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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한마디만 하지, 설리반. 내가 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줄 아나? 내 연봉이 왜 높은지 말해줄까? 딱 한 가지 이유 때문이지. 일주일, 한 달, 일 년 후 상황을 예측하기 때문이야. 그게 다야. 별거 없어. (중략) 이 바닥에서 살아남으려면 첫째가 되거나, 영리해지거나, 사기를 쳐야 해."

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 하루 전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마진 콜: 24시간, 조작된 진실> (Margin Call)에 나오는 대사 일부분이다.

돈의 거품을 만들어 승승장구하던 금융회사는 막다른 위기에 몰리자 파생 상품을 매각하기로 결정한다. 구매자나 국민들의 피해에 대한 고려는 티끌만큼도 없었다. 그 결과 CEO를 위시한 임원들은 상상도 못할 정도의 스톡옵션을 거머쥐었지만, 휴지 조각이나 다름없는 파생상품을 산 구매자들은 하루아침에 거리에 나앉았다. 국가는 부도의 위기에 내몰렸고 무려 3000만 명이 파산했다.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가 발생하기 직전까지 미국 월가는 거품으로 만든 돈으로 흥청거렸다. 수천, 수억 달러의 연봉도 모자라 스톡옵션까지 받은 금융가 CEO들은 출퇴근용 헬기를 구매하고 한끼 밥값으로 수백만 원을 지불했다. 국가의 통제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월가의 탐욕은 국민들에게 출세의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첫째가 되고자 영리한 인재들을 모아 전 국민을 상대로 사기를 쳤던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 통제를 망각한 정부와 도덕적 해이에 빠진 기업가들의 부조리가 만나 나온 결과였다.

IMF 외환위기 후 17년... 상황은 더 안 좋다

SK 그룹 계열사 자금 수백억 원을 빼돌린 혐의로 기소된 최태원 SK 그룹 회장이 31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1심 선고 공판을 받기 위해 법정으로 들어서고 있다. 이날 선고공판에서 최 회장은 징역 4년을 선고받아 법정구속됐다.
▲ 최태원 SK회장 '법정구속' SK 그룹 계열사 자금 수백억 원을 빼돌린 혐의로 기소된 최태원 SK 그룹 회장이 31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1심 선고 공판을 받기 위해 법정으로 들어서고 있다. 이날 선고공판에서 최 회장은 징역 4년을 선고받아 법정구속됐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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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같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 1997년 IMF 사태는 정권의 무능과 기업의 무분별한 확장이 불러온 재앙이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길거리로 내몰렸고, 국가 신용도는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그러나 국가와 자본은 스스로 뼈를 깎는 모습을 보이기는커녕 국민들의 애국심에 호소하며 호주머니를 털어달라고 강요 아닌 강요를 했다.

많은 이들이 갓난아기의 손가락에 끼워졌던 돌 반지를 내놓았고, 몸 담았던 회사를 떠나야만 했던 사람들은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자기를 냉혹하게 내친 회사의 번영을 당부하며 울었다. 방송과 신문들은 무능한 정치인과 관료, 탐욕스러운 자본에게 책임을 묻기보다 공적자금을 퍼부어서라도 기업을 살려내는 게 먼저라고 입을 모았다. 이렇게 해서 IMF 관리 체제는 전 세계가 놀랄 정도로 빠르게 수습되었다. 하지만 당시 파산한 일부 기업을 제외한 대다수의 재벌과 대기업들은 문어발식 확장을 더 가속화하며 고용 없는 성장, 투자 없는 현금 쌓기를 지속해왔다.

IMF 외환위기 이후 정권이 네 번이나 바뀌면서 17년이 흘렀다. 대기업과 재벌들은 갈수록 비대해졌고 매출과 이익은 해를 거듭하며 기록을 갱신했다. 그러나 국민들의 살림살이는 나아지지 않았다. 세계화 광풍, FTA 협상, 친기업 정책 등... 역대 정권들은 국민들이 잘 살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될 산이라고 강변했지만, 지나고 보니 대기업과 재벌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준 정책일 뿐이었다. 돈은 대기업과 재벌의 곳간에 모였고, 빚더미에 앉는 국민들은 늘어만 갔다.

대기업 CEO와 임원들의 연봉 뒤에 감춰진 위험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탓일까. 이후 정부 등은 노골적으로 국민들의 희생을 강요했다. FTA를 체결했단 소식에 우려의 목소리를 내면, '자동차 한 대 팔면 얼마나 남는데 그까짓 농사가 대수냐'고 다그쳤다.

정부가 나서서 임의로 고환율 정책을 펼쳐 수출 대기업에 막대한 이익을 안겨줬으며 기업 경쟁력을 강화한다는 이유로 정규직 노동자를 값싼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로 만들었다.  또 기름값 낮추라는 국민들의 요구에 대기업에게 주유소의 신설을 허용하고 폭등하는 전기 요금 문제를 대기업 발전소 유치로 해결하겠다고 했다. 부의 증식과 가난의 악순환은 권력과 자본의 결탁에서 나온 필연적 현상이었다.

대기업 CEO와 임원들의 연봉이 연일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다. 수십, 수백억 원에 이르는 CEO의 연봉 또는 배당금은 서민들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금액이다. 숫자만 듣고도 입이 떡 벌어질 만큼. 특히 대한민국 평균소득의 절반도 벌지 못하는 서민들에게는 그야말로 '넘사벽(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 수준이다.

그러나 그들이 수십, 수백억 원의 연봉을 받는다는 걸 마냥 부러워만 하는 것으로 끝내면 안 된다. 99% 국민들이 꿈꿀 수 없는 대기업 CEO와 임원들의 연봉 이면에는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우리사회를 붕괴시킬 수도 있는 위험이 내재돼 있다.

조세포탈과 횡령 등의 혐의로 254억 원의 벌금을 내야했던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에게 법원이 일당 5억 원의 노역형을 허락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우리는 형편없이 기울어진 운동장에 살고 있다.

교도소에서도 일당 5억 원의 삶을 살고 중대한 범죄를 지어 회사와 투자자, 국가에 해악을 끼치고도 301억 원의 연봉을 챙길 수 있는 대한민국에서 법의 존엄과 평등은 공허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자본과 권력의 카르텔을 위해 움직이는 국가와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 언론 등 어떤 세력도 자본의 감시자가 될 수 없는 대한민국의 현실. 이것이 2014년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가 직면한 가장 큰 위험이다.

'경제의 훈풍'이 분다는 정부, 위태로워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달 10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달 10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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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기준 1인당 국민소득은 2만 6000달러지만, 국민 절반은 평균에도 못 미치는 삶을 살고 있다. 청년 노동자가 시간당 5210원의 최저임금을 받으며 값싼 노동으로 이 사회의 바닥을 지탱할 때, 최태원 SK 회장은 수감생활로 11개월이나 자리를 비웠는데도 301억 5000만 원이란 연봉을 받았다. 청년노동자와 최 회장의 수당을 비교하려 했지만, 눈앞에 드러날 비참한 현실이 두려워 차마 계산기를 누르지 못했다. 최태원 회장의 '노동'에는 금테라도 두른 것일까.

그래서 99%를 가진 1%와 1%를 가진 99%가 만들어 내는 대한민국 평균소득은 사실이 아니다. 왜곡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정부는 기울어진 사회를 바로잡을 생각은 하지 않고 2017년까지 1인당 국민소득을 4만 달러로 끌어올리겠다고 선언했다.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외면한 채 실적 보여주기에만 목을 매다는 정부의 외눈박이 경제정책은 국민들을 시름하게 만드는 주범이자, 우리 경제의 또 다른 위험이다.

이미 가계부채는 1000조를 넘었고 가계와 기업, 정부의 부채 총합은 우리나라 경제규모의 3배에 달한다는 통계도 나왔다. 시쳇말로 한 번에 훅 간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다. 대기업 CEO와 임원들의 수십, 수백 억에 달하는 연봉잔치는 끝나가는 파티의 마지막 장면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두렵다. 파티가 끝나면 청구될 계산서에는 얼마가 찍혀 있을까. 나는, 우리는, 내 가정은, 내가 다니는 회사는, 공기업은, 국가는, 그 청구서에 찍혀 있는 숫자를 감당할 수 있을까?

곳곳에선 IMF 때보다 더 힘들다는 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꽁꽁 얼어붙은 서민 경제는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정부는 '경제의 훈풍'이 분다고 자화자찬이다. 또 한편에선 경제를 위해서 '암 덩어리'인 규제를 풀어야 한다며 위태롭게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규제를 풀 때가 아니다. 수십, 수백억의 연봉을 받는 CEO들의 탐욕을 견제할 수 있도록 규제를 강화할 때다.

1인당 국민소득을 4만 달러로 올리겠다는 목표를 세우는 것보다 중요한 건 2만6000달러가 진정한 국민소득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자본과 권력의 카르텔의 악순환을 끊겠다던 대통령의 약속이 더 이상 미뤄져서는 안 되는 이유다. 6년 전 기세등등하다가 한방에 훅~ 가버린 미국의 일그러진 얼굴을 잊어선 안 된다.


태그:#대기업 임원 연봉, #경제 민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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