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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손에 포승줄을 한 채 밝은 미소를 짓는 김근태
 양손에 포승줄을 한 채 밝은 미소를 짓는 김근태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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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근 민주당 의원은 늘 그렇듯 '남편' 대신 '김근태 의장'이라고 불렀다.

"마치 김근태 의장이 빨간 오랏줄에 묶여서 그 자리(피고인석)에 앉아 있는 것 같네요. 28년이나 지났지만 그때 재판 과정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3일 오후 서울고등법원 형사2부(부장판사 김용빈) 심리로 고 김근태 민주당 의원의 국가보안법사건 재심 첫 공판이 열렸다. 김 의원은 1985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회(민청련) 의장으로 활동하던 중 치안본부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됐다. 고문기술자 이근안씨 등 수사관들은 구속영장 없이 그를 20여 일 동안 조사하며 모진 고문을 가했다. 이후 국보법 위반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진 김 의원은 1986년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이 확정됐다.

▲ 조화 놓인 고 김근태 의원 고문 조사실 입구 1985년 당시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이었던 고 김근태 의원이 '고문기술자' 이근안으로부터 살인적인 물고문, 전기고문 등을 받았던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 515호 조사실 앞에 조화가 놓여 있다(2012.1. 14.)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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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수사관들이 그를 폭행한 혐의(특정범죄 가중처벌법상 독직폭행 등)로 1993년 기소돼 유죄확정 판결을 받았다. 그로부터 20년 가까이 지난 뒤에야 재심이 열린 이유는 김근태 의원 본인이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 의원은 "숱한 세월 감옥생활을 하는 등 민주화운동과정에서 고난을 받았지만 국민이 자신을 선택해줬으니 구태여 이런 재판을 다시 할 필요가 없다더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의 몸은 여전히 과거로 고통 받고 있었다. 고문 후유증으로 파킨슨병을 얻은 김 의원은 2011년 12월 64세로 세상을 떴다. 인재근 의원은 이듬해 10월 유족 자격으로 재심을 청구했다. 그는 3일 "(고문 등) 그 고난의 과정이 김 의장을 아주 젊은 나이에 돌아가시게 한 원인"이라며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고 말했다.

 독재에 항거했던 고 김근태 전의원
 독재에 항거했던 고 김근태 전의원
ⓒ 김근태 추모 페이지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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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은 기존 재판에 제출한 자료 말고는 추가로 제출할 증거가 없으니 증거조사가 불필요하다고 했다. 반면 변호인들은 김 전 의장의 민청련 활동이 이적성을 띠었고 이적표현물을 소지했다는 부분 등도 확실하게 무죄로 판단 받을 수 있도록 증인 신문 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양쪽 의견을 검토한 끝에 5월 1일 공판에서 추가 증거조사와 검사의 구형, 변호인의 최후변론까지 진행하기로 했다.

공교롭게도 재심 첫 공판일은 김근태 의원과 그를 고문한 이근안씨 모두 수감생활을 한 서울 영등포교도소가 철거 전 마지막으로 내부를 공개하는 날이었다. 인재근 의원은 "(김 의원이) 그곳에 오래 있진 않았지만 잊을 수가 없다"고 얘기했다. 그는 "교도소가 아파트와 인접해 있어서 면회를 못한 때에는 아파트 담벼락에서 '김근태'라고 부르며 '늦어서 면회를 못간다'고 소리쳤다, 그럼 안에서 '알았다'고 대답했다"며 옛 기억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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