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아침 일찍부터 움직였다. 많은 인파가 몰려 못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면서 아버지와 나는 허겁지겁 준비를 하고 나섰다. 소주 한 병과 작은 종이컵, 어제 사둔 싱싱한 배와 노릇노릇한 생크림 빵, 어머니의 손맛이 담긴 김밥이 들어있는 종이 가방을 들고 차에 탔다.

2014년 4월 3일, 제주도의 도로는 흐드러지게 핀 벚꽃들로 까만 도로를 새하얗게 품고 있었다. 얼마나 갔을까. 오전 9시경, 풍경에 취해 한 눈 판 사이 어느새 그곳에 도착해 있었다.

오전 9시 행방불명인 표석에서 아침 9시, 제주4·3평화공원에 도착했다. 국가추념식은 10시부터 시작하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곳 행방불명인 표석에서 제를 올리고 있었다.
▲ 오전 9시 행방불명인 표석에서 아침 9시, 제주4·3평화공원에 도착했다. 국가추념식은 10시부터 시작하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곳 행방불명인 표석에서 제를 올리고 있었다.
ⓒ 이승훈

관련사진보기


소박한 제사상 수많은 표석들 사이에서 작은 할아버지의 표석을 찾았다. 제를 지내기 위해 음식을 차리고 있다.
▲ 소박한 제사상 수많은 표석들 사이에서 작은 할아버지의 표석을 찾았다. 제를 지내기 위해 음식을 차리고 있다.
ⓒ 이승훈

관련사진보기


제주4.3평화공원은 2000년 01월 12일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 제정·공표된 이래 2003년 4월 3일 제주4·3평화공원 조성 기공식을 열고, 2008년 03월 28일 개관했다. 현재 제주4·3평화공원에는 평화기념관과 영령들과 유족들을 위한 위령탑, 각명비, 위령제단, 행불인표석 등이 갖추어져 있다.

나와 아버지가 가장 먼저 발길을 옮긴 곳은, 당시 시신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던 이들을 기리는 행방불명인 표석 묘지였다. 제66주년 4·3희생자 추념식은 오전 10시부터 시작이었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도착하여 영령들을 위한 제를 올리고 있었다.

1만 5천 가량의 표석들, 오늘만큼은 그 슬픔의 무게를 벗어버린 듯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각 표석 앞에는 하얀 국화꽃들이 꽂혀있어, 마치 드넓은 묘지에 날개를 단 듯 했다. 아마 그 꽃들이 없었다면, 이곳 묘지는 슬픔의 무게로 땅 깊은 곳으로 꺼져 버렸을 것이다.

불순분자 처분하라는 상부 명령에 총살당하기도

참배 공인들의 참배 후, 유가족들의 참배가 이어졌다
▲ 참배 공인들의 참배 후, 유가족들의 참배가 이어졌다
ⓒ 이승훈

관련사진보기


'이상지' 나의 작은 할아버지 이름이다. 사건당시 나이는 20살, 제주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할아버지는 1948년 4월 3일 사건 발생 이후 학생운동을 주도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광주지방법원에서 실형을 언도 받고 인천에 있는 형무소로 끌려갔다. 그리고 곧 전쟁이 터졌고 할아버지의 생사는 아직도 불분명하다.

할아버지를 봤다는 증언이 있었지만 한국전쟁이 터지기 전이었을 뿐, 그 이후의 생사는 알 길이 없었다. 스무 살이란 불꽃같은 청년의 나이, 그의 직설적인 생각과 행동에 당시 격변기의 국가는 가차 없었다. 실형을 선고 받고 형무소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스무 살 청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제주4·3사건진상보고서(2003)에 따르면, 당시 제주4·3사건의 기점이 되었던 1947년 3월 1일로부터 1948년 4월 3일을 거쳐 1954년까지 4·3사건과 관련하여 사법부의 재판을 받고 형을 언도받은 사람들은 수천 명에 달한다고 한다. 4·3사건 관련 재판으로는 제주지방법원·광주지방법원·대구고등법원·대법원 등에서 치러진 일반재판과 미군정 당시 행해진 군정재판, 군인·군속을 대상으로 한 군법회의 등이 있었다. 또한 1948년 12월 계엄령이 내려진 시기에 민간인을 대상으로 열린 군법회의와 1949년 7월 예외적으로 국방경비법을 적용한 민간인 대상 군법회의가 있었다.

4·3사건 관련 재판을 받았던 상당수의 사람들은 벌금형·구류·집행유예 등을 언도 받았지만, 금고·징역 등의 실형을 언도 받은 사람들은 제주도에 형무소가 없었기 때문에 전국 각지 형무소에 분산 수감되었다. 이들 형무소 재소자들은 형기를 마치고 출소하기도 하였지만, 열악한 형무소 수감 환경 때문에 옥사하기도 하였고, 상당수가 1950년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불순분자를 처분하라는 상부 명령에 따라 총살당하기도 했다.

이들 형무소 재소 중 사망자들에 대해서는 희생 일시·장소·경위 등을 알 길이 없어 그 유가족들은 그들을 행방불명 희생자로 4·3사건위원회에 신고하였다.

작은 할아버지는 격변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행불인표석에 영혼만을 안치하게 된 것이다.

제(祭)는 아버지가 맡아서 지내고 있다. 언제 돌아가셨는지 모르기 때문에 할아버지의 생신 날 제를 올리고 있다. 그리고 국가추념일이 된 오늘, 그의 여한을 풀어드리기 위해 이곳 표석을 찾은 것이다.

연좌제(連坐制)

작은 할아버지(故 이상지)의 죽음은 곧 우리 가족에게 큰 슬픔이었다. 할아버지(故 이상지의 형)는 그(故이상지)를 찾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 수소문을 내었다고 한다. 그의 생사를 알 수 없었던 형은 매일 여생을 술로 지새웠다. 또 그(故이상진)의 그런 전적 때문에 우리 가족은 '연좌제'의 피해자가 되었다.

연좌제란 근대법이 확립되기 이전의 전통사회에서 가족원이나 근친 중의 누군가가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행위 당사자와 함께 그 부모·처자·형제를 비롯한 친족에게까지 형벌을 처하는 제도를 말한다.

한국사회에서 연좌제는 일제시대의 감시를 거쳐, 해방 후 남북의 체제 대립상황 속에서 신원조회를 통해 특이자를 걸러내는 사회적 관행으로서 사라지지 않고 공공연히 자행되었다.

4·3사건 당시 실형으로 구속되거나 군·경 토벌대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사법 처리를 받았다는 이유로 희생자 가족들은 연좌제에 의해 감시당하고 사회 활동에 심한 제약을 받았다.

아버지 또한 고등학교에서 대학으로 진학할 때 육군사관학교를 지원했지만 연합고사와 본고사에 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원조회로 최종 합격자 명단에서 제외되는 수모를 겪었다. 또한 국·공기업인 한국전력 회사를 지원했지만 수차례 떨어졌다. 그 후 공인감정평가사를 준비하던 와중에 연좌제 폐지(1981년 3월 24일) 지침을 듣고, 다시 한 번 한전에 지원하여 늦깎이 나이로 입사하게 되었다. 당시 아버지처럼 연좌제 피해로 고통 받은 이들의 유형은 공기업이나 사관학교 지원 이외에도 다양했다.

2000년 8월 13일 '제주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가 4·3 유가족 75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한 결과, 86%가 연좌제 피해를 겪었다고 응답했으며, 그 피해사례는 위와 같았다(복수응답). 사관학교 입학시험에서 피해를 봤다는 유가족이 23%에 해당하며 국·공기업 취직이나 승진에 연좌제로 피해를 받았다는 이들도 18%나 있었다. 또한 일상생활에서 감시나 각종 신원조회 사례도 빈번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가세가 기울어 육사 이외에는 서울의 여느 대학생활의 꿈을 꿀 수 없었던 아버지는 제주도에 있는 대학(전액 무료 장학금을 제의해준 곳)에서 대학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로써 육사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이런 좌절 속에서 희망을 찾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젊은 날 아버지의 모습을 저절로 상상하게 된다. (그런 슬픔을 간직했기에 아버지는 지금의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아낌없는 응원을 보내줄 수 있게 된 것 아닐까)

격세지감(隔世之感), '4·3희생자 추념일'이 되다

정치인들의 참석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 안철수 대표와 김한길 대표가 위령제단에서 참배 후 자리를 옮기고 있다.
▲ 정치인들의 참석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 안철수 대표와 김한길 대표가 위령제단에서 참배 후 자리를 옮기고 있다.
ⓒ 이승훈

관련사진보기


연좌제로 고통 받던 시절이 불과 30년 전 이야기이라니, 얼어붙은 사회를 경험하지 못한 우리세대로서는 정말 상상하기 어려운 이야기이다. 만약 지금의 내가 연좌제로 인해 하고자 하는 일들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면, 어떤 절망 속에서 살아가게 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다.

아버지 시대에는 '4·3 사건'을 발언하는 것만으로도 지탄과 위협을 받았지만, 이제는 대통령령에 따른 국가 추념일로 지정 공포하기에 이르렀다(국가 추념일로 지정된 것은 박근혜대통령의 지난 대선공약 중 하나였다. 하지만 국가 추념일이 되기까지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거친 민주당의 노력이 없었다면 절대 이룰 수 없는 제주의 숙원이었다. 결과뿐만 아니라 과정도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이로써 국가 격변기 희생자들의 유가족들의 시름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게 되어 정말 다행스럽다. (또한 이러한 변화에 맞춰 오늘은 많은 인사들이 이곳을 찾아 주었다. 비록 박근혜대통령의 불참으로 국무총리가 그 자리를 대신한 아쉬움이 있었지만, 오늘을 밝혀준 이들에게 4·3사건의 유가족으로서 감사의 말을 드리고 싶다.)

끝나지 않은 이데올로기 대립, 화해와 상생으로

사람, 태극기, 벚꽃  4.3희생자추념식 날, 꽃이 핀 4.3평화공원을 가족과 함께 찾았다.
▲ 사람, 태극기, 벚꽃 4.3희생자추념식 날, 꽃이 핀 4.3평화공원을 가족과 함께 찾았다.
ⓒ 이승훈

관련사진보기


지난달 3월 20일 오후 2시 30분경, 제주4·3평화공원 앞에서 '4·3사건바로잡기대책회의'라는 보수단체가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는 소식이 <헤드라인 제주> 21일 자에 실렸다. 이때 허수아비와 모조 위패를 태우는 화형을 하는 등 도가 지나친 시위로 유족들의 마음을 무너뜨렸다.

또한 교학사의 4·3사건을 다룬 내용도 '유족회'의 분노를 낳았다. 교학사의 서술은 '4월3일 남로당 주도로 총선거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켜 경찰서와 공공기관을 습격했다. 이때 많은 경찰들과 우익인사들이 살해당했다.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서는 무고한 양민의 희생도 초래됐다'라고 남로당의 무장봉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는 마치 무고한 양민들이 대거 사살된 것이 수습과정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일이기에 당시의 과오를 덮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유가족의 슬픔도 역사의 슬픔도 더욱 가중되는 일의 반복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한 쪽에서 사건의 진상을 해결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하여도 다른 한쪽에서 회방을 놓는다면 갈등을 해결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두 세력의 화합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 2013년 08월 02일 4.3희생자유족회(회장 정문현)와 제주도재향경우회(회장 현창하)가 제주도의회 도민의 방에서 만나 '화해와 상생으로 제주발전에 동참하겠다'라고 선언 한 일이 있었다. 비록 4.3보고서에 대해 어느 정도 시각차가 존재 했지만 이런 만남은 정말 뜻 깊은 일이 아니겠는가. 앞으로도 이와 같은 상생과 화합이 사회 곳곳에서 이루어지길 염원하며, 태극기와 사람, 벚꽃이 만개한 평화공원의 풍경을 바라본다.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