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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지 않는 눈물

잔인한 4월이다. 길을 가다 교복 입은 학생들만 봐도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날씨가 눈부시게 좋으면 그래서 또 눈물이 난다. TV를 틀면 생때같은 아이들의 죽음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데, 주위의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침통하고 무기력하다. 비슷한 풍경으로 2012년 대선이 끝난 후를 떠올려 보지만, 그때의 슬픔과 충격은 지금과 비교할 것이 못된다. 어쨌든 당시에는 그래도 국민의 절반은 웃고 있지 않았던가.

사실 16일, 처음 세월호 소식을 접했을 때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언론도 대부분의 승객들이 구조되었다고 잠시나마 이야기 했었고, 얼핏 본 사진에서도 세월호는 매우 큰 여객선으로 얼마 잠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설마 저렇게 큰 여객선이 빠른 시간에 완전히 침몰되겠으며, 또 그렇다고 하더라도 승객들을 대피시킬 방법이 없겠는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그러나 그것은 안일한 생각이었다. 갑자기 언론들은 다급해졌으며, 정부는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지옥의 문이 열린 것이다.

세월호가 완전히 잠겼음에도 불구하고 언론들은 끊임없이 에어포켓 이야기를 하면서 생존의 가능성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렇게 믿고 싶었지만, 이성적으로는 그들이 살아나올 가능성이 매우 낮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침몰된 지역의 좋지 않은 환경도 환경이었지만, 정부가 과연 그들을 구할 능력이 있는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었다.

혹시는 역시가 되었고, TV에서는 믿을 수 없는 소식들만이 들려 왔다. 제 자리를 지키라는 방송 안내만 믿고 그대로 있다가 물에 잠긴 학생들, 자신의 모든 책임을 뒤로 한 채 자기 한 몸 살겠다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탈출한 선원들, 그리고 아직까지 일말의 희망을 갖고 넋을 놓은 채 바다를 바라보는 부모들.

가슴이 미어졌다. 운전을 하다가 갑자기 오열을 터뜨렸고, TV를 보면서도 아내 몰래 눈시울을 비볐다. 시도 때도 없이 흐르는 눈물. 분노보다는 슬픔이 앞섰다.

그제야 난 내가 21년 전과 달라졌다는 것을 인지했다. 1993년 중3때 나는 서해 훼리호 침몰 소식을 접했음에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말도 되지 않는 현실에 어처구니없어 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후 벌어지는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 지하철 가스 폭발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왜 이렇게 눈물이 멈추지 않는 것일까? 단순히 나이가 들어서? 그러면 마음에도 굳은살이 박이기 마련이라는데, 도대체 무엇이 날 이리도 힘들게 만드는 것일까?

21년 전과 다른 오늘


1993년 10월 10일 오전 10시 10분경 전북 부안군 위도면 임수도 부근 해상에서 승객 2백여명과 승무원 9명을 태우고 위도 파장금항을 출발하여 부안군 변산면 격포항으로 항해하다 침몰한 훼리호를 인양, 시체인양작업을 벌이는 UDT대원들 모습.
 1993년 10월 10일 오전 10시 10분경 전북 부안군 위도면 임수도 부근 해상에서 승객 2백여명과 승무원 9명을 태우고 위도 파장금항을 출발하여 부안군 변산면 격포항으로 항해하다 침몰한 훼리호를 인양, 시체인양작업을 벌이는 UDT대원들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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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오전 제주도 수학여행길에 오른 안산 단원고 학생을 비롯한 459명을 태운 여객선 '세월호'가 전남 진도군 조도면 병풍도 북쪽 20km 해상에서 침몰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지난 16일 오전 제주도 수학여행길에 오른 안산 단원고 학생을 비롯한 459명을 태운 여객선 '세월호'가 전남 진도군 조도면 병풍도 북쪽 20km 해상에서 침몰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 해양경찰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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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단순하게 내가 부모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결혼식에 가면 신랑 보다는 신부 아버지에게 감정이입을 하듯이, 결혼을 해서 아이를 셋이나 기르는 부모가 되었으니 당연히 이번 사고를 부모의 입장에서 바라보게 되고, 그만큼 더 슬프겠거니 여긴 것이다.

아직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한 채 세월호와 함께 가라앉은 단원고 학생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억울하게 명을 달리한다는데 과연 어떤 부모가 미치고 팔짝 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더 끔찍한 사실은 내가 대한민국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상 내 자식이 그와 같이 죽을 가능성이 언제나 상존한다는 사실이었다. 21년 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은 국가의 수준. 과연 난 이런 곳에서 아이를 키워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지금의 슬픔을 설명하기 힘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보다 더 슬퍼하는 이들을 볼 수 있으며, 어쨌든 지금 난 그들과 함께 슬픔을 나누며 위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론 보도의 차이 때문일까? 사실 21년 전과 비교하면 현재 우리가 세월호에 대해서 듣고 있는 정보는 천지차이다. 기껏해야 9시 뉴스나 뉴스특보, 그 다음날 조간신문들을 통해 사건을 접할 수 있었던 21년 전과 달리 현재 우리는 실시간으로 수많은 정보를 접하고 있다. 따라서 달라진 언론 환경은 21년 전과 비교하여 사람들에게 더 큰 충격을 줄 수밖에 없다.

예컨대 세월호가 바다로 침몰한 장면을 떠올려 보자. 모든 국민들이 실시간으로 지켜본 그 장면은 결국 그 수많은 생명들이 우리의 무능력 때문에 속절없이 죽어간 끔찍한 장면이기도 하다. 학생들은 살려달라고 선내에서 아우성을 쳤지만 우리는 그들의 부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또한 국민들은 수많은 채널을 통해 실종자들의 가슴 아픈 소식은 물론이요, 현장의 아픔을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죽기 직전 아들이 아버지에게 보낸 끔찍한 사진들을 볼 수 있었으며, 정부 발표와 다른 구조 현황 때문에 학부모들이 더 분노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역시 그것만으로는 현재 나의 참담함을 설명할 수 없었다. 물론 21년 전과 비교하여 완전히 달라진 언론 환경이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현재의 감정을 설명하기에 부족했다. 수많은 보도를 접하지 않아도, 2014년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속절없이 죽어갔거나 생사확인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만으로도 눈물은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21년 전과 달라지지 않은 현실

지난 1993년 10월 15일 서해훼리호 한 선원의 유가족이 선착장에 사자밥을 차려놓고 고인의 명복을 빌고 있다.
 지난 1993년 10월 15일 서해훼리호 한 선원의 유가족이 선착장에 사자밥을 차려놓고 고인의 명복을 빌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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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1일 오전 실종자 생존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 가운데 전남 진도군 팽목항에서 실종자 가족들이 바다를 바라모며 슬픔에 잠겨 있다.
 지난 21일 오전 실종자 생존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 가운데 전남 진도군 팽목항에서 실종자 가족들이 바다를 바라모며 슬픔에 잠겨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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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이유들만으로 설명하기 부족한 우리들의 슬픔. 그렇다면 그것은 혹시 우리 모두가 세월호 침몰에 있어서 적지 않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21년 전 중학교 3학년 당시 난 서해 훼리호의 침몰을 보면서 그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못했다. 그것은 급격한 산업화로 앞만 보고 달려온 대한민국이 겪을 수밖에 없는 통과의례였으며, 목적을 위해서는 모든 과정을 생략해도 된다는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의 발현이라고 생각했었다. 승객 정원보다 100명을 넘게 태워도 좋은 게 좋다고 생각했으니 예정된 사고일 수밖에.

그런데 그 끔찍한 사건이 일어난 지 21년이 지났다.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었으며, 난 어느새 30대 중반의 성인이 되었다. 사회가 굴러가는 데 있어서 어쨌든 일부분의 책임을 지게 된 것이다. 그 동안 대한민국은 비록 IMF를 맞기도 했지만 어쨌든 21년 전과 비교하여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무역 규모는 세계 7위가 되었으며, IT강국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이제 해외에 나가 코리아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알아볼 만큼은 되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이번 세월호 사건은 그 모든 것이 우리의 착각임을 보여주었다. 세월호는 아직 우리가 21년 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음을 증명해 주었다. 언론은 이번 사건을 '후진국형 사고'라고 규정했지만 이는 진실이 아니다. 우리는 아직 어떤 면에서는 후진국에 가깝다. 목적을 위해서는 모든 수단을 정당화 시키고, 돈 때문에 사람 목숨도 가벼이 여기며, 나만 아니면 된다고 생각하는 수준 이하의 사회.

문제는 그와 같은 참담한 현실을 만드는 데 있어서 내가, 우리 모두가 일조했다는 사실이다. 직접적으로 나쁜 짓은 안 했어도, 그런 썩어빠진 현실을 바탕으로 부자가 된 사람들이 영웅이 되는 사회를 받아들였으며, 그들이 만든 체제 안에서 무기력하게, 또는 타협해 가며 세상은 원래 그런 거라고 술잔만 기울여 왔기 때문이다. 원칙을 논하면 고지식하다고 손가락질 하고, 융통성이 없다며 팽 시키는 사회. 혹여 그런 사회를 바꾸고자 노력했더라도 죄책감에서 벗어나긴 쉽지 않다. 그만큼 절박함이 없었기에 사회는 아직 이 모양 이 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 세월호가 침몰하고 말았다. 21년 전 서해 훼리호와 너무도 똑같은 모습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아무 죄가 없는 200여 명의 고등학생들도 포함되어 있다.

결국 현재 많은 이들이 세월호의 침몰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씻기 힘든 죄책감과 부끄러움 때문이다. 말도 안 되는 참사 앞에서 책임이 없다고 발뺌하는 청와대나 막말을 던지는 정치인들은 21년 전 똑같은 사고를 겪었어도 전혀 반성하지 않았던 우리들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생방송으로 대통령 지지율을 걱정하는 이들이 버젓이 언론인이라 칭해지는 시대, 우리는 그 시대를 만들어낸 공범이다.

세월호는 현재 진행형이다. 사람들은 모든지 잘 까먹는 국민성을 걱정하고 탓하지만, 그것은 비겁한 변명일 뿐이다. 결국 세월호를 잊느냐 마느냐는 것은 스스로의 몫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아무리 충격 상쇄용 기사를 개발하더라도, 사람들이 잊지 않는다면 사회는 그만큼 앞으로 나갈 것이다.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이 못난 어른들을 용서하지 않기를.


태그:#세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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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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