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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 차례 북한 여행을 다녀온 뒤 내게는 북한에 두고 온 수양딸과 수양조카가 생겼다. 피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정을 나눈 그들이 다시 보고 싶어서, 더 많은 북한 동포들과 소통하고 싶어서 올해도 다시 북한에 다녀왔다. 2013년 8월 15일부터 8월 26일까지 한 차례 그리고 9월 4일부터 13일까지 또 한 차례 북한을 여행했다. 새 연재 '재미동포 아줌마, 또 북한에 가다'를 통해 북한 동포들의 지금과 북한의 여러 명소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 기자말

열흘간 우리를 위해 수고를 해준 고려호텔 식당 웨이트리스.
 열흘간 우리를 위해 수고를 해준 고려호텔 식당 웨이트리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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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일어나 식당으로 향했다. 그동안 우리에게 온갖 정성을 다해 식사를 챙겨준 웨이트리스가 반갑게 맞아준다.

"오늘은 오데를 가시길래 이렇게 일찍이 아침을 드시나요? 가실 때가 됐다 싶은데 혹시 미국으로 돌아가시나요?"
"아니오, 서울에 가요. 시어머님, 친정어머님 모두 서울에 사시는데 찾아뵙고 인사드린 뒤 열흘 정도 있다가 다시 평양으로 올 거예요."

"서울이요? 남조선 서울 말입니까?"
"네."
"야아! 두 분께서는 정말 통일된 조국에서 사시누만요. 긴데 여기서 서울은 오떻게 가시나요?"

"일단 베이징으로 가 그곳에서 인천으로 가는 비행기로 갈아탑니다. 인천에 국제공항이 있는데, 그곳에서 서울까지는 이곳 순안공항에서 평양까지 거리와 비슷하지 않나 싶네요."
"아! 조국이 갈라져 있지만 않으면 버스를 타고 가도 되는데…. 참 안타깝습니다."

"저희도 평양에 올 때마다 똑같은 생각을 해요."
"어서 조국이 통일되어야 할 텐데…. 한 5, 6년 전 까지만 해도 남조선에서 많은 동포들이 왔었습니다. 한때는 이곳 고려호텔·양각도 호텔이 모두 남조선 동포들로 꽉 찼었드랬습니다. 야아, 정말이지 그때는 곧 통일이 되는 줄 알았어요."

"곧 그럴 날이 다시 오겠지요. 그동안 수고 많으셨어요. 저희만을 위해 특별히 반찬도 준비해주시고. 대동강 숭어조림·젓갈·북어채무침·깍두기…. 일일이 나열할 수가 없네요. 정말 고마웠습니다."
"서울에 잘 다녀 오시라요."

식사를 마친 우리는 열흘 뒤 다시 만나자는 인사를 나누고 로비로 내려왔다.

분단의 무거운 짐을 짊어진 사람들

평양의 2층 버스
 평양의 2층 버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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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교하는 중학생들
 등교하는 중학생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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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 평양 시민들
 출근길 평양 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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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둘째 수양딸 설향이 그리고 영길 아우와 함께 차에 올라 공항으로 향한다. 시내는 출근하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정류장에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차를 기다린다. 전기버스는 사람들로 만원이다. 예전 학창시절 시내버스를 보던 바로 그 느낌이다.

사람들의 옷이 제각각이다. 인민복, 양복, 한복, 각종 교복, 군복, 작업복, 체육복 등 참으로 다양하다. 여러 형태의 복장을 보고 있자니 북한이라는 사회가 한 눈에 보이는 듯하다. 평화로운 하루의 일과가 시작된다. 일상적인 걸음걸이다. 다만, 모두가 분단의 무거운 짐을 양 어깨에 메고 버겁게 걸어갈 뿐이다. 설향이는 벌써 눈물을 글썽인다. 그리고 어렵사리 말을 꺼낸다.

"오마니, 지난 열흘간 정말 행복했습니다. 외국인 관광 안내원을 시작한 뒤 처음으로 외국 사람이 아닌 우리 동포를 안내했어요. 함께 지내는 내내 '민족이란, 동포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그랬구나, 고마워. 말할 것도 없지. 여러 나라를 여행해 보았지만 나도 똑같이 그렇게 느껴. 여기에 올 때마다 그런 마음은 점점 더 커져만 가. 설향아, 잘 있어. 너무 무리하지 말구. 우리가 떠나면 며칠 쉬니?"

"지금은 바쁜 때라 쉴 새가 없습니다. 하루 집에 가서 오마니 해주시는 밥 먹으면 다음날 유럽 관광객들을 맞습니다."
"어머, 얘, 그러다가 건강이라도 해치면 어쩌려고 그래. 니네 회사 간부 리정 선생한테 얘기해, 그만 좀 부려 먹으라고."

"오마니, 일 없습니다. 조국을 알리는 일인데 아무것도 아닙니다. 대신 겨울에 충분히 휴식합니다. 오마니나 서울에 잘 다녀 오시라요."
"그래, 고마워."

우리 모두 '분단의 슬픔'을 가슴에 안고, '분단의 무거운 짐'을 등에 진 채 힘겨운 발걸음을 하나하나 옮겨간다.

이별의 순안공항, 눈물은 안 흘리려 했지만

순안공항 임시 청사 앞에서 둘째 수양딸 설향이와 함께
 순안공항 임시 청사 앞에서 둘째 수양딸 설향이와 함께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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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출국 수속을 마치고 탑승을 위해 대기하고 있는데도 모두들 돌아가지 않는다. 출입국 심사대 너머 멀리 설향이와 영길이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인다. 서로가 눈이 마주쳤다 싶으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흔든다. 탑승시간이 1시간이나 남았는데 설향이와 영길이는 그 자리, 그대로 서 있다. 그들을 돌려 보내기 위해 남편과 나는 구석진 곳을 찾아 몸을 숨겼다.

오늘 출국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북한 주민들로 보인다. 옆 사람에게 물으니 "사업 때문에 베이징에 간다"라고 하고, 또 다른 사람은 "직장이 중국에 있다"라고 한다. 한쪽에서는 탑승을 기다리는 한 북한 주민이 입구 쪽을 향해 "어서들 가라우"라는 혼잣말과 함께 손을 저어 보인다.

남편은 리정 선생으로부터 받은 책 <임나일본부 해부>를 펼쳐 들고는 여기저기 뒤적인다. 성격 급한 남편은 결론부터 보려고 책의 뒷부분을 만지작거린다. 책의 저자는 '임나일본부는 한반도가 아닌 일본에 있었다'고 밝혔단다.

더이상 순안공항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고 그렇게 다짐했건만…. 탑승이 시작돼 비행기 트랩에 올라서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조국의 남쪽에서

통일부 다큐멘터리 촬영 당시
 통일부 다큐멘터리 촬영 당시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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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공항에서 중국 입국수속을 마친 우리는 곧장 대한항공 카운터로 가 탑승 수속을 밟고 인천행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 안. 또 다른 조국의 모습이 보인다. 중국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여행객들을 보니 조국의 남과 북이 너무나도 대조된다. 언젠가 북한의 동포들도 단체로 해외여행을 다니게 될 그런 날이 올 것을 간절한 마음으로 소망해본다.

서울에서는 언론과의 인터뷰·강연 등이 예정돼 있다. 특히 그중에서도 가장 내가 기뻐한 일정은 통일부에서 하는 다큐멘터리 촬영이다. 제목은 '서울-평양의 타임머신, 세 여인'이다. 통일부의 이 홍보 영상물이 부디 민족의 화합과 조국의 통일에 조금이나마 기여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한여름 뙤약볕 아래 땀을 줄줄 흘리면서 여러 시간에 걸쳐 촬영에 임했다(통일부 동영상 보러 가기).

서울에서 오랜만에 친구들도 만난다. 내가 남과 북을 넘나드니 자연히 대화의 주제가 민족 그리고 통일이다. 북한에서도 그곳 동포들과 통일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북한의 동포들과 통일 이야기를 할 때는 주어가 '우리'인 반면, 한국의 친구들과 통일에 대해 얘기를 나눌 때는 통일의 주어가 '주변 4대국'이라는 점이다.

그저 북한 관광을 하고 기행기를 썼을 뿐인데 많은 사람들이 강연장을 찾아준다. 한 강연장에서는 어떤 화가 선생님으로부터 손수 그려주신 그림을 선물로 받았다. 연재 기사에 담긴 사진을 한 폭의 동양화로 담아주셨다. 나의 첫째 평양 수양딸 설경이와 처음 만나 다정히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고 있다.

강연장에서 선물로 받은 그림(왼쪽이 평양의 첫째 수양딸 설경이 그리고 오른쪽이 나)
 강연장에서 선물로 받은 그림(왼쪽이 평양의 첫째 수양딸 설경이 그리고 오른쪽이 나)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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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강연을 할 때마다 여지없이 찾아 오시는 분들이 계시다. 바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감옥살이를 하신 분들이다. 내가 처음 이분들을 만났을 때 나는 '왜 이분들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할까' 의아해했다. "혹시 이분들은 진짜 '빨갱이'들이고, 북한을 들락날락하는 내게 '동지애'를 느껴서 나를 만나고 싶어하는 걸까"라고 말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분들은 공산주의나 북한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중 한 분은 대표적인 조작사건 중 하나인 '아람회' 사건으로 온갖 고초를 겪으신 분이다. 그분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1980년 5월 봄이었어요. 성당에서 봄 야외 미사로 인근 무주에 갔었습니다. 일종의 봄 소풍인 셈이죠. 미사 중 강론 시간에 본당 신부님께서 친구 신부님 한 분을 소개하시더군요. 전주에서 오신 신부님이었습니다. 전주 신부님께서  마이크를 잡으시고는 '제가 광주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엄청난 사실을 목격하고 왔습니다'라고 하시며 당시 광주항쟁 목격담을 말씀하셨어요.

야외 미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한 뒤 성당 모임에 일찍 갔었습니다. 회합실 탁자 위에 놓인 두툼한 성경책을 별 뜻 없이 펼쳐보니 8절지 크기 등사 유인물이 있더군요. 서두에 '전두환 광주 살육작전'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낮에 전주 신부님으로부터 들었던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몸을 부들부들 떨며 본능적으로 유인물을 주머니에 넣고서 회합도 참석치 않고 돌아와야 했습니다. 유인물 맨 마지막에 적힌, '이 유인물을 주우신 분은 신문이나 방송이 사실을 알리지 않고 있으니 주변에 알려 달라'는 간절한 글귀를 모른 채 지워 버릴 수가 없었던 거죠. 그래서 400여 장을 새로 인쇄해 동창(후일 고문 조작된 '아람회원')들과 당시 계엄하의 삼엄함을 뚫고 서울·대전 등 여러 지역의 지인들과 시민들에게 암암리 배포하게 됐던 겁니다.

이 일과 함께 그로부터 약 1년 뒤 1981년 5월 친구 김난수(당시 육군대위)의 딸 아람이의 백일잔치에 모였던 것을 꼬투리 잡아 국가보안법 위반을 일삼은 '아람회'가 고문 조작에 의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소위 반국가단체 및 이적단체가 된 것이죠. 공안당국은 저희를 국가보안법으로 처벌을 하려고 저희를 북한과 연계시켰어요. 심지어는 온갖 고문을 가하며 북한 노래를 불러보라는 거예요. 근데 제가 북한 노래를 알 턱이 있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불렀지요, 뭐."
"아시는 북한 노래가 있으셨어요?"
"제가 북한노래를 어떻게 압니까. 하도 고문을 못 견뎌 그냥 만들어 불렀지요. '압록강아~ 두만강아~' 하면서 말이에요."
"아니, 즉흥적으로 작사 작곡을 해서 불렀단 말씀이세요?"
"네…."

"재판정에서 판사님께 말씀드리시지 그랬어요."
"그러고 싶어도 재판정 뒤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수사관들을 보면 입도 뻥긋할 수 없었답니다. 진실을 말했다가 또 지하실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는 건 아닌지 무서웠어요. 참으로 절망적이었지요. 판사님께서 '고문 때문에 허위자백을 하지 않았느냐'라고 물어봐 줬으면 좋겠다고 바랐지만, 어느 판사님도 묻지 않으시더군요. 하기야 그렇게 물었어도 '그렇지 않다'고 답했을 거예요. 무슨 배짱으로 '그렇다'고 말하겠습니까. 고문으로 인해 돌아가신 분도 계십니다. 당시 재판관님들이 후일 모두 대통령 후보로 나선 분들이랍니다.

이 모든 것이 분단 때문입니다. 분단이 해결되지 않으면 이런 일은 중단되지 않고 계속될 겁니다. 신 선생님께서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남과 북을 오가는 모습이 무척 고마워 이렇게 선생님의 강연을 들으러 왔습니다."

또 다른 슬픈 사연

2013년 7월, 내 여행기의 독자라는 분으로부터 편지와 함께 그분이 쓰신 수필집이 배달됐다. 제목은 <한과 슬픔은 세월의 두께만큼>. 그리고 작은 글씨로 '강화 민간인 학살의 진실과 과거사법 투쟁사'라는 부제가 달려 있었다.

그분은 시인이자 민간인 학살 희생자 유족회 일을 맡고 있다. 책의 첫 장을 넘기는 순간, '이 책에는 이분이 살아온 이야기가 담겨 있겠구나'라는 느낌이 왔다. 책에는 우리 민족의 잔인한 비극이 실려 있었다.

해방 후 강화도에서 공립학교 교장으로, 장학사로 계셨던 자상하신 아버지, 부지런하고 선한 성품으로 정성스레 6남매를 돌보시던 어머니, 열네 살이였던 언니와 네 명의 동생들, 그리고 당시 열두 살이었던 이분은 부모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으며 행복한 날들을 보냈단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행복한 삶은 1950년 한국전쟁 중 아버지가 어디론가 떠나면서 산산조각 나버렸다.

어느 날, 치안대가 한살배기 남동생을 등에 업고 마당에 앉아 빨래를 하고 있던 엄마를 끌고 갔다고 한다. 얼마 뒤, 어린 동생을 등에 업은 엄마가 여러 사람들 사이에 끼어 어디론가 끌려가는 모습을 봤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것이 당시 열두 살이었던 이분이 전해 들은 엄마·동생의 마지막 소식이었다. 엄마와 동생이 학살 당한 것이다. 그 뒤 이 소식을 접한 할머니가 울며불며 어린 손주들을 돌보기 위해 집에 오셨지만 치안대는 할머니마저 끌고가 학살했다.

곳곳에 냉혈하리 만큼 차가운 시선들 그리고 '빨갱이 가족'이라는 무시무시한 족쇄가 이들 어린 남매를 피멍 들게 했다. 그 힘겨움의 무게에 짓밟힌 이분의 순하고 착한 두 동생들은 병으로 일찍이 세상을 등지게 됐다. 이런 비극 속에는 이들과 함께 동시대를 걸어온 냉소적인 이웃 사람들, 사회, 국가가 있었다. 바로 우리의 야만적인 '무지'가, 우리의 잔인한 '무관심'이 이들의 삶을 파멸시킨 것이다.

이분의 이야기는 비단 억울하게 돌아가신 그분의 어머니와 한살배기 동생 그리고 할머니의 원한 맺힌 이야기만은 아니다. 그 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탯줄처럼 연결된, 서글픈 우리 민족의 삶 그 자체를 송두리째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서슬 퍼런 원한과 절망 그리고 참을 수 없는 슬픔과 그리움이 이분의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뿐만 아니라 용서를 통한 힘겨운 치유의 고통도 절절히 느껴진다.

이분 또한 모든 비극의 근원이 분단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분단을 극복하지 못하면 이런 일은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국가보안법과 나의 외할아버지

2002년 10월에 방영된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중 한 장면. 박순석 의원은 내 외할아버지다.
 2002년 10월에 방영된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중 한 장면. 박순석 의원은 내 외할아버지다.
ⓒ MBC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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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유엔에서마저 폐지를 권고한다는 국가보안법이란 대체 무엇인가' 관심을 갖게 됐다. 그러던 중 유튜브를 통해 한 방송국이 만든 영상물을 접하게 됐다(동영상 보기1, 동영상 보기2).

1948년 11월 국회 제정 당시 국가보안법을 두고 치열한 논란이 빚어졌다고 한다. "3000만 국민이 다 걸릴 이 법을 만들면 자손만대에 죄를 짓는 것이 된다"라고 한 의원이 강력히 저지했었단다.

그러나 일부 의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 법안이 잘 돼야 인민공화국이 되지 않고 자손만대에 자유국가를 물려줄 수 있다"라며 어떤 의원이 법안을 밀어붙였다. 내가 본 영상물은 그 국회의원의 사진을 내보냈는데, 순간 나는 기겁하고 말았다. 그 국회의원이 바로 내 외할아버지 박순석 의원이었기 때문이다. 영상물은 국가보안법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고초를 겪었는지 보여줬다. 멈추지 않고.

나의 외할아버지는 국회의원이기에 앞서 장로교 목사였다. 내 어머니는 외할아버지를 두고 "진실한 '주의 종'이었으며 자상한 아버지였고, 또한 이웃으로부터는 존경도 듬뿍 받으셨다"고 늘 말씀하셨다. 그런 외할아버지는 과연 자신이 밀어붙였던 국가보안법이 대를 이어 천하에 몹쓸 법이 될 줄을 상상이나 해보셨을까. 나는 할아버지의 의도와는 다르게 국가보안법의 생리가 변절됐을 것이라 믿고 싶다.

외할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기 전 "내가 살아생전에 한 일들이 참으로 잘한 일인지 모르겠다"라는 말씀을 남기셨다고 한다. 나는 할아버지의 그 말씀 속에 '무고하게 목숨을 잃은 수 많은 영령들에 대한 참회'가 깃들어 있길 바랄 뿐이다. 나는 앞으로 외할아버지께서 못 다 내려놓은 '참회의 빚'을 짊어질 것이다. 외할아버지의 '마음의 짐'을 대신 지고 참회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수양조카 찾아 또다시 북한으로

북한의 일반 비자
 북한의 일반 비자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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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열흘을 보낸 우리는 2013년 9월 초, 다시 북한으로 가기 위해 선양행 비행기에 올랐다. 관광비자가 아닌 가족을 만나기 위한 일반 비자를 갖고 간다. 2013년 8월에 관광비자를 갖고 북한에 갔으나 북한 당국의 배려로 이미 수양딸 설경이는 만났으니 수양조카 방현수의 가족만 만나면 긴 북한 여정을 마치게 되는 것이다.

강원도에 건설 중인 세포등판 목장에 노력동원 나간 방현수 조카가 '혹시라도 우리와 때를 맞춰 평양의 집으로 돌아왔으면' 하는 실낱같은 희망도 동시에 품고 간다.

심양의 고려항공 카운터
 심양의 고려항공 카운터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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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양공항에 내려 북한의 고려항공 카운터에 이르니 한눈에 봐도 해외동포임을 알 수 있는 사람들이 무리 지어 줄 서 있다. 들고 있는 여권의 색깔이 짙은 청색으로 보이는 게 틀림 없이 재미동포들이다.

이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눈다. 대부분이 나이가 많은 노인분들이다. 워싱턴·하와이·미네소타·일리노이·캘리포니아 등 미국 전역에서 왔다. 이들이 북한을 찾은 이유는 이산가족을 만나기 위해서. 모두 한국전쟁 당시 가족들과 헤어진 분들이다. 대부분 이북이 고향이지만, 그중에는 놀랍게도 나이가 비교적 젊고 고향이 남한인 재미동포 이산가족도 있었다. 무슨 사연이 있었던 걸까. 그분들 중 몇몇이 나를 알아본다.

선양공항. 내 북한 기행문을 읽었다는 재미동포 이산가족과 얘기를 나누며.
 선양공항. 내 북한 기행문을 읽었다는 재미동포 이산가족과 얘기를 나누며.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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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북한기행문을 쓴 '재미동포 아줌마' 아니신가요?"
"네, 맞아요."
"아! 기행문 정말 잘 읽었습니다. 아마 이산가족 재미동포들은 다 읽었을 겁니다. 우리야 북에 가족이 있으니 그 감동이 말할 것도 없었지요. 읽으면서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그러셨어요. 고맙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북에 자주 다니니까 북에 대해 잘 알지 않습니까. 그런데 남쪽에서는 북에 대해 나쁜 것만 보여주는데 신 선생님께서 아주 공정하게 객관적으로 참 잘 쓰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그저 본대로, 느낀 대로, 있는 그대로 일기 쓰듯 썼습니다."
"또, 관광 가시는 겁니까?"
"아니요. 이번에는 저희도 일반비자를 받고 이산가족으로서 수양가족을 만나러 갑니다."
"아, 그 책에 나오는 안내원들 말입니까?"
"네."

"아! 그게 쉬운 일이 아닌데. 피를 나눈 친자식도 아니고. 두 분이 다니시려면 비용도 상당히 많이 들 텐데…. 평양에 가시면 어디 계실 건가요?"
"고려호텔에 있을 예정입니다."
"아, 잘됐네요.  여기 서 계신 이분들도 모두 고려호텔에 계실 겁니다. 앞으로 매일 만나겠네요."
"네, 그렇겠네요. 정말 반갑습니다."

우리도 이산가족이 돼 이들과 함께 섞여 평양행 고려항공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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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음대 졸업.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 음악박사. 전직 성악교수 이며 크리스찬 입니다. 국적은 미국이며 현재 켈리포니아에 살고 있습니다. 2011년 10월 첫 북한여행 이후 모두 9차례에 걸쳐 약 120여 일간 북한 전역을 여행하며 느끼고 경험한 것들 그리고 북한여행 중 찍은 수만 장의 사진들을 오마이뉴스와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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