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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 편의점에 가던 길, 영문도 모른 채 경찰에 체포됐다. 경찰서에 와서야 알게 된 범죄 혐의는 당신과 상관없는 일이다. 혐의를 부인하고, 구속영장도 기각돼 풀려나지만 그날 저녁부터 방송 뉴스에서 당신의 신원이 낱낱이 공개되기 시작한다.

경찰서에 있는 모습부터 나이, 성별, 사는 곳, 하는 일 등이 공공연히 알려진다. 당신이 활동했던 정당, 시민단체들도 거론되고, 체포 직전 태블릿 PC로 무얼 했는지, 누구와 통화했는지까지 공개된다. 당신의 모든 것이 범죄자의 것인양 뉴스로 보도된다면 어떨까?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지만 2013년 5월부터 올해 4월까지 실제 임아무개씨가 겪었던 일들이다. 임씨는 지난 2013년 5월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집에 화염병을 던진 혐의를 받고 긴급체포됐다. 원 전 원장 집 근처 CCTV에 그가 찍혔다는 것이 이유였다.

CCTV 화면은 흐릿했고, 범인은 마스크와 모자를 써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더군다나 화면의 모습이 임씨의 체구와는 많이 달랐다. 이 때문에 체포 직후 열린 영장실질심사에서 임씨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는 기각됐다. 이후 지난 7월 경찰의 새로운 증거분석법 제시로 구속되긴 했지만, 임씨는 결국 지난 4월 25일 1심 무죄판결을 받았다.

 2013년 5월 20일 tv조선 아침뉴스
 2013년 5월 20일 tv조선 아침뉴스
ⓒ tv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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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위에 선 언론, 무죄판결 받아도 죄인이라 하네

법은 그에게 죄가 없다고 했지만 언론은 달랐다. 그가 체포된 순간부터 그를 '화염병 던진 테러리스트'라 부르더니, 무죄판결을 받은 지금도 '화염병 던진 30대'라 부른다. 화염병을 던진 것이 사실인양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사생활침해도 서슴없다. <TV조선>은 2013년 5월 17일 <뉴스쇼판>에서 이 소식을 가장 먼저 전했다. <"원세훈 자택 화염병 투척 용의자는 좌파 성향 시민단체 회원">에서 임씨를 "좌파 성향 시민단체 회원으로 30대 회사원"이라고 소개했다. 이어 이 시민단체 활동사항을 전했다.

이 뉴스는 18일 오전 9시, 12시, 오후 1시 뉴스에 빠짐없이 보도됐고, 같은 날 저녁종합뉴스에서는 임씨가 사는 곳과 체포 당시 컴퓨터로 했던 일 등이 추가됐다. 19일에는 임씨의 직업을 소상히 밝혔다. 어떤 회사를 다니는지, 직급은 어느 정도인지, 언제 어떻게 입사해, 어떤 일을 맡고 있는지 등 범죄 혐의와도 관련이 없는 일들이었다. 다음 날인 20일 오전 9시 뉴스에도 이 뉴스는 반복 보도됐다.

21일에는 임씨가 활동하는 단체의 이력을 집중 조명했다. 대학생일 때는 어떤 단체에서 활동했는지, 이후에는 어떤 단체에서 활동했는지, 그 단체는 어떤 이력이 있는지, 단체의 활동 방식은 어떤지, 단체장은 어떤 이력을 가지고 있는지 등이다. 역시 다음 날인 22일 오전 뉴스에도 반복 보도됐다. 이렇게 17일부터 22일까지 6일 동안 <TV조선>은 임씨가 화염병을 던졌다는 전제 아래 그의 사생활을 파헤쳤다.

사실 피의자에 대한 우리 언론의 마녀사냥이 특이한 일은 아니다. 혐의만 공개되도 범죄를 저지른 것을 기정사실화하며 사건을 부풀린 뒤, 무죄 판결이 나오면 단신처리 하는 것이 관행화되어 있다.

지난 4월 25일 간첩 혐의에 대해 무죄 선고를 받은 유우성씨 관련보도도 마찬가지다. 유씨가 구속되자마자 화교 출신임이 보도되었고, 그가 언제 어떻게 서울시 공무원이 되었고, 서울에서는 어떻게 살았는지, 북한 어느 지역에 거주했으며, 북한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등 유씨의 신상에 대한 보도가 잇따랐다.

이와 비교해 보면 무죄판결에 대한 보도는 아주 간단하다. 대개 모든 방송사에서 판결 내린 법원의 입장과 검찰, 국정원장의 입장을 간단히 요약해 보도했다. 그나마 <MBC>는 25일 <뉴스데스크>에서 재판부가 유씨의 애국심을 인정한 것을 도마 위에 올렸다.

<유우성, 간첩 혐의 '무죄' 판결…탈북자 위장 사기 혐의 인정> 기사를 소개하며 앵커는 "재판부가 중국인 유우성씨의 애국심을 인정한다고 표현한 데에 대해서는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기자는 이를 설명하며 "(검찰 고위관계자는) 유씨가 '애국심'이 있어서 형량을 감안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반발"했다고 전했다. 1년이 넘도록 간첩 여부를 놓고 공방이 있어 왔는데, 유씨가 간첩이 아니라는 결과보다 중국인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2013년 1월 21일 tv조선 아침뉴스
 2013년 1월 21일 tv조선 아침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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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도 무시, 무죄추정의 원칙 위배

이런 언론의 보도태도는 '무죄추정의 원칙'에 위배된다. 우리 헌법 제27조 4항에는 "형사 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고 명시되어 있다. 대한민국 국민 누구도 범죄가 확정될 때까지 범죄자 취급을 받지 않을 권리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언론에서 범죄 혐의자를 범죄자 취급하면 낙인찍기가 되어 공동생활에서 직업을 잃거나, 친구를 잃는 등의 배제를 당할 수도 있고, 재판과정에서 여론이 작용해 불공정한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

지난 4월 21일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이준석 세월호 선장에게 '살인 같은 행태'를 했다고 비난한 것에 대해 외신이 비판한 맥락도 이와 같다. 같은 날 미국 <월스트리스저널> 온라인판은 '박근혜 대통령이 선장을 비난한 게 잘한 건가'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런 비판이 선장과 선원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저해할 우려를 지적했다. (관련기사 : WSJ "박근혜 대통령이 선장을 비난한 게 잘한 건가")

뿐만 아니라 이중처벌의 위험성도 있다. 범죄자의 신상공개 여부가 법과 행정의 판단 영역인 이상, 이에 해당치 않는 범죄자의 개인정보를 언론이 보도하는 것은 월권행위다. 신상공개로 인해 겪는 2차 피해가 사적처벌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보도가 범죄 혐의자 주변인들에게 피해를 입혀 사회적 연좌제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3000개의 매뉴얼보다 중요한 건 현장 적용이라더니

이런 문제를 개선하고자 한국기자협회와 국가인권위원회는 2011년 인권보도준칙을 제정했다. 언론이 보도과정에서 준수해야 할 최소한의 인권적 관점을 제시한 것이다. 이 준칙 2장 인격권에는 '용의자나 피의자, 피고인의 얼굴, 성명 등 신상정보는 원칙적으로 밝히지 않는다'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수사나 재판 중인 사건을 다룰 때 단정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고도 적혀 있다.

그러나 언론의 준수율은 높지 않다. 지난해 12월 22일 인권위가 발표한 '주요 언론의 인권보도준칙 준수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약 2달 간의 조사기간(6월3~30일, 9월2~29일) 동안 총 977건의 인권침해 사례가 나타났다. 인권침해 사례 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개인의 인격권'으로 절반 이상이 당사자 동의 없이 프라이버시나 초상권을 침해한 경우였다.

 4월 25일 중앙일보
 4월 25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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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이야기를 할 필요없이 이번 세월호 참사에서도 많은 언론들이 선장과 선원 관련 뉴스를 보도하면서 모자이크나 음성변조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준석 선장은 현재 어디서 어떻게, 무얼 먹고 지내는지까지 보도할 정도다. 이들의 죄가 비난받아 마땅할지라도 언론이 나서서 비난을 조장할 필요는 없다.

이번 세월호 참사에 대한 정부의 대응을 비판하던 언론은 3000개 넘는 매뉴얼도 쓸모가 없었음을 지적했다. 매뉴얼보다 중요한 것은 현장 적용 능력이라는 것이었다. 인권보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지켜지지 않는 보도준칙은 쌓여만 있는 정부의 매뉴얼과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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