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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을 빼놓고는 노무현 정부 5년의 통일외교안보를 말할 수 없다. 사진은 2011년 12월 20일 오후 서울 마포구 노무현재단에서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 모습.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을 빼놓고는 노무현 정부 5년의 통일외교안보를 말할 수 없다. 사진은 2011년 12월 20일 오후 서울 마포구 노무현재단에서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 모습.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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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석 전 장관을 빼놓고는 노무현 정부 5년의 통일외교안보를 말할 수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전폭적인 신뢰 아래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과 통일부 장관(NSC 상임위원장 겸임)으로 일한 그에 대해 주한 미 대사관은 2006년 1월 본국에 보낸 전문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이종석은 동일한 세계관을 갖고 있으며, 특히 대북관이 같다"(위키리크스 폭로자료)고 보고했다. 통일외교안보 분야에서 노 전 대통령과 '한몸'이었다는 점에서, 김대중 정부의 임동원 전 장관의 역할과 비교되기도 한다.

그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5주기를 앞두고 '노무현 시대 통일외교안보 비망록'이라는 부제를 붙인 <칼날 위의 평화>(개마고원)를 출간했다.

보수 세력에게 '반미-좌파'로 지목된 그는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의원으로부터 "국군과 유엔군이 적군이냐"는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받는가 하면, 이라크 파병이나 (주한미군의 한반도 출입을 자유롭게 하는) 전략적 유연성 문제와 관련해서는 진보진영 일각으로부터 '대미 굴종'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런 공격은 그뿐만 아니라 노무현 정부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됐다. '칼날위의 평화'라는 제목은 노무현 정부가 양쪽으로부터의 비판 속에서 한반도 평화를 끌어내려 노력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2004년 11월, 그리고 2006년 11월의 노무현-부시 회담

2단계 제4차 6자회담 이레째인 2005년 9월 19일 낮 댜오위타이(釣魚臺)에서 열린  전체회의에서 한반도 비핵화 원칙 등 6개항의 공동성명을 채택하고 회담을 성공리에 마친  6개국 대표들이 회담 직후 손을 맞잡고 이를 축하하고 있다.
▲ 북핵회담 타결 2단계 제4차 6자회담 이레째인 2005년 9월 19일 낮 댜오위타이(釣魚臺)에서 열린 전체회의에서 한반도 비핵화 원칙 등 6개항의 공동성명을 채택하고 회담을 성공리에 마친 6개국 대표들이 회담 직후 손을 맞잡고 이를 축하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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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1월 5일 그가 지휘하는 NSC 사무처는 "부시 정부를 적극 설득해 '북핵 해결 지연-남북관계 정체'의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주도적·공세적 구상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미 대선 이후 북핵문제 및 남북관계 발전방안'을 노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이 보고서는 그로부터 약 10개월 후 '동북아 평화협력의 이정표'라고 평가받는 9·19공동성명으로 귀결된다.

그는 이 과정에서 노 대통령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참여정부가 미국과 북한, 중국, 러시아, 일본 사이에서 어떻게 9.19공동성명을 이끌어냈는지를 부시 미국 대통령과의 회담 발언 등을 통해 상세하게 전했다.

노 대통령 : 협상할 때는 때로는 진실을 말하지 않고 참거나 협상이 끝날 때까지 미룰 필요가 있습니다.
부시 대통령 : 좋은 지적입니다. 저는 김정일을 거짓말쟁이라고 얘기하지 않겠습니다.(중략)
노 대통령 : 이 문제(북핵문제 해결-기자 주)는 객관적으로 한국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입니다. 이제 재선도 되셨으니까 이 문제를 미국의 우선순위 1번으로 하여 같이 협력해서 해결하여 한반도, 6자회담 당사국 및 세계인들에게 평화와 희망의 메시지를 주시기 바랍니다.
부시 대통령 :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우리는 서로 합의하였습니다.

2004년 11월 20일 칠레 산티아고 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은 이처럼 노 전 대통령의 설득을 받아들이는 듯했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은 5개월 뒤 김정일 위원장을 '폭군'이라고 비판했고, 9·19공동성명 직후에 BDA사건을 계기로 대북 금융제재를 가해 북핵문제 해결을 대북정책의 우선순위 1번으로 하겠다는 약속을 어겼다.

이 전 장관은 "종교적 선악의 관점에서 북한을 바라본" 부시 대통령과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을 9.19합의 좌절의 원인으로 지목하면서, "한미관계 역사에서 부시 정부만큼 일방적이고 패권적이며 비합리적인 파트너는 없었다"고 비판했다. 

결국 1차 북핵 실험과 공화당의 중간 선거 참패를 겪은 2006년 11월 18일 베트남 하노이 정상회담에서야 북핵문제 해결의 의지를 가다듬은 부시 대통령을 만날 수 있었다. 부시 대통령은 "북핵 폐기에 집중해야지, 인권·민주·독재체제 등 핵 이상의 목표를 달성하려고 해서는 핵문제 해결이 어렵다"는 노 대통령에게 "그것이 우리의 목표이며 그 외의 인상을 받으셨다면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답했다. 그리고 이것은 2007년 (핵폐기 대가로 북한에 중요를 지원하는) 2·13합의로 연결됐다.

국방부, 미 국방정보기관의 '재래식 전력 남한>북한' 자체보고서에도 반대

2003년 6월 24일 노무현 대통령이 NSC 위기관리센터 개소식에 참석해 이종석 사무차장(맨 왼쪽) 등 참석자들과 환담하고 있다.
 2003년 6월 24일 노무현 대통령이 NSC 위기관리센터 개소식에 참석해 이종석 사무차장(맨 왼쪽) 등 참석자들과 환담하고 있다.
ⓒ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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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국가 건설은 대통령과 그가 '100% 일치'한 꿈이었다. 이를 위한 현실의 당면과제는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와 자주국방이었고, 이를 위한 기초 작업의 하나가 '남북한 군사력 비교'였다.

그는 자신의 의뢰로 한국국방연구원이 이에 대한 연구를 하는 과정에서 국방부가 불만을 나타낸 과정을 전하면서 "국방부가 북한군에 대한 남한군의 열세"라는 강박증에 빠져있다고 지적했다. 심지어 국방부는 2004년에 미 국방정보기관(DIA)이 '남한의 재래식 군사력은 현재 북한보다 우월하다'는 자체작성보고서를 보내오자 이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노무현 정부 시절 최대 이슈 중 하나였던 이라크 파병 문제와 관련해서 보수 세력은 물론 노무현 정부 핵심 인사의 미국 중심 사고도 소개했다.

윤영관 외교부 장관이 외교안보참모회의에서, 주한 미 대사관이 한반도 관계 과장급 관리들의 말을 인용해 본부에 보고한 외교전문을 그대로 읽었다는 것이다. '한국 정부가 추가파병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부시 정부의 북핵 정책에 협조하기보다는 정책전환을 요구하고 있는 데 대해 미국정부가 크게 실망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분노한 노 대통령은 대통령직을 걸고서라도 이 불평등한 (한미) 관계를 고쳐가겠다면서 "내 시대에 내가 노력하다가 한미 관계가 깨지면 다음 대통령은 보다 균형된 한미 관계를 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를 포함해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비화들도 다수 소개했다. 우선 정권 초기 NSC 위기관리센터가 재난재해 업무의 컨트롤 타워를 맡느냐에 대한 논란이 눈에 띈다. 청와대에 컨트롤 타워가 있으면 대통령에게 직접 부담이 전가되므로 국무총리실이니 관련 부처에 컨트롤 타워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많았으나 노 대통령이 "국민은 궁극적으로 대통령에게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며 NSC위기관리센터가 컨트롤 타워를 맡도록 했다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국가 위기관리의 컨트롤 타워 논란과 관련해 큰 시사점을 주는 대목이다.

진보진영으로부터 큰 비판을 받았던 '전략적 유연성' 문제와 관련해서는, 애초 미국은 대만 유사시 한국을 발진기지로 삼는 군사계획을 세웠으나 한미 간 '전략적 유연성' 합의에 따라 포기했다는 사실을 처음 공개했다.

미국의 전략적 유연성 요구에 대해 노무현 정부는 처음부터 유연성 자체는 인정하되 한국이 동북아시아의 분쟁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는 기조를 정했고, 결국 2005년 6월 워싱턴 한미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이 노 대통령의 요구를 수용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한 달여 뒤 리처드 롤리스 미 국방성 아태담당 부차관보가 "지금까지 대만사태 관련 유사시 대비계획은 가정은 한국으로부터의 작전을 상정한 것이었다"며 "이제 한국 정부의 입장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으로 밝혀졌고, 미국 정부가 이를 이해하므로 대만 유사시 대비계획의 가정 자체를 바꾸어야 하는 상황"이라고 밝혔다는 것이다.

그는 이와 관련해 "지난 9년 동안 한미 관계를 고려해 이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으나 그때의 일이 역사가 됐고 한편으로 전략적 유연성 문제로 부당하게 비난을 받은 참여정부의 명예회복을 위해 밝히기로 결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략적 유연성 비화 9년 만에 공개... 홍석현 주미대사 후임 백낙청 추천

<칼날위의 평화-노무현 시대 통일외교안보 비망록>의 표지
 <칼날위의 평화-노무현 시대 통일외교안보 비망록>의 표지
ⓒ 개마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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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함께 'X파일 사건'으로 물러난 홍석현 전 주미대사의 후임으로 자신이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를 추천하고 노 대통령도 이를 수용했으나 백 명예교수가 고사했던 사실과 2006년 4월 추진됐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방북에 대해 북한이 김일성 주석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 기념궁전 방문을 그 전제조건으로 내세우면서 무산된 비화를 밝히기도 했다.

참여정부에서 함께 일했던 이해찬 전 총리, 정동영 전 장관, 송민순 전 장관, 문정인 교수, 김장수 현 청와대 안보실장, 윤병세 현 외교부 장관, 서훈 전 국가정보원 3차장, 김하중 전 주중대사, 김숙 전 외교부 북미국장, 윤태영 전 청와대 부속실장과 유희인 전 위기관리센터장 등 NSC 사무처 인사들에 대한 인물평도 눈길을 끈다.

본문만 539쪽에 달하는 이 책은 "그의 참모로서 나는 오늘도 자문한다"며 "'노무현 시대의 가치'를 잊혀진 유산으로 만들고 말 것인가"라는 말로 끝난다. 이 회고록이 이명박-박근혜 정권 아래서 잊혀져 가고 있는, 남북대결 종식을 통한 평화 정착과 공동번영, 그리고 자주 국가 건설이라는 '노무현 시대의 가치'를 되살려내려는 몸부림의 하나임을 나타내는 대목이다.

두 차례 정상회담을 통해 길을 만들어 냈던 남북은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적대관계로 돌아섰고 박근혜 정부에서도 꽉 막혀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롭게 남북 화해를 일궈내기 위해 고민하는 이들에게는 이 책이 꽤 유용한 참고가 될 만하다.

덧붙이는 글 | <칼날위의 평화-노무현 시대 통일외교안보 비망록> 이종석 지음/개마고원/2만8000원



태그:#노무현 , #이종석, #9.19 공동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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