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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인생의 마지막 냉장고가 될 가능성이 높은 냉장고.
 엄마 인생의 마지막 냉장고가 될 가능성이 높은 냉장고.
ⓒ 홍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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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초여름. 막 시작되던 더위가 사람을 늘어지고 지치게 하던 시기. 퇴근길에 선배들을 만나 생맥주 한 잔으로 장마가 시작되던 여름 초입의 피로와 짜증을 씻어내던 저녁 무렵이었다.

핸드폰이 집요하게 울어댔다. 받아보니 엄마. '낡은 냉장고가 고장났으니 새 걸 하나 사야겠다'는 이야기. 별 걸 다 나한테 의논한다 싶었다. 하지만, 옛날을 살아온 엄마들은 그렇다. 무슨 일이 생기면 하나부터 열까지 큰아들에게 의견을 묻거나 상황을 보고하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

내 엄마 역시 '옛날을 살아온' 터라, 새로운 살림살이를 구입하는 것에 관해 장남인 내 의견을 물었던 것. 돈을 보태줄 것도 아닌데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렇다면 사야지"라는 건조한 대답을 돌려줬다. 짧은 통화의 말미. 엄마가 물기 젖은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크고 좋은 걸 살란다. 내 인생 마지막 냉장고인데……."

그 말이 시끌벅적한 술집에 앉아있던 마흔세 살 중년사내를 유년의 기억 속으로 데리고 갔다. 먼지 쌓인 창고 속으로 들어가 있던 영화 필름이 다시 상영될 때처럼 선명하게 떠오르는 몇몇 장면들. 우리 집 냉장고에 얽힌 것들이었다.

엄마는 작은 냉장고 하나에도 크게 행복했다

때론 활자화된 역사책처럼 빈틈없이 정확한 내 기억력이 무서울 때가 있다. 우리 식구가 살던 부산의 조그만 집에 냉장고가 처음으로 들어온 건 1979년 여름이었다. 당시 내 나이 아홉 살. 지금은 LG로 이름을 바꾼 금성사에서 만든 180리터짜리 소형 냉장고였다.

그때 엄마 나이는 서른셋. 시집 온 지 십 년이 흘러서야 사게 된 냉장고. 그건 엄마가 생애 처음으로 가져본 냉장고이기도 했다. 지금은 초등학교 4학년 딸을 가진 내 동생이 콧물을 옷에 묻히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엄마는 작은 냉장고 하나에도 크게 행복해했다.

사각얼음 띄운 콩국수를 상에 올리고, 차가운 보리차를 꺼내오며 자주 웃었다. 냉장고는 엄마의 '만능 살림 파트너'였다. 냉장고를 십분 활용해 싸구려 오렌지주스 가루를 물에 녹여 '유사 아이스크림'을 만들어주던 엄마와 그걸 하나 더 먹겠다고 다투던 나와 동생. 때로 추억은 달콤하거나 쓰다. 그게 엄마와 엮인 것일 경우에는 더 그렇다.

그건 그렇다치고, 냉장고가 없을 때 엄마는 어떻게 살림을 했을까? 살림을 해보지 않은 나는 알 수 없었다. 하긴, 3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나는 냉장고와 살림의 역학관계를 모른다. 이건 어쩔 수 없는 남자의 한계인가?

한국은 가전제품을 정말 잘 만든다. 오래 쓰고 튼튼하다. 그 금성사 냉장고는 15년을 엄마 품에서 머물다 1994년 겨울이 돼서야 우리 가족의 곁을 떠나 고물상으로 갔다. 그해 우리는 평수를 조금 넓힌 아파트로 이사했고, 엄마의 둘째 여동생, 그러니까 내 이모가 '이사를 축하한다'며 삼성에서 나온 450리터 냉장고를 엄마에게 선물했다. 냉장실과 냉동실이 이전 것보다 2배 이상 큰 것이었다.

커진 냉장고의 용량만큼 엄마의 기쁨도 커졌다. 거기에 채워 넣을 것들을 사며 엄마가 크고 환하게 웃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리고, 다시 19년의 세월이 너도 나도 모르게 쏜살처럼 흘러갔다. 그 시간 속에서 두 번째 냉장고 역시 늙어갔다. 우리 가족에겐 많은 일이 생겼다.

냉장고처럼 항상 엄마 곁에 머물 것으로 생각했던 아버지는 6년 전 지상에서 천상으로 주소를 옮겼고, 동생은 한국에서 월드컵이 열리던 2002년에 결혼해 분가했다. 나도 일찌감치 객지로 떠나왔으니 냉장고는 TV와 함께 혼자 집에 남게 된 엄마의 둘도 없는 살가운 친구였다.

그런데, 엄마가 내게 전화를 건 그날, 19년을 버텨주던 삼성 냉장고가 생을 마쳤다. 냉기를 일정하고 적절하게 유지시킬 수 없는 낡은 문짝과 냉매 순환 부실이란 치명적인 병명으로 사망선고를 받은 것이다.

난 언제가 돼야 냉장고만큼이라도 유용한 존재가 될까

일 년 전, 술집으로 내게 전화를 걸어온 그날. 엄마와의 통화가 또 어제 일처럼 또렷하다. 엄마는 신혼부부들이 혼수로 준비한다는 지펠인지, 디오스인지 하는 대형 냉장고를 사고 싶어 했다.

"혼자 살면서 그렇게 큰 걸 뭐하려고?"라는 내 물음에 엄마는 이렇게 답했다.

"내 인생 마지막 냉장고인데 좀 좋은 걸 써보고 싶어서……."

아, 엄마도 여자였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왜 갑자기 목이 콱 메어 왔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엄마의 삶이란 냉장고를 세 번 바꾸면 끝이 날 짧고도 허술한 것이었다. 우리 집을 거쳐 간 한국 냉장고 평균 수명의 전례를 감안할 때 새로 산 냉장고가 수명을 다하면 엄마는 팔십이 넘는 호호할머니가 된다.

스물셋에 가난한 아버지에게 시집 와 콩나물 값을 깎으며 아등바등 살아온 사십삼 년의 세월. 그 가팔랐고 지난했을 생을 무심하고 철없는 큰아들은 앞으로도 이해하거나 위로해줄 수 없을 게 뻔하다.

갑자기 들이닥친 그 슬픈 깨달음이 "그래. 엄마 마음 내키는 것으로 사라"는 말을 나오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엄마의 인생에 관한 내 무심과 철없음을 '그깟' 냉장고가 반성시킨 것이다.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폐일언. 앞으로도 엄마가 살아있는 동안은 지펠인지 디오스인지 하는 그 냉장고 속 갖가지 재료들로 만들어질 해장국과 찌개와 생선구이와 두부 부침과 장아찌와 각종 나물을 지금까지 그랬듯 아무런 고마움도 느끼지 못하고 나는 먹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가 베풀어 주기에 어떠한 답례도 필요 없는 그 배부른 '공짜 행복'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을까? 향후 10년 혹은, 15년? 엄마는 볼 때마다 주름살이 깊어져 눈에 띄게 늙어가고 있는데.

세 번이 바뀐 우리 집 냉장고와 여자 혹은, 엄마의 삶을 떠올렸던 그날. 흥청망청 써대는 술값을 아껴 냉장고 값을 보내줘야겠다는 허술한 약속을 스스로에게 했었다. 그러나, 그 다짐은 아직까지도 지켜지지 않고 있다. 대체 나는 언제가 돼야 엄마에게 냉장고만큼이라도 유용한 존재가 될 수 있을지. 진원지가 불분명한 슬픔 탓에 냉장고에 들어간 것처럼 가슴이 서늘해지는 늦봄이다. 엄마가 보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연꽃마을신문>에 실린 것을 수정·보완한 글입니다.



태그:#냉장고, #엄마, #여자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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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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