교에 숙직하러간 후 돌아오지 않자 걱정하다 경찰에 붙잡혀 간 사실을 전해 들었다.

빵을 사가지고 청주경찰서로 달려가자 군용트럭에 남편이 다른 보도연맹원들과 함께 힘없이 앉아 있었다. 군인들은 보도연맹원들을 남쪽으로 피난시켜준다고 속였다.

부인은 남편과의 마지막 이별의 순간을 <충청리뷰>를 통해 이렇게 밝혔다.

"가까스로 남편을 찾았는데 남편이 '왜 이제서야 오느냐'고 물었어요. 미안한 마음에 빵하고 쓰고 있던 우산을 건네줬더니 '당신 비 맞으면 안 된다'면서 그냥 비를 맞구 떠났는데..."

4~5일 후 두 사람은 아곡리에서 재회했다. 이승과 저승의 사람으로. 부인은 남편의 시신을 수습해 인근에 묻은 후 지난 1990년에서야 비석을 세웠다.  '晉州姜公海圭之墓(진주강공해규지묘)'



태그:#유족회, #보은군 아곡리, #유해시굴, #유해발굴, #청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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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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