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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개의 오름 사이로 이채로운 잣담과 거대한 바람개비가 너른 평원 위를 굽이치는 '쫄븐 갑마장길'
 두 개의 오름 사이로 이채로운 잣담과 거대한 바람개비가 너른 평원 위를 굽이치는 '쫄븐 갑마장길'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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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말에 담긴 뜻과는 상관없이 왠지 서정적으로 들리는 제주도 중산간 지역의 동네 가시리(加時里)에 걷기 좋은 길이 나있다.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의 '갑마장길'이 그것. 자그마치 20km에 달하는 올레길 코스다. 긴 갑마장길이 부담되는 사람들을 위해 친절하게도 '쫄븐 갑마장길'도 있다. '쫄븐'은 '짧은'의 재미있는 제주 사투리다.

'갑마장'(甲馬場)'이란 길 이름도 특이하다. 사람이건 짐승이건, 무리 가운데 특출난 놈이 나오기 마련이다. 갑마는 바로 그런 말을 뜻한다. 무리 중에서 가장 튼튼하고 잘 달리는 녀석들을 일컫는다.

옛 조선의 조정에선 갑마들만 따로 모아 관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게 바로 한라산 고산지대와 해안지대를 잇는 광활한 대평원을 품은 가시리 일대에 조성됐던 갑마장이다. 말테우리(말떼를 돌보는 목동)들이 말을 키워 임금에게 진상했고, 그 말들이 다니던 길이 바로 갑마장길이다. 이에 조정에서는 감목관(監牧官)이라는 벼슬을 내려 세습직으로 하였다고 한다.

지난 5월 초순 기자가 걸어본 '쫄븐 갑마장길'은 갑마장길의 반 정도인 약 10km의 거리로, 말들이 뛰어놀던 초원의 목장지대, 제주에서도 보기 드문 돌담인 잣성(잣담)길, 사슴이 살던 '큰사슴이 오름', 누구나 반하게 하는 아름다운 오름 '따라비 오름' 등 제주 동부 중산간지대의 매력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한라산의 무릎 혹은 허벅지 높이쯤 될까, 내려오는 한라산의 능선과 올라오는 들판이 만나는 자리. 그래서 산도, 들도 아닌 곳을 제주에서는 '중산간'이라고 부른다.

꽃과 나비가 날아다니는 큰사슴이 오름

 큰사슴이 오름 중턱에서 잠시 쉬어가다 보이는 주변 풍광.
 큰사슴이 오름 중턱에서 잠시 쉬어가다 보이는 주변 풍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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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고사리 같은 아기손이 떠오르는 통통한 제주 고사리를 캐는 재미에 빠져 오름에 오르는 걸 깜박했다.
 정말 고사리 같은 아기손이 떠오르는 통통한 제주 고사리를 캐는 재미에 빠져 오름에 오르는 걸 깜박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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쫄븐 갑마장길의 들머리로 잡은 큰 사슴이 오름으로 향하는 도로 주변 풍경이 참 예쁘다. 온갖 차량들이 매연을 뿜어대며 지나가는 차도는 그저 삭막한 도로일 뿐인데 제주도는 차도마저도 감흥을 일으키는 그래서 '길'이라 부르고픈 도로들이 있다. 큰사슴이 오름과 가시리 마을 가는 이 길 '녹산로'가 그랬다. 도로가 큰사슴이 오름(대록산)과 작은사슴이 오름(소록산) 사이를 지나기 때문에 사슴 '록(鹿)'자를 써서 붙인 이름이다.

도로 옆으로 이어지는 초원과 목장, 종종 나타나는 큰 키의 삼나무들이 운치를 더한다. 초봄엔 유채꽃과 벚꽃이 가을엔 억새들로 길의 아름다움을 더 한다니 다른 계절에도 꼭 와봐야겠다. 그 너머로 어깨를 견주며 정답게 솟은 오름들이 병풍처럼 자리하고 앉았다.

녹산로 길섶에 자리한 정석항공관 주차장으로 들어서면 사슴들이 살았다는 큰사슴이 오름이 눈앞에 우뚝 나타난다. 공식 명칭은 대록산이고 본디 이름은 해발 475m의 '큰사슴이 오름'이다. 그 옆 고갯길 하나를 끼고 족은(작은) 사슴이 오름이 있다. 언뜻 한 덩어리로 보이는 이 오름들을 흔히 '녹산'이라고 하여 하나의 산으로 불리기도 했다.

수풀이 풍성하여 정말 사슴이 튀어 나올 것 같은 오름을 향해 가는 길, 몇 몇 여행객들이 오름을 향해 오르지 않고 곳곳에서 땅을 내려다보며 서성거린다. 다가가 보니 고사리를 캐러 나온 제주 도민들.

정말 고사리 같은 아기의 손이 떠올려지는 오동통한 제주의 야생 고사리는 단백질과 무기질 등 영양가가 많고 풍미가 좋기로 유명하다. 볶아서 먹기도 하고 식당에 팔기도 하는데 이렇게 부지런히 캐면 몇 만원은 족히 받는단다. 제주도는 4월 초나 중순부터 고사리 순이 올라오기 시작해 5월까지 섬 전역이 그야말로 고사리 풍년을 이룬다.

오름에 오르는 것도 잊고 주민들에게 고사리 구별법을 배웠다. 처음에는 다른 풀들과 구별하기 어렵지만, 한번 눈에 띄기 시작하면 눈 돌리는 곳마다 고사리가 보일 정도로 지천에 널려 있다.

제주도는 4월 중순에서 하순경에 비가 자주 내리는데, 비 온 뒤 어린 고사리 순이 우후죽순처럼 올라오기 때문에 이 시기에 내리는 비를 '고사리 장마'라고 부르기도 한다니 재미있다. 채취한 고사리는 삶아서 햇빛에 널어 말리는데 말린 후엔 부피가 거의 1/10 수준으로 줄어들어 배낭 가득 채취해도 막상 말려놓으면 작은 봉지 하나에 다 들어갈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큰사슴이 오름 꼭대기엔 예쁜 꽃들과 나비들이 산다.
 큰사슴이 오름 꼭대기엔 예쁜 꽃들과 나비들이 산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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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을 오른 지 얼마 안 되어 눈앞의 하늘이 넓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오름의 정상을 목전에 두면 묘한 기대감에 가슴이 설렌다. 이 오름은 또 어떤 풍경으로 나를 반겨줄까. 가시리 일대의 들판에 방목한 갑마만 무려 1만 필이 넘었다더니, 정말 중산간 지대의 너른 평원이 눈 앞에 펼쳐졌다.

미끈하고 탄탄한 말들은 거의 야생의 상태로 무리 지어 중산간 벌판을 박차고 달리면서 풀을 뜯었을 것이다. 바닷가에서 보았던 커다란 풍력 발전기들이 평원위에 무리지어 서있어 풍경에 이채로움을 더했다.

오름 꼭대기에 등 없는 두 개의 작은 벤치가 나란히 있어 잠시 앉았다. 때깔 고운 꽃들이 반갑다며 손짓하고 날개에 기묘한 무늬를 새긴 나비들이 눈앞에 어지러이 날아다녔다. 중산간 들녘의 오름 위에서 마주하는 건 바로 '고요의 풍경'이다. 오름 위로 날아다니는 나비들의 날개 짓 소리가 들릴 것 같은 그런 고요함이다. 여행을 하다가 아주 가끔, 오래 잊히지 않는 장면을 만날 때가 있는데, 제주는 이렇게 별달리 힘들지 않게 그런 장면을 만나게 되니 육지에서 온 여행자는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처음 우리나라의 보물섬 제주를 찾는 사람들은 탄성이 절로 나오는 아름다운 바닷가에 반한다. 그러다가 몇 번 더 제주섬을 찾게 되면서 상상도 하지 못했던 아름다움을 마주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오름'이다. 부드러운 오름의 능선과 그 오름에서 굽어보는 제주의 또 다른 풍광은 제주에서 만나는 아름다움의 정점이지 않을까 싶다.

만만한 동네 뒷산 같은 능선에 올라가 봐야 별 거 있겠냐고 여기기 쉽지만 올라가 보면 밑에서 보던 것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제주엔 이런 오름이 300개가 넘는다. 덕분에 매년 제주 여행을 가도 지겹기는커녕 늘 새로운 마음으로 떠날 수 있다.

1만여 필의 말을 기르던 목축의 자취, 잣성

 목장의 경계이자 말들이 못나가게 할 용도로 쌓아놓은 잣성을 따라 이어지는 길.
 목장의 경계이자 말들이 못나가게 할 용도로 쌓아놓은 잣성을 따라 이어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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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잣성길 평원에서 마주쳤던 맹랑하고 귀여운 노루.
 잣성길 평원에서 마주쳤던 맹랑하고 귀여운 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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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사슴이 오름에서 내려와 꼭대기에서 굽어보았던 너른 평원을 지나 삼나무가 길게 두른 잣성길로 갔다. 그 옛날 녹산장이라는 이름의 유명한 목장이 있었던 이 벌판엔 지금은 거대한 바람개비들이 커다랗게 원을 그리며 돌고 있었다. 멀리서 볼 땐 제법 운치 있게 보이더니 가까이 다가서니까 그 거대한 크기가 괴물같이 느껴졌다. 풍차를 향해 장창을 들고 돌진했던 라 만차의 기사 돈키호테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중산간 오름 지대의 풍력 발전기들이 한편으론 주변 풍경과 어울리지 않게 이질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환경오염을 일으키는 화력 발전소나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의 위험이 도사린 원자력 혹은 핵발전소를 떠올리면 인간에게 에너지(전기)를 만들어 내는 바람개비와 제주의 바람이 믿음직스럽고 고맙기만 하다.

발길을 잠시 멈추고 서서 물통을 꺼내 물을 마시고 무심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가까이에서 나를 훔쳐보고 있던 노루와 눈이 마주쳤다. 개체수가 늘어나면서 본의 아니게 유해동물로 인간에게 미운털이 박힌 제주의 노루들. 보통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쏜살같이 도망가는데 코 잔등이에 점이 난 이 예쁜 암컷 노루는 얌전히 땅에 앉아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여행자를 쳐다만 본다.

사진기를 꺼내 찍을 때까지도 이방인을 지긋이 응시하는 맹랑하고 귀여운 노루와의 짧고도 긴 만남의 시간…. 아무런 경계가 없는 공간에서 야생의 생명과 마주 보고 서 있는 기분은 무척 두근거리는 경험이었다. 가시리 쫄븐 갑마장길을 떠올릴 때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 장면일 것 같다.

'잣성'에 대한 설명이 써있는 안내판과 함께 옛날 제주의 목장과 목장의 경계를 구분 짓고, 말들을 가둬두기 위해 세운 현무암 돌담이 나타났다. '간장'(사이 間, 담 牆)이라고도 불리는 가시리 갑마장 길의 잣성은 6km에 걸쳐 남아있는 제주 최대의 잣담이다. 쫄븐 갑마장길의 절반이 오름을 오르내리는 길이라면, 나머지 절반은 2킬로 남짓한 이 잣성을 따라 걷는 길이다. '잣'은 제주어로 '널따랗게 돌들로 쌓아 올린 기다란 담'이란 뜻이다.

가시리에 있는 잣성은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도 아름답다. 잣담 바로 뒤로 이어진 삼나무 숲에선 상쾌한 향이 은은하게 풍겨와 걷기 더욱 좋다. 삼나무 외에 볼래낭(보리수 나무), 틀낭(산딸나무)등 재미있는 제주 이름의 나무들로 울창하다. 쭉쭉 뻗은 삼나무와 어우러진 잣성이 너른 평원을 굽이치며 따라비 오름을 향해 이어진다.

3개의 굼부리와 부드러운 능선길이 좋은 따라비 오름 

 여러 개의 봉우리와 굼부리(분화구), 부드러운 능선길이 좋은 따라비 오름.
 여러 개의 봉우리와 굼부리(분화구), 부드러운 능선길이 좋은 따라비 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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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비 오름 중턱에서 마주친 산담과 무덤을 지키는 귀여운 동자석.
 따라비 오름 중턱에서 마주친 산담과 무덤을 지키는 귀여운 동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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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의 여유는 그 능선의 부드러움에 있다.
땅에서부터 시작한 능선은
하늘을 향해 쉬엄쉬엄 가듯이 오르다가,
다시 오름의 정상에서 내려오면서
옆으로 흘러 들판으로 사라지는가 하면,
어느새 숨바꼭질 하듯이 다시 나타나
다른 오름을 만들어낸다.
- 제주시인, 현길언

빽빽한 숲과 잣담 곁을 지나다 보면 갑자기 눈앞이 훤해진다. 쫄븐 갑마장길의 두 번째 오름인 따라비 오름길이다. 구좌읍에 있는 '다랑쉬 오름'처럼 이름이 무척 생소하고 이질적이지만 흥미로움을 불러일으키는 이름이다. 따라비란 이름은 '땅할아버지'에서 나왔다고 한다. 따라비오름 주위로 모지오름과 새끼오름, 장자오름이 모여 있는 모습이 마치 한 가족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꼭대기까지 이어진 오름 산책로를 절반쯤 올랐을까, 숨이 차올라 잠시 허리를 펴고 주변을 둘러봤다. 크고 작은 오름 들과 바람개비들, 드넓은 평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육지에서 가져온 답답한 마음의 체증이 시원하게 씻겨졌다.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니 흐릿하게나마 한라산이 보인다. 따라비 오름은 이렇게 풍광도 좋지만 오름 그 자체의 아름다움이 인상에 깊게 남는 곳이다.

오르며 내리기를 거푸하는 부드러운 능선을 지닌 굼부리(분화구) 세 개가 어울려 하나의 오름이 되었다. 동행이 없는 나는 능선을 걷는 내내 마음속으로 여러 번 탄성을 쏟아내었다. 제주 설화에 나오는 제주의 거신 설문대 할망이 치마로 흙을 나르면서 한 줌씩 새어나온 게 봉긋봉긋한 오름이 되었고, 그 가운데 너무 도드라진 오름을 주먹으로 툭 쳐서 누른 게 굼부리라니 재미있다.

오름 중턱의 한 봉우리에서 '산담'과 마주쳤다. 산담은 무덤을 둘러쌓아 올린 제주의 돌담을 말한다. 산담 안에는 돌로 낮게 쌓은 제단과 함께 무덤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동자석 두 개가 서있다. 살짝 미소 짓는 동자석의 표정이 너무 천진난만해서 무덤이 친근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귀여운 동자석이 지켜서 있는 무덤을 통해 제주도 사람들의 삶도 엿볼 수 있었다.

망자는 한라산 자락에서 태어나 오름에 기대어 텃밭을 일구고, 방목을 하며 한평생 살다가 죽은 후 이렇게 오름 언저리에 묻혔을 것이다. 제주민의 삶이 얼마만큼 오름과 가까운지 잘 보여주는 무덤이었다. '제주도 사람은 오름에서 태어나 오름을 파먹고 살다가 죽어서는 오름 자체가 되는구나···' 그래서일까 장쾌하고 멋져 보이던 주변의 평원과 오름 풍경이 애틋하게 다가왔다.

야트막한 언덕배기를 천천히 오르는데 뒤쪽에서 누군가 급히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길을 양보하려고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는 순간 눈앞에 나타난 것은 꼬리가 힘차게 말려 올라간 백구 한 마리였다.

'자전거도 안 탔는데 왜 날 쫓아오지?' 내 엉뚱한 의문에도 아랑곳없이 백구는 혀를 쑥 내밀고 헥헥거리며 성큼 앞서 올라갔다. 녀석은 몇 발작을 올라가다 잠시 멈춰서더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마치 뒤 따르고 있는 사람이 잘 따라오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정말 뒤로 등산복 차림의 어느 여성이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개가 길을 다 안내하고 참 영특하네요"했더니 자기가 주인이 아니란다. 가시리 마을에서 민박을 하고 따라비 오름으로 향해 가는데 마을에서부터 자신을 따라왔단다. 개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오름 여행을 하고 있는 게 자기도 신기하다고.

이웃 블로거 친구가 제주의 아우섬 우도를 한 바퀴 걷다가 동네 개가 내내 졸졸 따라와 덜 심심하고 재미있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성질이 사나운 개는 묶어서 집을 지키게 하고, 순한 개는 방목해서 키우기도 하는 제주에서 일어날법한 일이다. 바퀴(자전거 여행자)를 보면 짖어 대지만, 힘들게 두 발로 걷는 여행자에겐 가이드까지 해주는 백구가 얄밉기도 하고 한편으론 기특했다.

 왼편의 큰사슴이 오름, 삼나무가 두른 잣성이 이어진 너른 평원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왼편의 큰사슴이 오름, 삼나무가 두른 잣성이 이어진 너른 평원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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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들어진 오름 앞에 서면 문득 제주의 오름과 초원과 들판을 사랑한 고 김영갑 사진작가를 떠올리게 된다. 루게릭병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0여 년 동안 제주도의 초원과 오름을 카메라에 담았던 사진가 김영갑은 눈으로 보아도 보이지 않고, 귀로 들어도 들리지 않고,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는 황홀한 그 무엇이 중산간 광활한 초원에 존재한다고 고백했다. 그가 죽는 날까지 중산간을 떠나지 못하게 했던 존재는 바로 오름이었다.

동쪽 너머 구좌읍에 있는 다랑쉬 오름을 '오름의 여왕'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따라비 오름도 '오름의 여왕'이라 이름 붙여 놓았다. 아름다운 선을 가진 언덕 능선과 주변 오름들을 아우르는 멋진 주변 풍광이 여왕이란 이름을 얻게 만들었나보다. 그러나 처참한 역사의 비극을 지켜보아야 했던 점에서 두 '오름의 여왕'의 운명은 닮았다.

거의 같은 시기인 1948년 11월 중순 다랑쉬 오름은 바로 앞 다랑쉬 굴에 숨어든 주민 20여 명이 토벌대에 의해 질식사 당하는 것을, 따라비 오름은 가시리 주민 500여 명이 서북청년단과 군경에 의해 무참히 학살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내가 이렇게 '느랏느랏 놀멍 쉬멍 걸으멍'(느릿느릿하게 놀면서 쉬면서 걸으면서) 갔던 중산간 지역의 오름 지대는 주민들이 억울하게 죽어갔던 현대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오름에서 정상과 중심이란 것은 중요하지 않다. 천차만별의 생김과 크기를 가진 오름들은 서로 배경이 되어 절묘한 아름다움을 빚어낸다. 거창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지만 소박하면서도 독특한 매력이 있는 오름은 참 '제주스럽다'.

따라비 오름에서 내려와 풍차들의(풍력 발전기) 작별인사를 받으며 정석 항공관 주차장으로 돌아오니 3시간 정도 걸린다는 쫄븐 갑마장길의 안내 푯말과 달리 5시간이나 지났다. 시간을 더한다는 가시리(加時里) 마을의 고운 이름만큼이나 오랫동안 머물고 싶은 길이다.

덧붙이는 글 | 지난 5월 6일에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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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야 금속말을 타고 다니는 도시의 유목민. 매일이,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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