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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때와 다름없는 4월 16일 아침이었다. 카페 문을 열려고 준비를 하고 있을 즈음, 배가 침몰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수학여행을 가던 학생들이 타고 있다는 소식에 가슴이 철렁했지만 곧 이어 "학생 전원구조"라는 속보가 휴대폰 알림창에 떴다. '그래도 다 구조되었다니 다행이네'라는 생각을 하며 아무렇지 않은 듯 카페 오픈을 준비하고, 점심도 챙겨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전원구조라는 속보가 '오보'라는 뉴스가 나왔다. 학생들이 아직 배 안에 있단다. '아니, 언론사가 그런 뉴스를 잘못 내보낼 수도 있나?' 싶은 의구심이 들었지만, 뉴스를 찾아보니 '신속히 구조작업 중'이란다. 여러 소식들과 함께 세월호 주변이 속속 생중계 되고 있었다. '그래, 배에 불이 난 것도 아니고 두동강 난 것도 아니니까, 승객들을 구할 수 있겠지' 하고 구조 소식을 막연하게 기다렸다.

'구조되겠지' 하는 마음은 순진한 믿음이었다

아픔과 분노를 달래기 위해 매일같이 홍대입구역에서 노란 리본을 달던 친구도 있었고, 시청 분향소에 다녀온 친구도 있었다.
 아픔과 분노를 달래기 위해 매일같이 홍대입구역에서 노란 리본을 달던 친구도 있었고, 시청 분향소에 다녀온 친구도 있었다.
ⓒ 이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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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 순진한 믿음은 하루도 지나지 않아 깨졌다. 휴대폰을 꼭 쥐고 구조 속보를 기다렸지만 단 한 명이라도 승객이 구조되었다는 속보는 날아들지 않았다(심지어 사고 발생 22일째인 7일 해경은 최초 구조된 승객이 174명이 아니라 172명이라고 정정했다. 동일인이 이름을 다르게 기재했고, 한 구조자가 동승자가 없었으면서 있었다고 밝혔기 때문이란다. 그 덕에 실종자는 2명 더 늘어난 35명이 되었다. 뭐라 할 말이 없다).

그때부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카페에 찾아온 손님들도 모두 세월호 이야기뿐이었다. 종교도 없는 내가 기도를 하고, 뉴스를 읽다가 불쑥불쑥 흐르는 눈물에 당황스럽고 죄스럽기까지 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주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카페를 같이 운영하는 친구는 세월호가 가라앉는 것을 지켜보며 SNS를 하고 있던 자신도 그 참사에 책임이 있는 것 같다며 괴로워했다. 하도 답답해 카페에 찾아온 한 친구는 이제 그 이야기 그만하면 안 되냐며, 너무 아프고 우울하다고 했다.

쏟아지는 감정들이 버거웠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무력감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이렇게 그 소중한 목숨들이 허무하게 갈 줄 알았다면 사고 소식을 들은 날 팽목항으로 달려가기라도 할 걸 그랬다. 뉴스만 보지 말고, 언론을 믿지 말고 도대체 무슨 사고가 일어난 건지 알아봤어야 한다는 자책마저 들었다. 살 수 있었던 생명들을 구해낼 수만 있다면 뭐라도 했어야 한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세월호 참사로 드러난 대한민국의 현실은 외면하고 싶을 정도로 처참했다. 그런 가운데도 우리는 계속 일상을 살아갔다. 먹고 살아야 하니 카페 문을 열어야했고, 의뢰받은 디자인 작업들도 계속 진행해야 했다. 밝고 환한 이미지를 만들어야 하는데 계속 어두운 색깔만 고르게 되는 나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다.

처참한 대한민국의 민낯... 검은 티셔츠 입고 만나러 갑니다

그러다 얼마 전 연휴 막바지, 같은 처지의 프리랜서 디자이너들과의 모임이 있었다. 어김없이 세월호 이야기가 나왔다. 해경이 주변에 머무르던 그때 배 안에서 마냥 기다리고 있었던, 아이들의 마지막 15분이 담긴 영상 때문에 슬픔과 분노가 혼재하던 날이었다.

아픔과 분노를 달래기 위해 매일같이 홍대입구역에서 노란 리본을 달던 친구도 있었고, 시청 분향소에 다녀온 친구도 있었다. 촛불추모제에 다녀왔는데 "친구들을 살려내라"는 고등학생들의 울부짖음이 가슴 아파 울었다는 친구도 있었다.

"가만히 있으라"고 말한 뒤 자신만 탈출한 선장, 부모를 잃은 아이에게 카메라를 들이미는 언론과 "친구가 죽은 사실을 알고 있냐?"고 묻는 기자, 구조는 제대로 하지 않더니 실종자 가족들이 청와대로 향한다고 하자 신속하게 막아나선 경찰, 정치에 이용한다는 말을 들을까 두려워 옳은 말 한 번 하지 않는 정치인들, 공감하는 척도 못하는 이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만 보이는 대통령.

'검은 티셔츠'를 맞춰입고 "너희들은 필요없다"는 목소리를 모아낼 캠페인을 제안해보기로 했다.
 '검은 티셔츠'를 맞춰입고 "너희들은 필요없다"는 목소리를 모아낼 캠페인을 제안해보기로 했다.
ⓒ 권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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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은 필요없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대한민국. 필요없는 권력을 향해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는 "뭐라도 더 해야 하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오보만을 전하는 언론에 항의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청와대로 가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정치인들한테 항의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우리의 분노를 보여주기 위해 구호가 담긴 옷을 맞춰 입으면 좋겠다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그리고 부족하나마 디자인을 업으로 하고 있는 우리가 티셔츠를 만들어보자는 의견으로 모아졌다.

그래서 '검은 티셔츠'를 맞춰입고 "너희들은 필요없다"는 목소리를 모아낼 캠페인을 제안해보기로 했다. 사람이 적어도 상관없다. 일단 우리끼리라도 가보자, 그렇게 마음을 모았다.

이 행동이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는 있을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동안 수많은 죽음들을 잊어왔던 것처럼 또 다시 생활의 고단함에 치여 이 아픔을 잊지 않으려면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간절함이 있을 뿐이다. 힘들었던 20여일 동안, 노란리본을 달았던 수많은 사람들과 지금 이 순간에 팽목항에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을 실종자 가족분들을 생각하며 힘을 낼 뿐이다. 더 이상 무력감에 지지 않기 위해,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겠다고 생각할 뿐이다.

<너희들은 필요없다! 검은 티셔츠 행동을 제안하며>

슬픔, 절망, 희망, 분노, 간절함, 무력함. 지난 20일 동안 짧은 순간에 이렇게 많은 감정이 사람을 휘저어 놓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누군가의 구조 소식을 듣기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기사를 검색했던 때는 차라리 나았습니다.

출근길 아침 지하철, "자리를 지키라"는 안내방송과 서로를 걱정하던 아이들 모습이 찍힌 동영상을 보면서는 흐르는 눈물을 멈출 길이 없었습니다. 살려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온 국민의 시선이 세월호에 가 있는데, 아직 배가 모두 가라 앉은 것은 아니니 살 수도 있을 거라 의심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마주하게 된 대한민국의 민낯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처참했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일각을 다투는 와중에도, 자리 보존과 책임 회피를 일삼는 썩은 무리들이 대한민국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진실을 보도한다고 믿었던 언론은 진실규명과 유가족들의 피끓는 절규에는 관심도 없고 오로지 보도지침에만 목 메고 있었습니다. 세월호를 정치에 이용한다는 비난을 감수하더라도, 진상규명을 반드시 해야한다고 소리높여주는 정치인도 없었습니다.

이런 현실을 마주하고도 제정신일 수 있었던 것은 거리 곳곳에 걸려있던 노란 리본 덕분이었습니다. "친구들을 살려내라"는 고등학생들의 절규 덕분이었습니다. 아직 품에 안지 못한 아이들을 기다리며 오늘도 진도체육관에서 밤을 지새고 계시는 실종자 가족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슬픔을 넘어 행동하자"라는 말이 터져 나오지만 "도대체 어디부터 바꿔야 하나, 바뀌기는 하는 것일까" 하는 질문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힙니다. 하지만 저희 또한 유족들의 절규와 아까운 목숨들이 일상에 묻혀 잊게 될까봐 무섭습니다.

세월호 참사로 확인하게 된 대한민국의 현실을 외면하고 싶지 않습니다. 국민들의 분노가 어디로 향할지, 이 행동들이 어떤 영향을 줄지 그것까지 예상하지는 못하겠습니다. 다만,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겠습니다. 우리 국민들은 생명과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권력을 일임한 것이지, 우리 생명을 빼앗을 권력을 준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권력은 대한민국에 필요없다는 생각입니다.

무엇이라도 해보겠다고 나서는 여러분의 힘에 저희도 작은 재능 하나를 보태고자 합니다.
행동하는 사람들의 복장, 편하게 움직일 수 있고 우리의 분노와 고민의 상징을 새겨 넣을 수 있는 티셔츠를 디자인하려 합니다. 검은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의 네트워크가 언론사를 향해, 관공서를 향해, 급기야 청와대를 향한 행동을 하길 기대해 봅니다.

5월 10일 토요일, 언론사를 찾아갑니다. 사고 초기 "전원구조" 보도로 구조 작업에 혼선을 주고는, 반성도 없이 보도지침만을 받아 써내려가는 추한 행태를 보이고 있는 언론사에게 일침을 놓읍시다. 광화문 인근에 있는 주요 언론사들과 프레스센터에 국민들의 '보도지침'을 전해주는 행동을 제안합니다.

티셔츠를 준비해 가겠습니다. 티셔츠를 함께 입을 여러분은 제 핸드폰 문자메시지로 미리 신청해주세요. 작은 시작이어도 좋습니다. 저를 아는 지인들부터, 시민이라면 누구나 함께해주세요. 검은 티셔츠의 네트워크가 잘못된 권력들을 향한 국민들의 직접 행동의 불씨가 되었으면 합니다.

검은 티셔츠의 네트워크가 잘못된 권력들을 향한 국민들의 직접 행동의 불씨가 되었으면 합니다.
 검은 티셔츠의 네트워크가 잘못된 권력들을 향한 국민들의 직접 행동의 불씨가 되었으면 합니다.
ⓒ 권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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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 방법>

1) 카톡 아이디 : @docile98 이름, 티셔츠 사이즈(S, M, L, XL, XXL, XXXL), 청소년 여부(청소년은 반값), 자원봉사 참여여부를 알려주세요. http://goo.gl/MhmzLe 구글독스로 신청해주셔도 됩니다.

2) 티셔츠는 5천원에 판매하고 남은 금액은 피켓 제작, 국화 꽃 구입 등에 사용하겠습니다.

3) 날씨가 변동이 크니, 겉옷이나 레이어드로 입을 수 있는 긴팔옷을 입고 오셔도 좋습니다. 꼭 티셔츠를 구입해 입지 않아도 참여해주세요

4) 행동방식
5월 10일 2시, 청계광장에 모여, 티셔츠를 나눠입고 프레스센터→서울신문→조선일보→동아일보로 행진하고, 각 언론사 앞에서 한목소리로 국민들의 '보도지침'을 낭독하겠습니다. 행진 시에는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겠습니다.

5) 안산 추모 촛불
티셔츠 행동을 마치고, 시간 되시는 분들은 안산 추모 촛불에 함께 가면 좋겠습니다.


태그:#세월호, #행동 티셔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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