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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조선총독부'를 세운 곳은 경복궁이었다. 경복궁 내의 대다수 전각을 헐어 버리고, 그 앞에 르네상스 양식의 위압적인 총독부 청사를 지었다. 조선 왕조의 '초라함'과 일본 제국의 '위용'을, '야만' 조선과 '문명' 일본을 대비 시키려는 의도였다. 이는 조선 왕조의 정궁(正宮)이던 경복궁이 갖는 상징적·문화적 의미를 고려한 것이었다.

일본 식민지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슈리성'

현재는 일본에 편입돼 있는 오키나와에도 우리와 같은 역사가 있다. 오키나와가 오키나와이기 이전, 이곳은 '류큐왕국'이라고 하는 독립국을 이루고 있었다.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 풍습을 지닌 엄연한 독립국가였다.

류큐 왕국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나하시에 있는 '슈리성'이다. 슈리성은 오키나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산산히 파괴되었다. 전쟁 후 뒤늦게 복원이 시작되어 우리가 슈리성을 찾았을 때도 한쪽에서는 성벽 복원 작업이 한창이었다.

슈리성 성곽의 모습. 한켠에서는 복원 공사가 진행중이다.
 슈리성 성곽의 모습. 한켠에서는 복원 공사가 진행중이다.
ⓒ 겨레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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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큐왕국은 1608년 임진왜란의 여세를 몰고 온 사쓰마 번(지금의 규슈지역)의 침공받아 군사 지배하에 들어간다. 중국 명나라와 조공 관계를 맺고 있던 류큐왕국은 사쓰마의 지배를 받음으로써 '양속관계'라는 기이한 입장에 처한다. 사쓰마는 명나라와의 조공무역의 이익을 가로 채는 악덕 포주처럼 행세하며 가혹한 착취를 한다. 사쓰마의 군사식민지배는 메이지 유신까지 이어진다.

1879년 류큐왕국은 메이지 정부의 '류큐처분'에 의해 지금의 오키나와현으로 일본 중앙정부 아래 강제 복속된다. 류큐의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는 일본에게는 이질적인 것이었고 바꿔야 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류큐왕국의 민족성과 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철저한 동화정책을 실시한다.

가장 먼저 류큐국의 왕을 도쿄로 강제 이주 시킨다. 그리고 왕국의 상징인 슈리성을 일본 육군의 군영으로 사용해 버린다. 뒤에 일부를 학교로 사용하기도 했다. 왕궁으로써의 기능을 잃은 슈리성은 급속도로 황폐화되어 붕괴 직전에 이른다.

그리고 '개성개명' 운동으로 류큐 식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게 했다. 류큐의 고유 언어 사용을 금지시키고 본토의 표준어 사용을 강요했다. 류큐어를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방언패'를 걸어 벌했다. 일본은 오키나와를 식민지 취급을 하며, 오키나와 현민을 열등한 존재로 보았다. 뿐만 아니라, 천황에게 충성하는 황국신민을 기르기 위한 '황민화교육'을 실시하기도 했다.

슈리성 소실과 복원

슈리성의 중심인 정전의 복원된 모습. 내부도 일반에 공개되었지만 촬영금지였다.
 슈리성의 중심인 정전의 복원된 모습. 내부도 일반에 공개되었지만 촬영금지였다.
ⓒ 김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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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만난  슈리성은 아주 깔끔했다. 갓 조성된 공원 같다. 실제 복원된 시기도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슈리성의 중심 건축물인 정전(正殿) 내부는 우리가 방문하기 이틀 전에 공개되었다고 했다. 고대 왕궁에 들어가는데 새집 냄새가 나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슈리성은 1945년 오키나와 전쟁 당시 거의 완전히 소실되었다. 일본은 전쟁이 발발하자 슈리성 밑에 지하호를 파서 이곳을 육군사령부로 사용했다. 미군은 슈리 방어선을 뚫기 위해 엄청난 포격을 가한다. 이내 슈리 방어진지는 함락되고 만다. 그 결과로 슈리성이 자리잡은 언덕은 풀 한 포기 없는 민둥산이 되고 말았다.

1945년 패전으로 일본은 미군정의 지배를 받는다. 이로부터 7년 후인 1952년 4월 28일 일본은 주권을 회복하게 된다. 이 날을 '주권회복의 날'로 삼아 기념하고 있다. 하지만 오키나와에서는 이 날을 '굴욕의 날'로 여기고 있다. 이 날로부터 오키나와는 샌프란시스코조약의 발효로 다시 미군정의 지배하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미군정 지배 하에서 오키나와인들의 비원이었던 '슈리성' 복원은 요원한 일이 되었다. 복원은 고사하고 슈리성 터에는 류큐대학이 세워졌다. 류큐왕국의 흔적은 땅 밑으로 뭍혀 버리는 듯했다.

1972년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로 복귀된다. 복귀 후 오키나와는 슈리성 복원에 박차를 가했다. 1992년, 무려 20년이라는 세월을 들여 정전을 중심으로 한 주요 건축물들을 재건했다. 일부 성곽은 지금도 복원중에 있다.

슈리성의 입구이자 상징인 '슈례문'. 기념 촬영을 하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슈리성의 입구이자 상징인 '슈례문'. 기념 촬영을 하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 김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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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리성 안으로 들어가는 문. 불규칙한 곡선의 성벽이 굳건히 서있다.
 슈리성 안으로 들어가는 문. 불규칙한 곡선의 성벽이 굳건히 서있다.
ⓒ 겨레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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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리성의 입구이자 상징인 '슈례문(守礼之門)' 앞에서는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슈례문은 일본에서 2000년을 기념해 발행한 2000엔 지폐의 도면에 나온다. 그리고 슈리성 터는 2000년 후반에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됐다. 이렇듯 '자랑스러운' 류큐왕국의 모습을 필름에 담기 위해 사람들은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우리도 오키나와 관광코스 일번지인 슈리성을 돌아보는 내내 탄성이 끊이지 않았다. 오키나와 특유의 산호 석회암으로 만든 성벽은 박력 있는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성을 휘감은 듯 불규칙한 곡선으로 둘러싸인 모습에서는 샤먼의 염력이 느껴지는 듯했다. (류큐왕국은 샤머니즘 신앙으로 정치,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슈리성의 성벽도 샤먼의 지시로 설계된 것이다.) 

슈리성의 건축물은 류큐국의 독자적인 건축양식이다. 하지만 중국의 영향으로 건물은 붉은 색이다. 재건된 지 오래 되지 않은 정전, 남전, 북전 건물에서는 빛바랜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선명한 붉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액막이를 상징하는 붉은 색에 잡귀 따위는 얼씬도 못할 듯했다.

새롭게 복원된 슈리성 건물은 선명한 붉은 빛을 발하고 있다.
 새롭게 복원된 슈리성 건물은 선명한 붉은 빛을 발하고 있다.
ⓒ 김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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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차별에서 비롯된 '류큐독립운동' 움직임

슈리성은 화려하게 재등장했다. 여행객들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류큐왕국의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슈리성의 부활이 화려했던 류큐왕국의 시간을 단지 역사의 한페이지로 남길 수 있을까.

'류큐처분' 이후 오키나와에 가해졌던 많은 차별은 오늘날에도 이어져 오고 있다. 오키나와인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멸시하고 향토문화를 부정하는 풍조를 강요 받았다. 오키나와 전쟁에서는 본토 수비를 위한 '사석'이 되어  오키나와 주민의 4분의 1일이 처참하게 희생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오키나와는 미군의 지배속에서 27년의 세월을 인내해야 했다. 미군의 지배 속에서 오키나와는 섬 면적의 20퍼센트에 가까운 땅을 미군기지로 빼았겼다.

1972년 일본 본토 복귀의 기쁨도 잠시. 미군기지 없는 평화로운 오키나와를 꿈꾸었던 주민들의 염원은 산산히 부서진다. 일본 정부는 미군기지 반환은커녕 본토의 미군기지를 오키나와로 더 몰아 넣었기 때문이다.

미군정의 장막이 걷힌 뒤에도 오키나와의 비극은 이어진다. 계속되는 미군기지의 확장, 비행기 추락 사고로 인한 주민피해, 여중생 성폭행 사건 등 끊이지 않는 사건사고로 오키나와 주민들의 인내는 임계점에 다다른다.

오키나와의 '류큐독립운동'의 움직임. '류큐독립학회'설립 기자회견 모습(좌)과 류큐자치독립을 지향하는 잡지 'N27' 창간호(우).
 오키나와의 '류큐독립운동'의 움직임. '류큐독립학회'설립 기자회견 모습(좌)과 류큐자치독립을 지향하는 잡지 'N27' 창간호(우).
ⓒ 김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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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 속에서 오키나와 안에서는 '류큐독립운동'이라는 마그마가 분출되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의 오랜 차별을 더는 참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지난 2013년 5월 '류큐민족독립종합연구회' 설립으로 이어졌다. 이 연구회는 설립취지문에 이렇게 밝혔다.

"1879년 메이지 정부에 의한 류큐 병합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류큐는 일본 그리고 미국의 식민지가 되어 일미 양 정부의 차별, 착취, 지배의 대상이 되어 왔다. …<중략>... 류큐민족은 '인민의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법적주체다. 일본으로부터 독립해 모든 군사기지를 철거하고 세계 각국과 지역, 민족과 우호관계를 구축, 류큐 민족이 오랫동안 숙원해 온 평화와 희망의 섬을 스스로 만들 필요가 있다"

이 연구회가 설립된 날 오키나와의 유력 언론인 <류큐신보>는 '역사 국면의 전환'이라고 평가하며, 본질적인 문제는 어떠한 자치의 형태가 바람직할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같은 해 6월 23일 오키나와 전쟁 '위령의 날'에 맞춰 <N27>이라는 잡지가 창간됐다. 이 잡지는 류큐 자치독립을 지향하는 젊은 연구활동가들 중심의 비평지다. 참신한 디자인과 사진, 예술 작품들을 많이 활용하는 특징이 있다. 오키나와 잡지로서는 이례적으로 초판이 매진되기도 했다.

과거의 류큐독립론은 실천없이 떠들기만 하는 '술집 독립론'으로 비하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후텐마 기지 이전을 둘러싼 반대여론과 차별, 착취로부터 탈피하겠다는 오키나와 사람들의 의지는 이제 술집 독립론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학문적·공적인 언론 공간 내에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이다.

오키나와 독립운동에 대한 의견은 분분할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할 것은 오랜 차별과 강요된 희생에서 비롯된 '자주권 회복'을 위한 오키나와 사람들의 목소리다. 오키나와야말로 일본이 말하는 평화의 위선적인 얼굴이 집약되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평화가 절실한 '평화의 섬' 오키나와

우리가 조선 총독부 건물을 부수고, 경복궁을 복원했다고 해서 일제 식민지의 역사의 먹구름이 거둬지는 것이 아니다. 슈리성의 복원으로 오키나와 민중들이 받았던 차별과 착취가 보상되는 것도 아니다. 슈리성을 둘러 보면서 우리의 아픈 역사와 닿아 있는 오키나와에 연민을 느낀다.

오키나와를 '평화의 섬'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오키나와에는 전쟁의 기억에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다. 시시때때로 그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미군기지가 빼곡히 들어와 있다. 지금 오키나와는 너무도 평화롭지 못하다. 그렇기에 '평화의 섬'이라는 역설적 수식어는 오키나와가 놓인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열망의 표시인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오키나와 여행기는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다음에는 대만 여행기가 이어집니다. 오키나와 기행은 1월 25일~28일까지 겨레하나 여행사업단 '더하기 휴'의 '서승 교수와 떠나는 오키나와 평화감성여행' 프로그램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태그:#오키나와, #슈리성, #류큐왕국, #류큐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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