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많은 연인들이 거니는 곳, 유명 가수의 노래 제목에도 등장하는 곳, 서울 중심의 이곳, 그래서인지 외국인들이 찾는 유명 장소 중의 한 곳. 그리고 500일이 훌쩍 넘도록 생존의 목소리를, 살고자 하는 외침들을 차곡히 쌓아가고 있는 곳. 바로 광화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지하철역 한 곳에서 지난 2012년 8월부터 우리는 농성을 하고 있다. 벌써 두 번째 봄을 맞고 있다.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 폐지를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을 하면서. 어느덧 10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우리의 운동을 함께 만들어주고 있다.

물론, 한쪽 벽면을 꽉 채운 영정 사진들에 불편해 하는 사람들도 있고, 출퇴근 시간에 다른 지하철역에선 볼 수 없는 이상한 광경을 매번 지켜보기 힘든 사람들도 있고, 서명을 해달라는 요청에 굉장히 귀찮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봄여름가을겨울 하루도 빠짐없이 24시간 농성장을 지켜야 했다. 어떤 이들에게 우리의 존재가 불편하고, 힘들고, 귀찮을 수 있지만, 우리는 이곳에 있다. 계속 있어야만 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

가난한 사람들과 장애인들에게 주어지는 사회적 기준과 잣대들

최근이라고 하기에는 굉장히 틀린 말이지만, 그래도 언론이나 많은 학자들은 최근이라고 많이들 표현한다. '최근' 사람들이 죽는다. 흔히들 말하는 '죽을 때'가 되어 죽는 것이 아니다. 이상하게 자꾸만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게다가 너무나 가난한 사람들이 그렇게 세상을 떠나고 있다. '최근에'.

돈을 벌고 싶어도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일자리가 없다. 돈을 벌어도 월세를 내고, 밥을 겨우 먹고, 차비를 하고 나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아파도 병원에 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정말 최소한으로 살아가고 있다. 빚이 없으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있다고 하는 복지제도를 통해 수급자가 되고 싶어도, 부모가 또는 자식이 있어서 될 수 없다고 한다. 부모나 자식 모두 넉넉지 않은 생활임에도 서로를 부양해야만 한다는 것은 누가 정해 놓았을까? 혼자 벌어 혼자 살기에도 너무나 빠듯한 생활인데 자꾸만 가족에게 부양을 떠넘겨버리면, 결국 누군가는 불효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고, 또 어떤 누군가는 부모 노릇을 잘못하고 있는 것이 되어 버린다. 누가, 어떤 부모 자식이 서로에게 부담이 되고 싶을까?

너무 가혹하지만, 이것이 바로 한국 사회의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다. 그래서 믿어지지 않고, 믿기 싫은 일이 일어난다. 가난 때문에,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가난을 조금 도와주겠다는 제도 때문에 사람들이 자꾸만 세상을 떠나고 있다.

가족에게 부양의 의무 떠넘기고 외면하는 국가

또 사람들이 죽어간다. 장애등급이 너무 낮게 나오면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장애등급 받는 과정 자체가 너무 괴로워서, 그래서 장애인이라는 그것 자체가 싫어서 세상을 떠나간다.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사고들을 피할 수 없어서 죽어간다.

한국에서는 장애인에게 등급을 매기고 그것에 따라 모든 제도적 지원을 제공한다. 1등급, 2등급, 3등급... 우유나 고기 등에 등급을 매기기도 하고, 수질을 따질 때도 등급을 매긴다. 1등급이면 흔히 좋은 등급이다. 우유나 고기, 물의 질이 좋은 것이다. 장애인에게 1등급은 중증을 뜻하고, 1등급에 가까울수록 제도적 지원을 더욱 많이 받을 수 있다. 우리는 그냥 '몇 등급의 장애인'일 뿐이다. 당연히 이렇게 하는 것이 아무렇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장애등급 때문에 사람이 세상을 떠나고 있다. 당연하게(?) 보이는 것이 오로지 장애인에게만 적용되고 있으며, 게다가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에 의해 6개의 등급으로 나누어진다. 그런데 실제로 장애인의 삶에 이 등급이라는 것이 정확히 맞아 떨어지지도 않고,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도 않다. 그냥 단지 제도적인 지원을 위한 효율적인 관리 때문에 '몇 급의 장애인'으로 나누고 있는 것이다. 장애인은 이 사회에서 사람이기 보다 그냥 등급으로 존재할 뿐이다. 이것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말이다.

장애인을 '몇 등급'으로 존재하게 하는 장애등급제

가난한 사람들과 장애인들에게 주어지는 사회적 기준과 잣대들, 그리고 이들이 제도적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더욱 가난해져야 하고, 더욱 중증으로 판정 받아야 하고, 그러다가 지쳐 스러지고, 결국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는... 이러한 현실이 있는데도, 정부는 '부정수급'을 운운하며 가난한 사람들 중에 덜 가난한 사람들을 그리고 장애인 중에서도 덜 중증의 장애인들을 구분해낸다.

이런 비극이 어디 있을까?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은 최근에만 들려온 것은 아니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농성장이 만들어지기 전, 한참 전에도 들려온 이야기다. 그러니까 가난한 사람들과 장애인의 삶은 최근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또는 원치 않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그런 상황들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현실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모습이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죽음은 너무나 아프다. 또 같은 소식을 들을까 겁도 난다. 그래서 이들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이니까. 말을 하지 않고, 드러내지 않는다고 현실이 지워지지는 않는다. 이것을 알기에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바꿔내려고 광화문 지하보도에서 누군가에게는 불편하고, 힘들고, 귀찮은 모습이지만 계속 그 자리를 지켜내고 있다. 계속 그렇게 현실을 알려내고 움직이고 있다.

누군가는 너무 먼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하지만, 지금껏 먼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바꾼 적은 없다. 현실을 말하지 않고서 현실을 바꿀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지금의 문제들을 바꾸려 노력할 것이고, 먼 미래를 바라보며 그 날을 만들어가려고 한다.

더 가난해지고, 더 중증이 되어야 하는 제도들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공동행동이 '3회 천주교인권위원회 이돈명인권상'을 수상하였다.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공동행동이 '3회 천주교인권위원회 이돈명인권상'을 수상하였다.
ⓒ 천주교인권위원회

관련사진보기


어느새 광화문역에 터줏대감이 되어버린 농성장. 힘든 상황도 있었지만 그 속에서 잘 버텨왔다는 것 자체가 좋은 일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씁쓸한 한국 사회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기도 한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현재 가장 낮은 곳의 목소리들이 퍼져 나오는, 그리고 정부를 상대로, 국가를 상대로, 자본을 상대로 싸우는 이들의 힘이 모이고 있는 그런 공간이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인지 얼마 전에는 '3회 천주교인권위원회 이돈명 인권상'의 수상단체가 되었다. 매일 힘을 합쳐 농성장을 사수하는 이들, 광화문 주변에서 저 멀리에서 함께 투쟁하는 이들, 농성장에서 함께하다 세상을 떠난 이들이 함께 만들어온 활동을 지지해주고, 앞으로 더 열심히 하라는 의미인 것 같다.

이 투쟁이 언제가 끝이 될지 분명히 아는 사람은 한명도 없지만, 장애인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삶과 목소리가 차별받지 않기 위해 2014년에도 모두가 매일매일 이곳을 사수하기로 결심한 것이 '언제가 끝일까?'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대답일 듯하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저기 주저앉고 구멍 난 천막을 걷어내고 조금 더 튼튼한 집을 지었다. 새로 지은 농성장처럼, 그만큼 우리의 투쟁도 더욱 단단해지도록. 또 매일 그렇게 농성장을 지키며, 서명하고 가시라며 외치고 말을 건네는 것이 앞으로 우리에게 맡겨진 몫이 아닐까 싶다. 오늘도 그렇게 우리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광화문 지하보도에서.

덧붙이는 글 | 양유진님은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공동행동 활동가입니다. 이 글은 천주교인권위원회 월간 소식지 <교회와 인권>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장애등급제, #부양의무제, #장애인, #빈곤, #광화문 농성장
댓글

홈페이지 : cathrights.or.kr 주소 : 서울시 중구 명동길80 (명동2가 1-19) (우)04537 전화 : 02-777-0641 팩스 : 02-775-6267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